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0
1.
루시 예소드가 쌍둥이를 발견한 건 보더타운의 선착장 인근이었다.
비에 홀딱 젖은 데다가 훌쩍훌쩍 울고 있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어 우선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
원칙적으로 견습마녀는 보호자 동반 없이는 게헨나 밖으로 나갈 수 없지만, 출입국 사무소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던 것부터가 가출을 단단히 마음먹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훌쩍….”
“패애앵…!”
알비레오와 원격 통신을 마친 예소드 백작은 타올을 몸에 돌돌 말고 소파 위에서 훌쩍이는 쌍둥이에게 말했다.
“애들아, 코코아 마실래?”
아무리 튼튼한 반영체라지만 이 추운 날씨에 빗물을 홀딱 뒤집어썼다간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다.
몸을 따뜻하게 해줄 겸 우울할 때 좋은 달콤한 코코아를 내놓았다.
“감사합니다, 훌쩍.”
“감사합니다 백작님….”
“편할 만큼 머물다가 가도 좋아. 불편한 일 없도록 해둘 테니까.”
번갈아 대성통곡하다 지쳤는지 축 늘어져 코코아를 받아드는 오딜과 오데트.
애벌레가 지나가듯 퉁퉁 부은 눈이 참 애처롭다.
알비레오도 쌍둥이가 왜 가출했는지 모르는 눈치이고, 이쯤 되자 궁금해졌다.
예소드 백작은 둘이 조금 더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애들아, 그런데 왜 가출한 거니?”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삐쭉 튀어나오는 쌍둥이의 아랫입술.
동시에 조금은 말라가던 눈물샘이 터진 건지 다시금 줄줄 눈물이 흐른다.
“마, 말하기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니, 아니에요…. 후에에엥!”
“흐아아아앙!”
즉각 스포츠카 배기음 소리처럼 우렁차게 우는 쌍둥이를 보고 예소드 백작은 절절매었다.
조금 더 기다릴 걸 괜히 들쑤신 느낌이다.
“사실…. 사실, 저희 작은 스승님이랑….”
“신시우 조수님이랑….”
이윽고 쌍둥이의 입으로부터 모든 일의 원인을 알게 된 예소드 백작.
“키스를 두 사람이?”
“네…. 너무해요…. 작은 스승님도 조수님도.”
“완전 나빴어!!!”
“장모랑 사위인데! 작은 스승님이랑 조수님인데!”
잠깐 폭발을 쉬던 화산처럼 다시금 펑펑 터지는 쌍둥이를 보며 예소드 백작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걸 느꼈다.
“우선 조금 쉬고 있으렴.”
예소드 백작은 쌍둥이를 두고 잠시 방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진작에 알고야 있던 사실이다.
데네브의 본심을 누구보다 먼저 알게 된 장본인이 루시 아니던가?
데네브와 루시의 몸을 바꿔치기해 신시우와 관계를 맺는 것이 예소드 백작의 아이디어였으니 말이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데네브는 상사병에 효과적인 ‘치유’를 받았고, 루시는 ‘신시우와 견습마녀가 있는 마녀 간 관계’를 지켜보며 훌륭한 실험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으니 윈윈인 계약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알비레오에게 걸려버리는 통에 된통 쓴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이렇게 심각하게 번질 일일 줄은 몰랐다.
데네브는 계승을 얼마 앞두지 않은 황혼기의 마녀기도 하고, 또 똑 부러지는 사람인 만큼 첫사랑에 혼란을 느낄지언정 금방 중심을 잡을 것이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스노우볼이 구를 줄이야.
아무래도 디아나와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다는 가능성에 눈이 멀어 이 사안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다.
루시에게도 전혀 책임이 없다고는 말하기 힘든 상황.
“이걸 어쩜 좋아….”
예소드 백작은 한숨을 푹 쉬었다.
2.
시우와 데네브, 그리고 알비레오는 한자리에 모였다.
세 사람 사이에 무겁게 흐르는 분위기는 여느 때와는 전혀 다르다.
“미안해요, 시우 군. 미안해, 언니….”
데네브는 눈물 반, 떨리는 목소리 반으로 그간 그녀의 마음을 죄다 털어놓았다.
미칠 듯이 수치스럽고 부끄럽기에 영원히 감추어두고 싶었던 비밀이지만, 마음에 상처 입었을 쌍둥이를 생각하니 도저히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침묵을 지키는 시우와 알비레오.
특히 알비레오는 표정이 좋지 못했다.
눈시울이 붉어져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다.
그도 그럴게.
이 자리에 악의를 품고 잘못한 사람이 없지 않은가?
처음 데네브의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철없어진’ 여동생의 요령 없는 첫사랑이라고만 여겼다.
그렇게 오랜 기간 남자 손도 잡지 못하고 살아왔으니 소위 몸정에 휘청이는 것이라 말이다.
그리고 그토록 가벼운 마음이라면.
잠깐의 실수에 불과하다면.
데네브가 어련히 다잡으리라 믿으며 방치했다.
망할 놈의 사위 때문이다, 늦바람이 든 데네브 때문이다 등등의 이유를 들며 아니꼽게만 보아왔다.
개같이 꼬여 버릴 족보에 한숨만 푹푹 쉬었던 게 전부였던 것이다.
“…….”
하지만 정작 한 번도 데네브의 말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 본 적은 없었다.
둘이서 한몸인 제머나이라면서 망측하다는 이유만으로 남의 일처럼만 대했다.
데네브의 마음을 순간의 충동, 혹은 설익은 마음쯤으로 치부해 버렸기에 일이 이 지경이 와서야 진지한 대화를 하게 되었다.
진작에 이런 자리를 주선했어야 했다.
