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861화 (861/917)

#861

1.

아르스마그나 타운의 일등지위에 세워진 제머나이 백작가의 규모는 궁전에 비견되곤 한다.

호수를 포함한 넓은 정원과 많은 건물, 다양한 시설을 갖춘 부지는 작은 마을 규모에 필적한 것이다.

아무리 마법이 편리하다 한들 이만한 넓이의 저택을 베스트 컨디션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사용인은 필수다.

백작 가는 상시 50여 명의 사용인을 고용해왔다.

이 많은 고용인을 총괄하여 관리하는 이가 바로 갈리나 시녀장.

직위는 시녀장에 불과하지만, 저택 내의 유지보수 및 경영, 재무관리와 금전 출납까지 도맡는 집사(steward)급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알비레오와 데네브가 마음을 놓고 저택을 비울 수 있는 이유도 충직하고 현명한 노부인 갈리나가 있기 때문이었다.

“베라, 눈물 뚝하고 스미르나 양을 불러와 주세요.”

“네… 훌쩍!”

“자자, 한시가 급하니 어서.”

베라 앞에서는 감정을 숨긴 채 냉정하게 지시를 내렸으나 마음이 편치 않다.

갈리나와 알비레오는 단순한 종과 주인의 관계가 아니었다.

갈리나가 아직 소녀이던 시절부터 이어진 인연은 오딜과 오데트의 보모 역할을 맡길 만큼 끈끈했으니 말이다.

쌍둥이가 아직 갓난아기였던 시절엔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사춘기 시절에도 그녀의 지혜로운 조언으로 양육 지침을 확실히 할 수 있었다.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입술을 꾹 깨무는 알비레오는 병실 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 누워있던 갈리나는 알비레오를 보자마자 몸을 일으키려 들었다.

“큰 주인님. 못난 꼴을 보였습니다.”

“괜찮아요. 무리하지 말고 그냥 누워있어요. 갈리나.”

저대로 두면 정말 일어날 것이 뻔했기에 알비레오는 한발 앞서 그녀의 옆에 다가가 손을 잡아주고 모포를 덮어주었다.

“어떻게 된 건가요? 몸은 괜찮나요?”

“이거 참…. 시간이 지나도 꽃처럼 아리따우신 주인님을 모시고 있자니 저도 백 년 천 년 젊을 줄로만 알았나 봅니다. 소싯적 때처럼 일을 잡다 보니 이런 사달이 나버렸네요. 콜록! 콜록!”

갈리나는 기침 사이마다 웃으며 농을 던졌다.

“이번이 제가 직접 준비하는 마지막 수확제일 듯하여 욕심을 부렸는데…. 과욕은 탈을 부른다니 옛 현인들 말씀 틀린 것 하나 없지 뭡니까?”

“천천히, 천천히 말해요 갈리나.”

“제 조모께서는 여든이 넘도록 백작 가를 위해 봉사하셨다 들었는데…. 벌써 이런 못난 꼴이라니 면목이… 콜록! 콜록!”

“그런 말 말아요. 우선은 회복에 전념해야죠. 게헨나 최고의 의사를 불렀으니 곧 올 거에요.”

얼굴에 가득한 주름은 어느덧 항상 정기 넘치던 그녀를 지쳐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대충 묶어 올린 머리는 미처 염색하지 못한 새치로 가득하고, 손등의 피부는 탄력이 없이 늘어져 마치 거죽을 덧씌운 듯 보였다.

알비레오가 기억하는 갈리나는 당차고 앳된 소녀였고,

씩씩하고 똑 부러지는 처녀였으며,

관록이 붙어 저택 내의 사정은 눈감고도 처리하는 중년 부인이었는데 말이다.

세월의 흐름이란 이렇듯 인간에겐 가혹하리만치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다.

알비레오는 뜨거워진 눈시울을 차가운 손등으로 눌렀다.

“환자가 여기 있나요?”

꼭두새벽에 갑자기 호출당한 예빈이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들어왔다.

2.

“상태가 좀 어떤가요?”

