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2
1.
두 장모님과의 삼자대면 이후 알비레오로부터 쌍둥이의 가출한 장소를 귀띔들은 시우.
혼란한 마음을 다잡고 오딜과 오데트를 만나기 위해 예소드 백작가로 향했다.
누가 잘못했느냐에 대한 책임을 확실히 하긴 어렵겠지만 일단 찾아가 머리라도 박을 셈이다.
데네브와 시우의 키스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뛰쳐나간 쌍둥이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하….”
거기에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쌍둥이가 떨어뜨리고 간 만년필과 함께 상자 안에 들어있던 쪽지다.
쌍둥이가 정성껏 눌러 적어간 편지.
새롭게 명성을 알리게 된 시우의 축하로 시작해 ‘사랑해 조수님’으로 마무리되는 편지였다.
이런 기특한 선물을 준비했는데 보이게 된 장면이 어머니나 다름 없는 작은 장모님과의 키스였다니.
책임감에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물론 이번 사고에 직접적인 귀책사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설마 작은 장모님이 그런 마음이라고 누가 눈치챌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제 와 드는 후회는 적어도 쌍둥이에게 일련의 관계에 관해 제대로 이야기해야 했다는 것이다.
큰 장모님께 비밀로 하라는 당부를 곧이곧대로 따르는 게 아니었다.
이는 순서의 문제다.
지금 쌍둥이의 가출은 데네브와 시우가 키스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
더불어 둘이 비밀스러운 불륜 관계였음을 의심했기 때문이리라.
헌데 이제와서 뒤늦게 검증을 위해 뒤로 관계한 사실, 어항에서 마력 충전을 위해 관계한 사실을 밝힌다면 과연 쌍둥이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도 사과는 해야지.”
시우는 시우대로 혼란스럽지만 그 혼란이 쌍둥이에 비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릎 꿇고 석고대죄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은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자.
그렇게 다짐했다.
“시우 씨, 미안해요. 오딜 양도 오데트 양도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연락을 받고 미리 응접실로 나와 있던 예소드 백작은 곤란하다는 듯 대신 사과했다.
“그런가요?”
“네, 대강 사정은 들었어요. 미안해요 시우 씨. 제가 괜히 연구 데이터를 얻겠답시고 오지랖을 부리지만 않았더라도….”
“아닙니다. 제가 똑바로 처신 못해서 탈 난 거죠.”
짐작컨대 예소드 백작님의 개입은 미미했을 것이다.
또 괴로워하던 작은 장모님을 위해 호의를 베푼 그녀를 탓하기도 뭐하다.
“지금 억지로라도 만나면 역효과이겠죠?”
“시우 씨, 마음은 이해하지만….”
“역효과 맞아, 조수님.”
쨍한 목소리가 응접실에 울렸다.
깜짝 놀라 앞을 보니 팔짱을 끼고 무표정하게 서 있는 오딜이 보인다.
밝은 햇볕에 비추면 은은한 보랏빛이 돋보이는 치렁치렁한 흑발.
자수정을 연상케 하는 아리따운 눈동자.
여느 때와 같은 오딜이다.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그러나 입술을 비틀며 비웃음을 짓는 오딜은 평소의 모습과는 달랐다.
시우를 노려보는 서릿발 같은 눈빛에서는 냉정함이 뚝뚝 흐른다.
“최소한 양심이라도 있으면 찾아오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뚜벅뚜벅 걸어온 오딜이 시우의 앞에 우뚝 선다.
시우보다 머리 하나 작은 오딜이지만 위압감이 태산 같다.
그 옛날 무지렁이 조수님 시절에 보았던 오딜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오딜 님….”
“아직도 내가 봤던 게 현실이라는 게 믿기질 않아.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지. 당연히 있으면 안 되지. 조수님이 아무리 다른 여자친구를 많이 만들어도 이해했어.”
-빠악!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었던 오딜이 깡총 뛰어올라 이마로 시우의 턱을 쳤다.
알고도 맞아준 것이지만 단단한 이마와 턱의 충돌이다.
지끈한 통증이 두개골을 울린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아?!”
오딜이 악에 받친 듯 소리친다.
“죄송합니다.”
“진짜 너무해, 조수님 완전 너무해.”
“…….”
구질구질하게 오해이니 뭐니 말을 하기보다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구했다.
