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9
1.
조수님께 마냥 선물만 조르는 건 어른스럽지 못하다.
‘선물을 받고 그저 기뻐한다’라는 단순한 시퀀스.
연애 개초보인 르뤼에조차 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오딜과 오데트는 한걸음 앞서 생각했다.
“이럴 때일수록 차별점을 둬야 해, 오데트.”
“나도 알아 언니. 스승님이 비슷한 조건의 경쟁사를 상대로 할 땐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잖아.”
“다들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데 그칠 때.”
“우리가 기특하게도 맞 선물을 준비해 간다면?”
오딜과 오데트는 이것이 완벽한 큰 그림이라고 자부하며 따로 만년필을 챙겨 정성껏 상자에 포장했다.
마침 좋은 핑계도 있다.
얼마전부터 마녀 학계에 유의미한 업적을 새기고 있는 시우다.
때마침 만년필은 학자에 대한 존중을 표하는 상징적이고도 대표적인 선물이니 분명 딱 걸맞았다.
그리 길지 않지만 풋풋한 손 편지도 함께 넣어두었다.
하지만 마냥 꿈과 희망으로 부풀던 오딜과 오데트의 마음은 데네브와 시우의 키스 앞에서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
“…….”
우산을 들 정신도 없이,
마법을 펼쳐 빗물을 막아낼 마음의 여유도 없이 등을 돌려 뛰쳐나간 쌍둥이.
둘이 다시 방에 도착했을 땐 넋 나간 표정으로 쫄딱 젖은 꼴이 되고 말았다.
벽난로 옆에 세워두었던 의자에 털썩 앉은 오딜과 오데트.
“키스…하고 있었어.”
“작은 스승님이랑 조수님이랑….”
아무렇게나 널은 빨래처럼 늘어진 쌍둥이 사이로 허망한 넋두리가 흘러나왔다.
잘못 본 것도, 착각한 것도 아니었다.
친애하는 사람과 인사 대신 나누는 키스와 사랑하는 연인 간의 키스 정도는 분간할 수 있는 쌍둥이다.
분명 스승님이 손을 뻗어 조수님의 목을 뱀처럼 끌어안았고 두툼한 입술을 겹쳐 혀를 섞었다.
그건 분명히 정욕이자 애욕의 키스다.
쌍둥이는 서로의 팔을 꼬집었다.
핏기가 하얗게 가실 정도로 살을 비틀자 찌릿하게 느껴지는 고통.
“아파.”
“나도 아파 언니.”
“그렇다면 꿈이 아니라는 거네.”
“그렇지.”
가슴이 놀랍도록 차분했다.
너무 차분해서 갑갑하게 굳어버린 느낌이었다.
돌덩이를 던지는 정도로는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말이다.
“오데트, 작은 스승님이랑, 조수님이랑 언제부터 그런….”
“아닐 거야 언니.”
“응?”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야. 차분하게 설명 들으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거 있잖아. 발을 헛디뎠다던가. 아니면, 아 맞다! 묘약? 작은 스승님이 수상한 묘약을 잘못 드신 게 아닐까?”
거의 다 사용한 오래된 치약을 짜내듯, 위태로운 활기참을 보이는 오데트.
하지만 그녀의 어조가 발랄한 건 그만큼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
그건 오딜의 침묵이 증명해 주었다.
억지웃음을 짓던 오데트의 입꼬리가 무겁게 짓눌린다.
“친구도 많이 생기니까 기뻤는데….”
“왜 하필….”
조수님의 사랑을 독점하고픈 욕심이 없던 건 아니다.
특히 처음으로 샤론 언니를 만났을 무렵까지만 해도 쌍둥이는 날이 선 적의를 내비쳤다.
사랑하는 조수님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샤론 언니와 점점 친해지며 쌍둥이의 마음도 조금은 바뀌게 되었다.
사랑은 무릇 끝없는 시험에 드는 행복한 전쟁과도 같은 것.
그 험난한 길을 함께 걷는 선의의 경쟁자는 누구보다 좋은 친구였으며 동지였고, 이해자였다.
조수님이 위험에 처했을 때마다 ‘만약 우리만 조수님의 연인이었다면 버틸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결국 제각기 처지는 달라도 ‘사랑하는 사람=신시우’라는 공통점으로 가까워질 수 있던 것이다.
따라서 조수님이 연인을 마구잡이로 늘려오는 게 종종 못마땅했던 적은 있어도 이해했다.
그만큼 사랑하니까.
노예 시절의 조수님도 아무런 타산 없이 쌍둥이를 위해 목숨을 던졌으니까.
다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작은 스승님은 경우가 다르다.
“…믿을 수 없어, 조수님이…. 왜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작은 스승님을….”
간신히 분위기의 균형을 맞추던 오데트가 무너졌다.
오딜과 오데트는 허망한 표정으로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배신감과 충격에서 기인한 눈물이었다.
스승과 견습마녀의 관계란 부모자식과도 같은 것.
조수님에게 데네브는 장모이며, 데네브에게 조수님은 사위였을 것이다.
왜 조수님은 말해주지 않은 걸까?
왜 작은 스승님은 그런 행동을 하고 말아버린 걸까?
그리고 두 사람은 언제부터 그런 관계였을까?
어떠한 질문도 명확지 않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빼앗기는 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비극이라는 것 말이다.
2.
알비레오는 근 1년 들어 가장 기분이 좋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요즘따라 술술 잘 풀리기만 하는 일.