병실 앞에 선 알비레오는 초조함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급성 폐렴이에요. 과로 탓에 원래 있던 기관지 염증이 폐 조직까지 퍼진 것 같아요.”

“문제없는 건가요?”

“네, 빠르게 조처를 했으니 이 이상 악화하지는 않을 거에요. 다만 충분한 요양과 회복을 취하시는 게 좋아요.”

아직 대마녀 타이틀을 달지 못한 예빈이지만 치유마법에 관해서는 권위자이다.

적어도 인간을 대상으로 한 치유마법 중 그녀보다 뛰어난 마녀는 없었다.

일단 한시름을 놓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었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통나무도 번쩍 들어 올리고 곰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것 같던 여장부 갈리나다.

잔병치레 한번 없던 그녀가 병환 때문에 쓰러지다니, 나이가 든 모습을 눈으로 봐도 믿기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환자분 연세가 연세이다 보니. 더욱 조심해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절대 안정 꼭 당부해주세요.”

“고마워요, 스미르나 양. 진료소에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 말해주세요. 지원을 약속할게요.”

“아니에요, 백작님 언제나 신세 지고 있는 걸요.”

예의 바르게 인사한 예빈은 돌아가려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백작님,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지만요….”

“편히 말씀하세요.”

“괜한 걸 알려 드리는 상황이 될 수 있어서요.”

“…….”

눈치가 너무 빠른 것도 마냥 좋은 일은 아니다.

알비레오는 망설이며 말을 꺼낸 예빈이 결코 희보를 전하려 함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조심스레 털어놓는 예빈.

“인간의 수명이란 여러모로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요. 타고난 개인차도 크고 환경의 영향도 많이 받으니까요. 그래서 단정 짓긴 힘들지만 이번 폐렴과 별개로 갈리나 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거에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대충 어느 정도 시간이 남은 건가요?”

“당장 일을 그만두시고 충분히 조치를 취했을 경우 2년 남짓일까요…?”

알비레오는 휘청이려는 다리를 다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늦은 시각 수고 많았어요.”

“네, 백작님.”

예빈이 돌아가고 알비레오는 다시 병실로 들어섰다.

갈리나는 치료에 지쳤는지 눈을 감고 잠이 들어 있었다.

좀 전과 달리 평온한 표정이지만 숨길 수 없는 피곤함이 묻어나온다.

“…….”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면 그 모양은 아마도 육체라는 틀 안에 채워지지 않을까?

알비레오는 때때로 곱씹던 추측을 떠올렸다.

소녀의 모습일 때는 어린 영혼이,

처녀의 모습일 때는 젊은 영혼이,

장년과 노년의 모습일 때도 걸맞은 영혼이 틀을 따라 모양을 잡는 것이다.

그렇기에 20대 초반에서 노화가 멈춰버린 마녀들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어딘가 유치하고 어린 구석이 있는 거고,

반면 고작 70년 남짓한 세월을 살아온 인간은 나이테가 쌓인 나무처럼 지혜로운 통찰력을 지니는 것이고 말이다.

이제껏 제머나이 백작가를 모시다 수명을 쫓아 별이 되어버린 가신들.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알비레오의 추측은 확신에 가까워져 갔다.

갈리나 역시 그랬다.

젊었을 적만 해도 까마득히 어려만 보이던 그녀는 쌍둥이를 견습마녀로 들였을 무렵엔 어머니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알비레오와 데네브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온종일 기운차게 울어대는 오딜과 오데트를 능숙하게 어루었고, 사춘기가 와서 삐뚤어지려던 둘을 바로잡았다.

그렇기에 계승만큼은 꼭 보여주고 싶었다.

오딜과 오데트가 어엿한 마녀가 되어 제머나이 백작가의 이름을 잇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말이다.

예빈이 말한 2년 남짓한 시간은 아마도 이상적인 환경에서 최고의 케어를 받는 걸 전제로 할 것이다.

그리고 오딜과 오데트는 아직 계승까지 3년의 세월이 남아있다.