오딜이 시우를 넘어뜨리고 풀파워 왕복 싸대기를 갈겨도 할 말이 없는 처지다.
“그래도 나는 조수님 미워 못할 거야.”
코를 한차례 훌쩍인 오딜이 꾹꾹 눌러 담듯 말했다.
“오딜님….”
“조수님은 내 영웅인걸.”
애처로운 눈물을 병아리처럼 뚝뚝 흘리면서도 오딜은 시우의 소매를 꽉 붙잡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조수님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모두 제 잘못입니다. 다시 돌아오실 땐 무릎이 닳더라도 감히 용서 구하겠습니다.”
“응, 알아.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더 필요해. 나도 오데트도.”
한없는 관대함과 용서.
감동을 넘어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오딜의 태도에 시우는 더더욱 면목이 없어졌다.
“이제 가봐. 우리 잘 지내고 있을 테니까. 조수님은 반성 실컷 하고 있어.”
조용히 등을 돌리려던 오딜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소드 백작이 곤란하다는 듯 새로운 급보를 가지고 왔으니 말이다.
“오딜 양, 제머나이 저택에서 급보가 왔어요.”
2.
갈리나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오딜과 오데트는 가출을 포기하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모든 일에는 전후가 있다.
조수님과 작은 스승님의 충격적인 관계는 물론 사소하지 않은 사건이지만, 갈리나가 폐렴으로 쓰러졌다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언제나 예의범절과 귀족 영애의 소양을 운운하고, 피도 눈물도 없이 엄한 모습을 내비치는 갈리나지만 기저엔 따뜻한 애정이 있다는 걸 안다.
쌍둥이가 아직 젖먹이이던 시절부터 보모 역할을 해주었던 큰어머니나 다름없는 것이다.
“갈리나!”
“시녀장 님!”
오딜과 오데트는 헐레벌떡, 그러나 행여 요양을 취하는 갈리나에게 무리가 갈까 매우 조심스레 다가와 그녀의 양손을 잡았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까슬까슬하고 두꺼운 손바닥이다.
“오딜 님, 오데트 님.”
침대 위에 누워있는 갈리나에서 평소 느낄 수 있던 딱딱한 엄격함은 없었다.
몇 년은 순식간에 늙어버린 것처럼, 지친 모습만이 보일 뿐이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잠자리에 드셨어야죠.”
“갈리나가 쓰러져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발 뻗고 잤겠어?”
“맞아요! 어쩌다가 이렇게 쓰러지실 때까지….”
“빨리 자리 털고 일어나. 우리가 마녀가 되는 모습 꼭 보기로 약속했잖아.”
“맞아요, 이대로 계속 아픈 건 절대로 용납 못 해요. 명령이에요.”
울먹거리는 쌍둥이를 인자한 미소로 바라보며 갈리나는 웃었다.
“새삼 어엿한 숙녀가 되셨군요. 오딜 아가씨도, 오데트 아가씨도.”
“당연하지, 우리가 누군지 알아?”
“위대한 제머나이 백작가의 이름을 이을 오딜과 오데트라구요.”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지요. 금방 회복할 테니 아가씨들도 푹 주무셔요.”
“귀염둥이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비레오가 쌍둥이를 떨어뜨려 놓았다.
이대로라면 낮이고 밤이고 옆에 붙어 있을 게 뻔했으니 말이다.
“더 번잡스럽게 굴지 말고 이제 쉬게 해 드리렴. 자, 어서.”
“네, 스승님.”
“시녀장 님. 내일도 찾아뵐게요.”
마지막 인사를 끝내고 방에서 나온 쌍둥이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3.
오딜과 오데트는 재차 가출을 감행했다.
가출이라고 해봐야 예소드 백작가로 돌아온 것이지만 말이다.
손님용으로 받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여러모로 생각이 복잡해서인지 당최 잠이 오지 않는다.
“언니.”
“응.”
“결국 조수님은 아무것도 모르셨다는 거네.”
“그러네.”
“그래도 말해주셨어야 했어. 우리한테만 비밀로 하다니 나빠.”
“그건 그래.”
가출하기 전 알비레오는 쌍둥이의 채근에 못 이겨 조심스레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알게 된 진실은 쌍둥이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불륜이 아니라 작은 스승님의 일방적인 짝사랑이라는 것에 1차 충격.