헥센나흐트로 인해 현세에 다소간 혼란이 있다곤 하지만, 계승을 대비한 사업처 교통정리 및 인수인계는 순조롭게 진행 중.
현란한 여성편력과 사고를 끌고 다니던 사위는 자리를 잡고 논문으로 승승장구 중.
마녀생 말년에 금단의 짝사랑에 빠진 여동생은 마침내 신시우를 통한 ‘변칙 계승’을 포기한 것인지 최근 들어 알비레오의 골치를 썩이지 않고 있다.
신시우가 공적 둘을 새 연인이랍시고 데려왔을 때는 억장이 와르르 무너져내렸지만….
“그건 덮어두자….”
차라리 조금 포기하니 마음이 편하다 싶다.
무려 남자 마녀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재능을 겸비한 마녀 역사 최초의 마녀.
애초에 그의 주위로 마녀가 꼬이는 건 어쩌면 천명이라 칭할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직 어린 쌍둥이도 기 싸움에 밀리지 않게 씩씩하게 굴고 있고, 또 나름 주변 연적들과의 관계도 돈독한 것 같으니 알비레오가 오지랖을 부려봐야 두통만 들겠다 싶던 것이다.
그렇게 콧노래를 불러가며 집무실에 앉아있던 알비레오는 별안간 루시 예소드 백작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네? 가출이요? 우리 쌍둥이가요?”
[네, 알비레오. 제가 발견해서 보호하고 있어요. 쌍둥이가 엄마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성화이긴 한데…. 아무래도 알려 드리는 게 맞을 것 같다 싶어서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다친 곳이나 사고 친 일은 없어요]
“그게 아니라 왜 가출했는지, 말이라도 하던가요?”
[그건 저도 잘….]
“지금 데리러 갈게요.”
[아니에요, 지금 억지로 오시기보다는…. 제가 잘 타일러서 돌아가도록 말을 꺼내볼게요. 한창 섬세할 나이잖아요]
“…알겠어요, 루시. 번거로울 텐데 고마워요.”
수정구 통신 종료 후.
알비레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쌍둥이가 말괄량이라도 사고를 칠 때는 개연성이 존재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가출이라니.
당장 오늘 오전에 샤론 양에게 수업을 잘 듣지 않았던가?
“이상한데….”
넘치는 에너지와 변화무쌍한 행동력으로 알비레오의 혼을 쏙 빼놓곤 하던 쌍둥이다.
하지만 반항이라 봐야 간혹 타로 타운의 별장에 몰래 다녀오던 게 고작이던 오딜과 오데트가 이렇게 갑자기?
“데네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데네브의 방으로 향하는 알비레오.
한동안 굳게 잠겨있던 여동생의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본 알비레오는 골수를 찌르르 타고 흐르는 오한을 느꼈다.
아직 뭔가 정해진 건 아니다.
확실한 근거를 댈 순 없었다.
그러나 알비레오의 예리한 감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감지했다.
쌍둥이의 가출에 데네브와 신시우, 그러니까 입에 담기도 망측한 관계가 관련 있으리라는 강렬한 추측이 머리를 강타했다.
신시우나 데네브 둘 중 한 사람을 찾기 위해 바쁜 걸음을 옮기던 알비레오는 머지않아 정원에서 터덜터덜 걸어들어오는 데네브와 마주쳤다.
“…….”
데네브의 상태나 걸음걸이가 심상찮다.
차디찬 빗물에 흠뻑 젖은 몸이나 비틀거리는 걸음새만 보아도 답이 나온다.
막연하게 맴돌던 불안감이 구체화된다.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언니가 불쌍해!’ 따위의 말을 하더니 뭔가 사고를 쳐도 단단히 쳤구나.
“데네브! 무슨 일이야!”
알비레오는 이를 꽉 깨물며 성큼성큼 여동생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오만가지 잡념과 의혹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여동생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언니…. 언니이이…. 내가, 내가….”
그저 청승이나 떨고 있겠거니 하던 데네브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하얗게 핏기가 가신 뺨 위로는 빗물과 뒤섞인 눈물이 방울방울 흐른다.
“너 괜찮아…?”
여동생과는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했지만 이 정도로 망가진 데네브를 보는 건 진정 처음이다.
알비레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마법으로 물기를 날렸다.
“진정해, 데네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줘.”
여동생의 어깨를 감싸 안자 그녀는 무너지듯 알비레오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세차게 어깨를 떨었다.
몇 번이나 언니의 소매를 꾹꾹 잡아당기며 휘청이려는 중심을 다잡은 데네브가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토로했다.
“들키고 말았어….”
“뭘?”
“오딜과 오데트에게…. 키스하는 모습….”
알비레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으로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수위 상으로는 대수로울 것도 없다.
데네브는 신시우를 닦달하여 ‘뒤’로 첫 경험을 했다.
어항에 갇혀간 뒤로는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관계를 맺었다.
심지어 나온 뒤에도 연심을 이기지 못해 데네브와 루시가 몸을 바꿔치기한 상태로 관계를 즐겼다.
고작 키스라 해봐야 그 임펙트가 대단할 것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쌍둥이에게 걸렸다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그토록 데네브를 뜯어말리고 신시우에게 신중을 종용했던 것인데….
알비레오는 기나긴 한숨을 내뱉고 데네브에게 물었다.
“신시우는 어딨어?”
결국 이 문제의 원인인 신시우를 빼놓고서야 대화가 진행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