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854화 (854/917)

#854

1.

언제나 고마운 연인들에게 주는 선물.

이 선물을 정하는 데 있어 두 가지 대원칙을 세웠다.

원칙 하나.

금액에 구애받지 말 것.

물론 돈을 아껴서 선물하겠다는 건 아니다.

솔직히 시우는 용돈 타 쓸 정도만 남겨 놓고 남은 돈 전부를 선물에 사용할 용의가 있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원칙을 세웠느냐.

이는 원칙 둘과 이어진다.

원칙 둘.

뜻깊은 선물을 할 것.

사실 이미 선물을 준 샤론 이외의 연인은 시우가 선물한 걸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다.

가령 제머나이 백작의 이름을 물려받을 쌍둥이는 전 재산이 얼마인지 계산하는 데만 며칠이 걸릴지 모르고, 당장 차곡차곡 모아온 용돈만 해도 자릿수가 다르다.

르뤼에는 왕국에 비축되었던 자산과 이번에 새로이 개발하게 된 석유 시추권을 통해 막대한 부가 쌓일 예정이다.

전 세계적인 무기 밀매 브로커 도로시 누님 역시 어마어마한 능력자고, 야쿠자의 콘실리에리인 린네 역시 못지않은 현금부자.

당장 수중에 지닌 현금이 없는 스승님이나 거액의 빚을 진 아멜리아도 마찬가지다.

전자의 경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명예와 사회적 지반이 있고, 후자는 지금도 어마 무시한 속도로 게헨나의 사치비를 흡수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성 어린 선별과 초이스가 중요했다.

“음? 짐에게 줄 선물?”

“네, 따라와 보시겠어요?”

소파에 엎드린 채 다리를 허우적허우적.

와그작 와그작 프레첼을 먹으며 군사잡지를 탐독하던 르뤼에는 선물이라는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나저나.

그래도 예전에는 여왕님이라는 컨셉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인지 제법 위엄 있는 예법을 갖췄는데.

요새는 시우가 편해진 건지 뭔가 건성이다.

“호오, 제법 눈치가 있도다. 하지만 시우, 명심하도록 하거라. 바다의 재보를 모두 지닌 짐을 감동을 주기에 어지간한 선물로는 부족할 것이니.”

“네네, 걱정 마세요.”

그렇게 말한 것치고는 군청색 장발을 찰랑찰랑 흔들며 바쁜 발걸음으로 뛰쳐나오는 르뤼에.

“물론, 짐이 그렇게 눈치 없지는 않느니라. 설령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성심껏 알찬 리액션을 해주도록 하겠도다.”

르뤼에는 비교적 짧은 보폭에도 오도도도 시우를 앞서 가며 떠벌거렸다.

이건 르뤼에의 특징 중 하나인데 신 나면 말이 많아진다.

“에이, 틀림없이 좋아하실걸요?”

“하! 짐을 우습게 보는구나. 자신 있는 것이냐?”

“네, 자신 있습니다.”

오만한 웃음을 지으며 걷던 르뤼에가 움찔 멈춘다.

화분을 깨뜨린 고양이처럼 갑자기 눈치를 보는 르뤼에.

“호, 혹시 선물이라는 게 음란한 것이냐?”

“네? 아닙니다.”

“휴, 그대가 자신만만해질 때는 언제나 침대 위기에 혹시나 하였도다.”

“도착했습니다. 눈 감으세요.”

“알겠도다.”

시우는 르뤼에의 눈을 손바닥으로 폭 덮었다.

그리고 선물을 가져다 두었던 별채의 공방 쪽으로 인도한다.

본래 르뤼에가 쓰는 별채엔 공방이 두 개인 데 마침 그녀는 한쪽 공방을 비워두었던 것이다.

“짠.”

“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물건을 발견한 르뤼에의 입술이 동그랗게 모였다.

“오? 오오...?”

발끝으로 서더니 곧장 우다다다 테이블로 달려가는 르뤼에.

바다처럼 빛나는 눈동자로 테이블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선물을 살핀다.

“이, 이게 무어냐! 시우! 이게 무엇이란 말이더냐!!!”

