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869화 (869/917)

#869

1.

창 너머로 경쾌한 새 노랫소리가 들렸다.

커튼을 쳐 놓았기에 날이 밝았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해가 뜨고 난 뒤 시간이 제법 지난 모양이다.

반쯤 텅 빈 눈으로 침대에 누워있던 알비레오는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하얀 알몸을 일으켰다.

워낙에 소리를 질러대서 그런지 목이 탄다.

협탁에 물병이 보였길래 벌컥벌컥 마시며 목을 축였다.

-딱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침대 시트를 어지럽히던 온갖 분비물이 사라진다.

그러니까 눈물, 침, 땀 그리고 입에 담기 민망하나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체액도 말이다

“드디어 끝났다. 드디어….”

염동으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속옷과 드레스까지 갖춰 입자 정말 끝이라는 실감이 뭉실뭉실 밀려온다.

이상하게 안도라기보다는 글썽글썽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밤새 펼쳐진 질펀한 난교 행각은 알비레오를 온갖 시험과 절정에 들게 하였던 것이다.

적어도 5번 정도는 남성이 사정하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고, 앞뒤를 가리지 않고 족히 십수번은 기절할 수준의 쾌락을 주입 당해야 했다.

처음 정신을 잃을 땐 ‘차라리 잘됐다’라고 생각하며 의식의 끈을 놓으려 했던 무자비한 신시우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지나친 쾌락 때문에 멀어지는 의식을 그보다 더한 쾌락으로 각성시키며 기어이 아침까지 알비레오의 정신을 붙잡아 둔 것이다.

“웃!”

그 여운은 아직까지도 남아있어 알비레오의 다리를 후들거리게 하고 있다.

이제 더 짜증 내거나 화를 낼 기운도 없다.

그저 노곤하고 알비레오의 고뇌와는 관계없이 마음을 들뜨게 하는 호르몬의 여파가 푹신푹신한 기분을 느끼게 하고 있을 따름이다.

“내가 왜 이 꼴이 돼야 하는 건데….”

그래도 이 짓거리도 이게 마지막이다.

문제의 원인은 단순했다.

연동의 강도가 ‘쾌락수치’에 비례해 강해지는 걸 간과했다는 것.

원인을 알게 되었으니 이번에야말로 쾌감 연동을 막을 단서를 찾았다.

앞으로는 시우와 데네브의 관계에 더는 고통 받을 필요 없으리라.

“…그나저나, 정말 했네….”

뒤늦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기자 알비레오는 새삼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일어난 일에 대해 반추했다.

데네브는 신시우와 합법적으로 관계를 맺는 사이가 되었다.

아마도 오늘을 계기로 본격적인 연인이 되는 게 아닐까?

데네브가 좋아하니 됐지, 라고 말하고 싶어도 알비레오의 성 관념은 도저히 이 콩가루 관계도를 납득할 수 없었다.

차라리 코스믹 호러물을 보고 있는 듯한 감상이다.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쌍둥이와 한 침대에서 동침하는 건 당장 그만두라고 할 심산이다.

모범을 보여야 할 스승이 견습마녀 앞에서 추태를 보이는 것도 모자라 함께 애무행각을 주고 받다니!

아무리 ‘선’을 넘기 위한 방책이라지만 정도가 있지 않던가?

침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어 환기한 이후 집무실로 향한 알비레오는 여느 때처럼 업무에 매달렸다.

마법 중독 이상으로 일 중독인 알비레오에겐 숫자와 기호로 머리를 가득 채우는 것이 고뇌를 잊게 하는 방법이었다.

-똑똑

“들어와.”

펜대를 잠시 내려놓자 쭈뼛쭈뼛 문을 열고 등장한 이는 알비레오의 여동생 데네브.

“들어가도 돼?”

“어, 들어오라고 했잖아.”

눈치보던 데네브는 발을 세게 디디면 땅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살금살금 걸어왔다.

왜 저러는지는 알비레오도 안다.

알비레오도 지금 저 상태니까.

성교의 여운이란 골치 아플 만큼이나 길어서 몇 시간 정도로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것이다.

묘한 침묵이 거북함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하던 분위기 속에 알비레오가 툭 던지듯 화두를 열었다.

“오는 길에 누구 마주친 사람 있어?”

“응? 아니. 왜?”

“목에 키스 마크 잘 가려.”

“아….”

데네브는 그제야 제 목에 선명한 멍 자국이 있음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부분적인 회복 마법으로 멍 자국을 없앤 뒤 민망함에 입맛을 다시는 데네브.

하긴 조금 전까지 견습마녀 그리고 사위와 한 침대에서 뒹굴고 온 참이다.

그 사실을 언니가 미리 알고는 있었다 해도 증거를 보여버린 이상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

“…….”

다시 침묵.

데네브는 압박 면접을 받는 입사 지원자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언니의 입에서 떨어질 말을 기다렸다.

엄하게 꾸짖는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일 심산이었다.

“데네브.”

긴 한숨 끝에 데네브를 다시 부르는 알비레오.

“응, 언니.”

“고생했어. 죄지은 것처럼 그렇게 있지 말고 볼일 봐.”

데네브는 눈물이 핑 도는 걸 느꼈다.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마음을 품었는지, 그 결과 언니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이제는 데네브도 안다.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아도 정말 몹쓸 여동생인데 하물며 언니는 고지식하고 까다로운 정통파의 귀족.

만약 알비레오와 데네브의 처지가 뒤바뀌었다면 데네브는 절대 언니를 고운 시선으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언니, 나 결심한 게 있어.”

