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8
1.
종합 학문이나 다름없는 마법.
마녀에게 중요한 건 사고력과 연산 능력뿐이 아니다.
마녀의 핏줄을 타고난 이는 어지간한 예술가보다 뛰어난 미적 안목과 감각을 타고나며, 소양을 갉고 닦아 녹슬지 않도록 정련한다.
데네브 역시 그러했다.
미추의 구분은 예술가적 소양의 기본 중 기본이다.
시우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가 굉장히 수려한 외모를 지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리따운 외모가 사랑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인 건 아닐 것이다.
데네브가 처음부터 그에게 연심을 품었던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심미적으로 감탄했으나 삶의 모든 순간이 그러했듯, 데네브는 신시우라는 ‘남자’에게 어떠한 연정도 느끼지 않았다.
오직 마법과 가문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갈고 닦아왔던 일생이었다.
남녀의 사랑 따윈 테이블 위에 뒹구는 사무용품보다도 가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데네브는 그를 마음에 담게 되었을까.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금단의 사랑은 언제 어디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일까?
그와 처음 뒤로 검증하게 되었을 때?
그러다가 결국 쾌락을 느껴 못난 꼴을 보였을 때?
그때의 기쁨을 잊지 않고 혼자 손장난을 했을 때?
야심한 밤 추가 검증을 핑계로 시우에게 넌지시 말을 흘렸을 때?
그게 아니라면 언제일까.
함께 어항에 잡혀갔을 때?
욕망을 못 이겨 쌍둥이를 건드린 놈팡이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데네브를 지켜주려고 할 때?
마력 충전을 하기 위해 꿀벌 섹스를 할 때?
결국 그의 허리를 다리로 끌어안으며 ‘선’을 넘어버렸을 때?
알 수 없다.
수도 없이 되뇌어 봤지만 데네브에게 첫사랑이란 마치 이 빗줄기와도 같았다.
얼마 맞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온몸을 흠뻑 적시고 마는,
시나브로 말려들어 다시는 빠져나갈 수 없게 된 달콤한 덫.
다른 점이 있다면 빗물과 달리 마음을 말끔하게 털어낼 수 있는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이거라도 덮으세요.”
“괜찮아요, 그렇게 춥지도 않고요.”
“왜 이렇게 비를 다 맞고 계세요.”
“그냥,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거든요.”
데네브는 손가락을 튕겨 물기를 날렸다.
정원을 감상하거나 날이 포근한 날에는 테이블을 놓고 티파티를 즐길 수 있도록 준비된 가제보에 나란히 선 시우와 데네브.
시우는 겉옷을 벗어 데네브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시우가 데네브보다 머리 하나는 컸기에 데네브는 옷 안에 폭 파묻힌 꼴이 되었다.
“…고마워요. 아, 담배는 계속 피워도 괜찮아요.”
“아닙니다. 방금 다 피웠어요.”
데네브는 아닌 척 너른 옷감 사이로 코를 슬쩍 파묻었다.
옅은 담배 냄새와 체취가 차가운 겨울비 내음에 섞여든다.
“…….”
“…….”
어째서인지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데네브와 시우는 사시사철 지지 않는 장미꽃 덩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주 짧은 침묵이지만 데네브는 귓가에 울리는 제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날 이후 그와 처음으로 단둘이 있게 되었다.
몇 번이고 반복된 망상과 그보다 비정하고 단단한 현실의 벽.
그 경계가 선연하게 체감된다.
현실의 그는 자상하게 옷을 덮어주긴 했지만 비에 젖은 데네브를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지도 않았고, 벽난로를 쐬자며 은밀한 곳으로 이끌지도 않았다.
데네브는 무겁게 다 물려 있던 입을 열었다.
“논문 얘기는 들었어요. 대단하네요.”
“별거 아닙니다. 아직 데네브 님에 비하면 한참 멀었죠.”
“그래도 축하해요. 이제 쌍둥….”
데네브는 황급히 말을 끊었다.
본래라면 ‘쌍둥이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짝이 되겠네요’라는 말이 이어졌겠지.
하지만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시우와 데네브 사이에 놓인 벽이,
망상과 현실 사이의 놓인 벽보다 훨씬 높고도 공고한 벽이 실체화되는 게 두려웠다.
“시우 군도 이제 어엿한 마녀네요.”
“아닙니다. 너무 늦었죠. 그동안 어째 속만 썩이다가 드디어 사람 구실을 한 기분이에요. 아니, 이럴 때는 마녀 구실이라고 해야 할까요?”
실 없는 농담에 데네브는 그럴 기분이 아님에도 웃었다.
아마 시우도 분위기가 지나치게 추적추적하기에 억지로 꺼낸 말일 것이다.
“그나저나….”
목청을 가다듬으며 한차례 머뭇거리는 시우.
데네브는 차마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도 없이 어깨를 굳혔다.
“정말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데네브의 예상과 달리 그는 조금 더 뜸을 들였다.
확실히 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데네브가 마음을 바꾼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 걸까.
하긴 이 불장난은 데네브에게만 뜨거운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단서를 남기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가 그저 신기루 같은 착각이 아닌 확신으로 굳어질 때까지.
“주제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무슨 일이 있다면 말씀 주세요. 어쩌면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 그렇지 않아요….. 주제넘다뇨. 걱정해 주어서 고마워요.”
이어진 그의 뒷말에 데네브의 심장이 아주 조금 더 빨리 뛴다.
데네브의 최근 ‘고민’이 무엇일지 그가 모를 리 없다.
그는 뜸을 들인 게 아니라 자연스레 화제를 이어받으려 함이 분명했다.
그 뒤에 이어진 말도 예상대로였다.