진도를 키스까지 나간 게 아니라 ‘검증’을 위해 뒤로 관계, 어항의 탈출을 위해 주기적인 관계, 예소드 백작에 실험에 협력하기 위해 재차 관계했다는 쇼킹한 진실도 알게 되었다.
‘애들아, 이해하기 어려울 건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데네브를 용서해 줄 수는 없겠니?’
‘싫어요! 이걸 어떻게 이해해요?’
‘데네브는 분명히 성숙한 마녀이고 나이도 많지만 남녀 관계에는 아무것도 모르잖니. 너무 서툴러서 벌어진 일 일거야.’
‘큰 스승님까지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어요.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미안해, 괜히 말했구나. 데네브가 너무 괴로워하는 것 같아서…. 너희에게 정말 미안해하고 반성하고 있다는 건 알아줬으면 싶었어.’
그 당시에는 씩씩대며 분개했던 쌍둥이지만 침대에 누워 천장화를 감상하고 있자니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바뀌었다.
첫 가출 무렵 느꼈던 배신감과 절망감이 어느 정도 희석된 것이다.
심지어 조수님과 작은 스승님이 성관계를 했다는 걸 알았음에도 오히려 배신감이 잦아들었다.
장서간 불륜 관계가 합의하에 이뤄진 음습한 욕망의 충돌이 아니라, 애달픈 금단의 짝사랑이었다는 것.
그게 가장 큰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언니.”
“왜.”
“작은 스승님이 조금 안쓰럽게 느껴지면…. 내가 너무 무른 걸까?”
“그걸 질문이라고 해? 물러터진 오데트. 넌 물렁이 오데트야.”
“그치만…. 작은 스승님이 딱해.”
“…바보 오데트. 잠이나 자.”
그리고 배신감의 근원을 조금 잊자 뭉글뭉글 이런저런 잡념이 피어난다.
잡념에는 갈리나 시녀장이 쓰러진 사건 역시 미묘한 접점을 지니고 있었다.
“갈리나, 나이가 많이 든 것 같아.”
“맞아, 시녀장 님이 그만큼 연세가 있으신 줄은 몰랐어.”
“…우리가 마녀가 될 때까지 살아계실까?”
“당연하지. 내가 명령했는걸.”
아직 쌍둥이는 이별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조수님과 헤어질 뻔했던 가슴 아픈 과거가 있긴 해도 지금은 함께 잘 지내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왜 죽는 걸까? 영원히 함께 행복하게 살면 좋을 텐데.”
“맞아, 마법도 계승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계속 살지.”
하지만 병상에 누워있던 갈리나의 모습은 새삼 이별이 무엇인지를 쌍둥이에게 고하고 있었다.
막연히 떠올리던 때와는 달리 피부에 스며드는 서늘한 예고다.
이별이란, 작별이란 무엇일까.
아침마다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우다다 쏟아내는 일과를 들을 수 없는 것.
밤에 몰래 탈출할 때 눈치 볼 사람이 사라지는 것.
귀족 영애의 몸가짐 운운하며 옷차림을 지적하는 말이 더는 들려오지 않는 것.
이따금 기특한 행동을 할 때마다 호들갑 떨며 글썽이는 눈물을 볼 수 없게 되는 것.
그것이 작별이다.
매일 아침 꽃단장을 하고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갈 필요가 없는 것.
식탁에서 수업에서 칭찬받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
어엿한 숙녀가 된 만큼 귀염둥이들이라는 호칭을 듣지 않아도 되는 것.
위대한 마녀의 과업을 온전히 물려받는 것.
이것 또한 이별이다.
성큼성큼 다가와 시시콜콜한 행복을 앗아갈 테지.
갈리나의 모습과 두 스승님의 모습이 겹쳐 보인 건,
결국 마녀이건 인간이건 이별의 순간 앞에서는 평등하기 때문일 것이다.
“언니.”
“응.”
“내일 아침에 작은 스승님 뵈러 가지 않을래?”
“…싫어. 넌 자존심도 없어?”
“언니이이…. 한 번만 내 말 들어줘.”
이런 면에서는 조금 더 자존심이 강한 오딜이다.
큰 스승님을 닮은 언니의 이런 점을 알기에 애교를 피우며 안기는 오데트.
“몰래 보고만 오는 거야.”
오딜은 못 이긴 척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