“잠깐만 마음의 준비 좀.”

진지한 눈빛으로 변한 데네브를 보고 알비레오는 각오를 다졌다.

이 판국에 이 이상 혼란스러운 일이 벌어질까 싶으면서도 언제나 신시우와 관련된 사고는 알비레오의 상상력을 아득히 초월했기에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이다.

“...뭔데?”

“나, 시우 군이랑 연인 관계 안 하려고.”

“...뭐?”

그렇기에 데네브의 선언은 어떤 발언보다도 충격적이었다.

뭐지? 왜 이렇게 된 거지?

당장 어젯밤에 그렇게 뜨겁게 불장난을 해놓고?

불륜은 불륜일 때 제일 짜릿하다는데 막상 마음 놓고 해보니까 별로였나?

“왜, 왜…. 왜?”

갑작스러운 여동생의 심리변화에 언젠가 잡지에서 읽었던 찌라시까지 떠올리고만 알비레오가 더듬더듬 물었다.

‘더 위험한 뭔가를 하려는 거 아닌가? 결혼 선언이라던가?’ 같은 불안감을 품은 채 말이다.

“언니가 그랬잖아. 처첩 다툼은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본다고.”

“그때랑은 이야기가 달라 데네브. 내 눈치 보느라 그러는 거라면 괜히 그러지 말고….”

“아니야, 이미 쌍둥이랑 시우 군이랑도 이야기 끝내뒀어.”

백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했다.

데네브의 눈빛을 본 알비레오는 그녀가 가벼운 마음으로 혹은 홧김으로 꺼낸 말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고뇌와 슬픔 속에 괴로워하던 데네브는 이미 없었다.

새장을 벗어난 카나리아의 자유로움이 그녀의 언행에 묻어 나왔다.

“나도 너무 철이 없었던 것 같아.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아니, 데네브. 그런데 왜 그런 다짐을 한 건지 물어봐도 될까?”

침대에서 느지막이 일어나 다 함께 목욕하며 데네브는 많은 것을 떠올렸다.

오딜과 오데트가 어떤 각오와 다짐으로 데네브와 한 침대에 오르고, 시우를 양보했는지.

쌍둥이는 데네브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회적 터부를 딛고 제 남편을 공유할 만큼이나 말이다.

그리고 또 떠올렸다.

결국 몇 년 지나지 않아 데네브는 오딜과 오데트를 떠나게 될 것이다.

일전 언니와 다툴 때는 시우의 마력 증폭 능력을 이용해 변칙 계승을 하겠다느니 하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러나 더욱 객관적으로 상황을 인지할 수 있게 된 지금 그게 얼마나 많은 대가를 감수해야 하는지는 데네브도 잘 안다.

어쩌면 데네브와 알비레오의 삶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대가인 것이다.

낙인을 계승하게 되면 시우와도 아름다운 이별을 하게 되겠지.

그건 아직 인간의 감수성이 짙게 남아 있는 그에게도 커다란 상처가 될 게 뻔했다.

하물며 그게 연인 관계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평생 비밀로 해야 할 줄 알았던 마음을 전했고 그의 마음도 알았어. 쌍둥이가 정말 몰라보게 컸다는 것도 확인했어.”

참 신기했다.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꽁꽁 감춰야하고 먼발치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을 때는 그토록 괴로웠는데.

그와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된 기회를 포기하는 게 그렇게 아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후련함마저 느꼈다.

그건 아마도 데네브가 정말로 전하고 싶던 마음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참 어려웠지만 그래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즐거움이었어. 그걸 알았으니까 이제 이걸로 충분해.”

“…….”

알비레오는 입을 다물었다.

참 신기하다.

불과 몇 분 차이로 언니동생이 나뉘게 된 쌍둥이 자매지만 데네브는 어딘가 알비레오보다 어린 구석이 있었다.

백년이 넘게 지나도 챙겨줘야 할 여동생처럼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데네브는 바뀌어 있었다.

강인하다고 해야 할지 흔들림이 없다고 해야할지….

저게 사랑의 멋짐인가 뭔가인가?

여동생이 양보를 했으니 자신도 양보해야겠지.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한 알비레오가 입을 열었다.

“데네브, 루시 백작이 그러는데 앞으로도 실험 자료가 종종 필요할 거래.”

“데이터?”

“연인이 마땅치 않으면 그…. 실험의 일환이라도 좋으니까. 만나도 좋다는 얘기였어.”

루시 예소드 백작은 시우의 연인이 아니지만 변칙 계승 실험을 위해 종종 시우와 동침한다.

그런 관계라면 알비레오도, 데네브도, 쌍둥이도 크게 곤란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이런 양보점까지는 도달한 것이다.

알비레오의 의도를 읽은 데네브는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볼게. 그나저나, 갈리나 몸 상태는 어때?”

“스미르나 양이 잘 치료해줬나 봐. 벌써 회복세라고 하더라고. 술이나 조금 마실래?”

“응, 좋아 언니.”

그간 시우의 문제로 서먹서먹했던 알비레오와 데네브는 긴 시간 끝에 화해 주를 나누었다.

2.

그 시간.

“…….”

추락방지용 난간을 넘어 고층 빌딩 옥상에 걸터앉은 린네.

그녀는 번화한 현세의 도시풍경을 내려보며 허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한없는 우울함, 권태감, 탈력감.

고층 빌딩이기에 거세게 휘몰아친 바람이 가슴에 뻥 구멍을 뚫어버린 것 같다.

마치 솜사탕이 된 기분이랄까.

“이상하다.”

뭔가 이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