“아, 맞다. 데네브 님이 부탁하셨던 샘플….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몰라서 일단은 보관해두고 있었습니다.”
“그런가요?”
데네브의 마음이 낙천적인 주홍색으로 불타듯 물들었다.
결국 깊은 낭떠러지 사이로 떨어져 버릴 석양처럼.
파국에 치달을 것을 알면서도 환하게 타오르는 주홍색이었다.
“지금 드리면 될까요? 계속 보관하기도 영 뭐랄까, 그래서요.”
“…….”
“어디에…. 두었나요?”
“일단은 제 방에 두었습니다.”
데네브의 심장은 이제 쿵쾅거림는 수준이 아니었다.
펄떡펄떡 심박이 뛸 때마다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와버릴 것 같다.
마법으로 통제하지 않았다면 그의 귓가에 고스란히 전해졌을 것이다.
“시우 군, 방에 다른 사람이 있나요?”
“…네? 아하. 아무도 없습니다. 걱정 마세요. 포장도 잘 해두었습니다.”
대화의 맥락을 파악해 볼 때 ’제 방에 두었습니다’는 곧 데네브를 방으로 들이고 싶다는 말.
방에 아무도 없다는 질문에 흔쾌히 ‘아무도 없습니다’ 라고 답한 건 방해할 사람 없이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말.
역시 데네브의 생각이 맞았다.
그는 데네브가 먼저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그에게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테니까.
그저 그간의 무거웠던 마음이 한순간에 깃털보다 가벼워지는 진귀한 경험은 사랑이 아니고서야 느낄 수 없던 감정이었다.
“가시죠.”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차려입고 올 걸 그랬나?
정말 이대로 그의 뒤를 따라가도 괜찮은 걸까?
엄청 마셔서 술 냄새도 날 텐데 맨정신이 아니라 술김에 충동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쌍둥이에게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하는 건 아닐까?
찰나에 삐뚤빼뚤 어긋나는 양가감정.
머리는 NO를 외치는데 가슴은 YES라고 환희한다.
“…시우.”
“네?”
우산을 펼쳐 드는 시우를 보고 데네브가 떠올린 건 지금껏 배제하고 있던 미약한 가능성이었다.
“솔직하게 듣고 싶어요. 이제 더는 어떠한 거짓도 없이요.”
정말정말 입 밖으로는 내뱉고 싶지 않았던 질문을 입에 올린다.
그것은 데네브의 망설임을 끊어줄 마지막 한마디에 대한 갈구였다.
“다 알고 있던 거죠?”
빠르게 말을 잇는다.
“그 자위기구가 도로시의 마법으로 저와 연동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매일 사용한 거죠? 왜냐하면 절….”
푹 숙였던 고개를 든 데네브는 발밑이 꺼지는 듯한 아찔한 추락감을 경험했다.
우산을 든 시우가 급발진한 덤프트럭에 치이기 직전에 보일법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우는 아직 그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데네브는 아직 말을 전부 꺼내지조차 않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을 본 순간.
데네브는 모든 게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이럴 때만 비상하게 발휘되는 여자의 감이었다.
“아.”
헝클어져있던 사고가 차곡차곡 되감기기 시작한다.
이젠 알겠다.
여태 데네브가 그토록 여지를 흘렸음에도 눈치채지 못했던 신시우.
그의 둔함은 성향이나 기질 따위가 아니라 데네브를 향한 신뢰에서 비롯했던 것이었음을.
그는 무나홀을 통해 데네브에게 모종의 사인을 보내던 게 아니었다.
그는 무나홀의 정체를 깨닫고도 모른 척한 게 아니었다.
그저 정말로 몰랐을 뿐이다.
데네브는 그것도 모르고 혼자 망상의 나래를 펼치며,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확증편향을 굳혀왔을 따름이었다.
“…….”
시우는 여전히 우산을 펼쳐 들던 자세 그대로였다.
커다란 돌맹이 같은 충격전개가 사고의 톱니바퀴에 끼어든 것처럼 말이다.
“하하….”
데네브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차라리 잘됐다.
농담이라고 얼버무리면 된다.
데네브의 웃음을 듣고 딱딱하게 굳었던 시우의 표정도 조금은 밝아졌다.
이제껏 ‘에이 설마 작은 장모님이 그러실 리가’라고 생각하던 그는 데네브의 충격발언을 도가 지나친 농담 정도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면 아무 일도 없던 것으로 할 수 있다.
차라리 잘 됐다.
이로써 금단의 사랑은 짝사랑이란 불발탄으로 끝났고, 쌍둥이 앞에서 조금이라도 더 떳떳한 스승님이 될 수 있으니까.
데네브는 분명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시우 군, 항상 생각해요.”
하지만 일말의 희망이 물거품처럼 꺼져버리고.
모든 일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데네브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아아…. 옳지 않은 감정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멈춰 세울 수 있는 비상레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시우의 눈이 점점 커진다.
데네브는 어느 순간 시우의 허리를 뜨겁게 끌어안은 채 입술을 포개고 있었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혓바닥이 반쯤 강제로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서글픈 키스를 끝낸 데네브는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오딜…. 오데트….”
조금 전까지 시우에게 뜨거운 키스를 하던 그녀의 두 뺨이 딱딱하게 굳어간다.
그 모습은 패륜을 자식에게 목격당한 어머니의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가 섞이지 않았다 해도 스승과 견습마녀는 어머니와 딸 관계이니.
“작은 스승님…. 너무 실망이에요….”
오데트의 눈물이 빗방울에 섞여 들어간다.
붙잡을 수도 없이 매몰차게 등을 돌리고 사라진 쌍둥이와 빗속에 남겨진 데네브.
발밑에는 만년필이 담긴 선물상자가 비에 젖은 바닥을 나뒹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