알비레오는 책임을 통감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우울한 목소리로 나서는 사위.
“조금 일을 돌아가더라도 어항에서 알아서 처신 해야 했는데. 괜한 일을 만든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잖아요. 시우 군의 잘못이라고 보지 않아요…. 모든 건 다 제가 부족한 탓이죠….”
조금 객관적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된 알비레오가 판단하길 신시우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던 듯하다.
아니, 어렴풋이 낌새는 짐작해왔지만, 의도적으로 눈을 돌려왔다는 편이 올바를 것이다.
나름 저만의 선을 지니고 적절하게 그을 줄 아는 신시우다.
‘혹시 작은 장모님이 나를?’이라는 마음을 품는 것만으로 죄송한 일이라 여겨왔을 터.
그런 와중에도 제 잘못이라 말하며 책임지려는 사위를 보며 알비레오는 이제껏 너무 색안경을 쓰고 시우를 바라본 게 아닌가 싶었다.
“오딜 님과 오데트 님에게는 제가 잘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도 문제였네요, 진작 검증 사실에 대해서도 말씀드릴 걸 애매하게 비밀을 늘리려다 일을 망친 것 같습니다.”
시우는 시우대로 혼란스러운 와중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검증 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어항에서는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작은 장모님의 뜨거운 유혹을 무시하고 의무적인 꿀벌섹스만 이어갔다면….
차라리 지금보다야 상황이 낫지 않았을까?
세상 사람들은 사랑을 정신적이고 숭고한 무언가로 표현하고 싶어하지만 남녀 관계에 섹스가 끼치는 영향은 절대 적지 않다.
특히나 그게 첫 관계라면 더더욱 그렇다.
“일단 알았어요. 시우 군은 자리를 비워줄래요? 데네브와 할 얘기가 있어서.”
“아닙니다. 저도 함께 나눠야 할 문제인 것 같아서요.”
“그게 아니라 자매끼리 나눌 대화가 있어서 그래요. 필요하면 제가 찾아갈게요.”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데네브에게 뭔가 말을 할까 말까 하다 묵묵히 방을 나서는 시우.
알비레오의 집무실에는 두 백작만이 남았다.
알비레오는 생각을 정리했다.
“데네브,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 거니?”
예전엔 무작정 데네브를 쏘아붙이던 알비레오다.
제발 정신 차리라고도 애원도 해봤고, 빨리 마음 접으라고 다그쳐도 봤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견습마녀와 처첩 다툼하는 꼴은 못 본다고 으름장도 놓아 보았다.
그러나 절절한 데네브의 사연을 듣고 나자 그것도 쉽진 않다.
“데네브, 네가 정 힘들다면….”
따라서 ‘계승 전까지만’이라는 제한시간을 둔 뒤 만남을 눈감아주는 건 어떨지도 고려 중이었다.
망측하긴 해도 어쩌겠는가?
오딜과 오데트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딸아이지만 데네브 역시 소중하다.
알비레오와 한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녀가 괴로워할 때 한편이 되어주지 않고서야 어찌 쌍둥이 언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가뜩이나 연인은 많고, 예소드 백작도 실험을 명목으로 주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정도 선까지라면 알비레오도 고집을 꺾고 양보할 의향이 있었다.
물론 사위의 의사도 물어봐야 할 테지만 말이다.
원래 계승을 앞둔 마녀는 하고 싶은 거 듬뿍 하면서 여생을 보내기 마련이다.
이따위 마음고생으로 괴로워하다 삶을 마감하는 건 두고 보기 힘들었다.
“포기… 할게….”
하지만 조금 더 관대한 해결책을 떠올리는 알비레오와 달리 데네브의 답변은 빨랐다.
목소리에 기운은 하나도 없되 확고한 다짐은 느껴졌다.
“쌍둥이에게는 사과할 거고…. 계승까지 고행으로 속죄할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아니야, 언니. 처음부터 이래야 했던 거야. 그동안 못난 모습 보여서 미안해.”
쌍둥이가 충격을 받았던 표정은 데네브에게도 많은 생각거리를 남겨 놓은 것이다.
사랑 하나에 허우적거리며 정신 못 차리는 제 모습이 얼마나 못났는지.
그 마음이 쌍둥이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 수 있는지 깨달았다.
더는 사랑이라는 변명 하나로 오딜과 오데트를 배신할 수는 없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이제 가봐도 될까?”
“피곤해 보이니까 내일 다시 얘기하자. 쌍둥이는 루시 예소드 백작이 보호 중이래.”
“응, 언니. 내일 중으로 찾아갈게.”
“같이 가게 말해줘.”
뒤돌아 나서는 데네브를 보고 알비레오는 굳이 말을 보태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됐니….”
애잔한 짝사랑을 지켜보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배웅할 뿐이다.
알비레오가 자리로 돌아가 앉기도 전에 바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큰 주인님!”
헐레벌떡 뛰쳐 들어온 이는 쌍둥이의 전속 시녀 중 하나인 베라.
이 시각까지도 잠옷 바람이 아닌 걸 보면 당직이었던 모양이다.
“무슨 일이죠?”
아직 사용인으로서 가다듬어지지 않아 서툴지만 그럼에도 예법을 지키려 노력하던 베라는 무릎을 꿇은 채 엉엉 울며 말했다.
“갈리나 시녀장님이 쓰러지셨어요! 어떡해요…. 어떡해요….”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침착하게 설명해봐요!”
“주, 주방 부엌에서 쓰러져 계신 걸 발견했어요. 얼마 전부터 열이 있으시다는 말은 들었는데…. 흑, 흐흐흑….”
왜 언제나 좋지 않은 소식은 연달아 오는 걸까?
알비레오는 즉각 베라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