“아아, 이것은 1/200 프라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시우가 준비한 선물은 르뤼에가 그렇게 가지고 싶어하는 항모전단 프라모델 세트였다.

다 완성하면 전 함대는 무리더라도 그럭저럭 구색 갖춘 전단 모양새는 나오리라.

그것도 실물대비 모형의 축적비 ‘스케일’이 200대 1에 해당하는 물건.

전함이 워낙 거대하다 보니 큰 쪽은 조립 이후 1.5M 크기라고 한다.

“이게, 이게 정녕 다 짐의 선물이란 말이더냐? 이거, 이걸 완성하면 정말 이 상자에 있는 것처럼 모양이 나온다는 것이냐?”

“그럼요.”

콧김을 쒹쒹 뿜으며 흥분한 르뤼에의 모습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잔뜩 신나하던 르뤼에는 허겁지겁 상자를 뜯었다.

그리고는 곧장 굳어버렸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은 조립 키트와 복잡해 보이는 설계도에 우뚝 굳은 것이다.

“…시, 시우.”

‘이걸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라는 눈빛으로 시우를 돌아보는 르뤼에.

“그럴 줄 알고 다 준비했습니다.”

사실 시우도 프라모델 쪽은 문외한이다.

자세히 알아보니까 상당히 복잡고 어려웠다.

뭔가 준비물도 많고, 품질과 완성도 모두 좋은 모델은 구하기조차 어려우며, 준비물도 많다.

조립을 위해 필요한 전용 니퍼, 접착제.

도색을 위한 에어컴프레셔, 도료, 시너, 도색 집게, 철필, 극세도, 핀 바이스, 건조대 등등.

이만한 프라모델을 조립하려면 선반을 가득 채워야 할만큼의 공구 및 도료가 필요했던 것이다.

천막으로 가려져 있던 공구 선반 쪽을 보여주자 다시 입이 함박만하게 커지는 르뤼에.

잘은 이해 못 해도 뭔가 대단한 게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세 어둑해지는 낯빛.

“시우, 마음은 정말 고맙도다. 그러나 짐은…. 현세의 장난감은 조금도 모른다.”

“그럴 줄 알고, 이것도 준비했습니다.”

시우는 르뤼에 앞에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프라모델 조립 초심자부터 중급, 고급과정까지 하나하나 인터넷을 뒤져가며 다운로드해 놓은 강의 영상이다.

아무래도 마녀인 만큼 서적 쪽이 익숙할 것 같아서 책으로도 잔뜩 시켜두었다.

모르긴 해도 지금의 시우도 저 구축함 정도는 당장 조립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적 감각과 섬세한 오감, 뛰어난 두뇌를 지닌 르뤼에라면 당연히 해낼 수 있겠지.

르뤼에는 시우가 준비한 선물을 쭉 보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시우, 그대는 매번 짐을 놀라게 하는도다. 감동을 하여서 가슴이 찡하다. 코끝도 뜨끔뜨끔하니라.”

실로 르뤼에다운 직설적인 표현.

잠시 고민하던 르뤼에는 결심이 굳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좋다, 결정했도다.”

그렇게 말한 르뤼에가 집어든 건 책상 어귀에서 뒹굴던 검은 잉크통이었다.

치마를 두르던 벨트를 푼 르뤼에가 잉크통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여왕의 옥체란 결코 더럽혀져서는 안 될 고귀한 것이니라. 허나, 신시우 그대에게만큼은 짐의 몸에 천박한 글귀를 새길 권리를 주겠도다. 자! 마음껏 낙서하거라!”

“...네?”

“…아차.”

갑작스러운 제안에 퍼득 아멜리아와의 노출산책 플레이가 스쳐 지나간 시우.

너무 흥분 및 감격한 나머지 미행 사실을 발설하고만 르뤼에.

“흠, 이건 안 되겠네요. 몰래 엿보다니 혼 좀 나셔야겠어요.”

입술을 모으고 땀을 뻘뻘 흘리던 르뤼에가 슬쩍 치마 벨트를 도로 매며 공범을 입에 담았다.

“오딜과 오데트도 함께 봤다! 미행도 걔네가 먼저 제안했도다!”

.

.

.