과연 시간에 맞출 수 있는 걸까?

“…….”

이별.

몇 번을 거쳐도 익숙해지지 않은 필연의 산물.

머지 않은 시간 오딜과 오데트도 데네브와 알비레오와의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

20년이란 사랑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하지만 여한 없이 마음껏 사랑하기엔 부족한 시간이다.

하지만 견습마녀로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스승에게 낙인을 물려받은 견습마녀는 상실의 아픔을 딛고 짧디짧은 추억을 소중히 간직한 채 주어진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나아간다.

알비레오와 데네브가 그랬던 것처럼.

스승님이 그랬던 것처럼.

스승님의 스승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고의 관성 탓일까, 아니면 그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일까.

이런 구조를 애석하게 여기면서도 알비레오는 이제껏 계승 체계에 의문을 지닌 적 없었다.

주어진 권리에 대한 대가, 혹은 의무 정도라고 생각했다.

‘시우 군이 있다면…. 쌍둥이를 떠나지 않고도 계승을 할 수 있어!’

언젠가 들었던 데네브의 허황한 주장이 떠올랐다.

확실히 예소드 백작의 실험을 통해 시우의 증폭 능력을 활용한 낙인 전승은 이론 단계를 넘어 본궤도에 올랐다고 한다.

당시엔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변칙 계승은 만능이 아니라 커다란 페널티를 담보로 하니 말이다.

하지만 쌍둥이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걸 기정사실인 양 받아들이는 일.

그게 정말 오딜과 오데트를 위한 일인 걸까?

“…나도 조금 평정을 잃었네.”

알비레오는 고개를 내저으며 잡념을 털어냈다.

3.

제머나이 백작가의 징벌방은 첨탑의 꼭대기 방에 있다.

본래는 사용되는 일이 없기에 없는 장소로 취급되는 그 장소에 데네브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차디찬 돌 바닥의 냉기와 요철이 무릎을 짓누르는 와중.

데네브의 손에 들린 채찍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등을 파고든다.

-찰싹! 찰싹!

어깨 어림에서 움직일 때마다 새된 소리를 내는 채찍은 작은 움직임만으로 끔찍한 통증을 유발하는 고문기구나 다름없었다.

등이 파인 허름한 천 옷을 걸친 데네브의 살갗이 울퉁불퉁한 자국으로 물들고, 벌겋게 핏물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잘못된 욕정을 품고, 그로 인해 딸아이를 상처입힌 죄악을 고행으로 단죄하는 것이다.

“…….”

경건한 수도녀처럼 눈을 감고 고통을 감내하는 데네브.

“데네브!”

갈리나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징벌방을 찾은 알비레오는 그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살이 터지다 못해 천 옷의 허릿자락을 붉게 물들였다.

무척이나 쓰라리고 아파 보였다.

“그만! 그만해!”

“언니, 나는 속죄해야 해.”

데네브는 알비레오가 들어왔음에도 묵묵히 손을 움직였다.

보다 못한 알비레오가 채찍을 뺏어 들었다.

“이렇게 한다고 쌍둥이가 좋아할 것 같아?”

“그럼 언니, 내가 무슨 염치로 쌍둥이를 찾아가 용서해달라고, 미안하다고 입을 열겠어. 이게 내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방법이야.

데네브가 하는 행동은 명백한 바보짓이고 자기만족이다.

혹자는 이런 행위를 보고 보여주기식 속죄라고 코웃음 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비레오는 데네브가 얼마나 요령 없고 지고지순한 사람인지 알고 있다.

데네브는 진심으로 허름한 천 옷을 입고, 침대 같지도 않은 돌더미 위에서 잠자며, 계승 전까지 이 차디찬 골방에서 고행을 이어나갈 결심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까지 몰아넣었을까.

제머나이는 둘이서 하나라는 말을 운운하며 정작 여동생의 말을 진지하게 되살펴 보지 않은 것이다.

“데네브.”

“…….”

“내가 도울게. 시우 군과 만나는 거.”

알비레오는 결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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