“왜! 그대가! 써놓고! 하응! 짐에게 그러느냐!”

“미안! 미안하다! 짐이 잘못했도다!”

르뤼에는 엉덩이에 조루보지 여왕님이라는 낙서가 적혀진 채 실컷 보지 팡팡을 당했다고 한다.

2.

나머지 인원의 선물 준비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바이올린 그리고 굴피나무 숲 오두막의 주방 리뉴얼이었다.

원래부터 바이올린을 좋아하던 아멜리아지만 스승님의 유품은 반쯤 장식용에 가깝다는 걸 알고 있다.

아무래도 악기란 건 쓰면 쓸수록 닳는 소모재이니 말이다.

따라서 마음 편히 연주하라는 마음에 큰 맘 먹고 좋은 놈으로 마련했다.

“자, 들어오세요.”

바이올린 케이스를 소중하게 어깨에 들춰 맨 아멜리아는 설레는 발걸음으로 오두막에 들어섰다.

주방 쪽으로 발을 들인 아멜리아가 입을 틀어막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어떤가요? 기억 속 그때처럼 만들어 봤어요.”

오두막의 관리가 잘되고 있긴 했지만 해피피그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것과는 조금 설비가 달랐다.

아마 100년 가까이 요리를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시우가 아멜리아를 위해 준비한 두 번째 선물은 오두막 주방 리모델링이었다.

오래되어 못 쓰게 된 오븐을 교체, 굴뚝도 완벽하게 청소 완료.

베이커리용 기구를 가득가득 채워놓은 것이다.

아멜리아는 아이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조리기구와 오븐을 살피더니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너무…. 고마워요 시우….”

“다행이에요, 걱정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이어진 전개라면….

“아멜리아 케이크…. 먹어볼래요?”

“시우 꺼…. 달콤해요.”

“우우, 시우는 변태에요…. 이거, 정말 먹어요…? …마, 마시써요….”

주방에서 알몸 앞치마 아멜리아와의 감미로운 생크림 애무.

초콜릿 시럽이 듬뿍 가미된 핥짝핥짝 펠라치오.

아멜리아가 울먹울먹한 얼굴로 평가해주는 아기 즙 토핑 딸기 시식.

등이 있겠다.

3.

비단 연인들에게만 선물을 준 건 아니다.

두 스승님과 도로시 누님은 당장 현세에 있는 관계로 선물을 전할 수 없었기에, 우선 주위 감사한 사람들에게도 소소한 선물을 돌렸다.

예소드 백작님께는 우아한 만년필을, 디아나에겐 최신형 위치보드를, 예빈에겐 수술 도구를, 앨리스 삼인방에겐 명품 구두를, 소피아에겐 드레스를 보냈다.

“타카쇼, 여기서 제일 비싼 술 내와.”

“뭐야 갑자기?”

“내가 팔아줄게.”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영혼의 친구 타카쇼는 매상을 올려주었다.

그 대가로 영업이 끝난 후 상담 요청을 받은 타카쇼는 싱숭생숭한 분위기로 다리를 꼬았다.

“그래서 무슨 상담인데?”

“연애 상담.”

담배를 입에 물고 팔짱을 낀 타카쇼의 미간 주름이 한층 짙어진다.

“야, 신시우. 내가 얼마 전부터 들기 시작한 생각인데…. 내 깜냥에 너한테 연애 조언해주는 게 맞냐?”

“무슨 소리야?”

“너 주위의 대마녀들이 좀 많아? 아마 역사상 가장 많은 마녀를 꼬신 남자일 텐데 그걸 내가 조언을 해줄 수나 있냐는 거지.”

“에이, 무슨 소리야. 경험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있는 건데.”

“…뭐, 알았다. 매상도 올려줬으니 들어나 보자.”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타카쇼지만 시우 주위에 타카쇼만큼이나 여심에 통달한 이는 없다.

“내가 오딜 님이랑 오데트 님에게 선물을 하고 싶은데….”

사실 상담이 필요한 만큼 어려운 부분은 이것이다.

일평생을 부족함 없이 살아왔을, 그리고 딱히 막 엄청 좋아하는 것도 없는 쌍둥이에게 무슨 선물이 가장 좋을까? 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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