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852화 (852/917)

#852

1.

게헨나에서 가장 큰 행사라고 할 수 있는 수확제를 앞두고 벌어진 감사 이벤트.

다들 작은 축제의 여운에 잠겨 흥성거리고 있을 때 리센느는 그러지 못했다.

중앙 시청의 거북이 같은 행정 속도와 달리 새벽부터 날아온 배상금지급통지서가 눈을 의심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리센느는 통지서에 적힌 숫자를 부릅뜨고 바라보았다.

몇 번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똑같은 액수가 적혀 있었다.

“오, 오, 오…. 오만 파운드….”

심지어 이 조차 꼬투리는 뗀 금액이다.

“아아….”

리센느는 태풍에 휘말린 초가집처럼 풀썩 주저앉았다.

이럴 순 없다.

“부, 분명 방청객 100명분의 절반이라고 했는데….”

콕 짚어 단가나 시세를 정할 순 없지만, 일반적으로 가정방문의 사례는 금화 200장을 넘지 않는다.

따라서 리센느는 대략 1만 파운드 내외로 배상금이 나올 것으로 생각했다.

“서, 설마…. 잘못 왔나?”

다른 사람도 아닌 사서장이 주관한 감사에 설마 그런 일이 있겠느냐만 서류상 실수가 아니고서야 이 금액은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생각조차 들었다.

“누가 장난친 게 분명해…!”

그러나 허둥지둥 통지서의 뒷장을 훑어본 리센느는 더더욱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가정방문에서 받았던 ‘선물’의 평균 금액은 일반적인 경우를 아득히 웃돌고 있었다.

통지서에는 평균액을 산정한 과정과 결과까지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으며 마지막 장엔 메티스 그레모리의 친필 서명까지 휘갈겨져 있었다.

이게 리센느를 괴롭히려는 음습한 장난이 아니라 빼도 박도 못하는 공식문서라는 거다.

“…….”

그 이후로는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았다.

통지서를 받자마자 전해달라는 드메르 남작의 당부에 통지서 사본을 보냈다.

답신은 길게 오지 않았다.

<지금 제 저택으로 와요, 리센느>

마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드메르 남작의 저택까지 하염없이 걷자니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게 내 잘못이야…?”

“왜 나만 이런 일에….”

“괜찮아, 남작님이 다 책임져 주신댔어.”

그러나 결코 속이 편하지 않다.

예상보다 훨씬 커다란 배상금을 과연 드메르 남작이 순순히 내 줄까?

금액도 금액이지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리센느가 중도에 질문을 포기했다는 것.

그리고 2회까지 가능한 이의제기마저 포기했다는 점 정도다.

그때 장내의 분위기는 도저히 리센느가 뭘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뭘 어떻게 한다고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하지만 전의를 상실하고 꼬리를 만 것도 사실이다.

만약 드메르 남작이 ‘남의 돈이라고 그렇게 쉽게 포기해요? 절반만 제가 부담하죠. 나머지 절반은 알아서 하세요’라고 한다면?

그렇게 되면 리센느의 이번 생은 끝장이다.

평생 빚만 갚다가 변변한 연구 하나 해내지 못한 채 백 년은 허송세월하며 선대에 누를 끼칠 게 분명하다.

그렇게 아르스 마그나 타운의 가도를 따라 걷던 중.

문득 제머나이 마도구 상점이 눈에 들어왔다.

겉보기로는 5층짜리 건물이지만 공간왜곡이 걸려 있기에 내부는 현세의 어지간한 대형 쇼핑몰보다도 광활하다.

한달 매출만해도 어지간한 마녀의 전재산을 능가할 것이다.

“차라리….”

드메르 남작과 알비레오 백작은 거짓말로도 사이가 좋다고 하기 어렵다.

살롱에서도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며 서로를 견제하는 관계니 말이다.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긴 전 알비레오 백작을 먼저 만나면 어떨까?

사실 이 모든 일이 드메르 남작의 사주였음을 밝히며 용서를 구하는 거다.

어마어마한 부자인 제머나이 백작에게 금화 만 단위쯤이야 푼돈일 테고….

어쩌면 리센느를 통해 드메르 남작을 정치적으로 공격하거나, 조금 더 가자면 첩자로 채용해 줄지도 모른다.

어차피 최악인 상황.

발버둥이라도 쳐야 하지 않겠는가?

잠시 발을 멈췄던 리센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

비록 이번엔 억지에 휘말리긴 했지만 그래도 드메르 남작님은 좋은 마녀다.

‘목걸이가 정말 예쁜 걸요?’

‘드, 드메르 남작님.’

‘후후, 그렇게 긴장할 것 없어요. 못 보던 얼굴인데 오늘이 처음인가요?’

‘네…. 아! 저는 리센느 에르밧이라고 해요.’

‘리센느 양, 사교계에 나오기 전에 데뷔부터 제대로 진행해야죠. 이것저것 서툴 때이니 제가 도와줄게요.’

‘네…!’

‘그리고 리센느 양, 술잔을 그렇게 야구 배트처럼 꽉 잡으면 다들 흉봐요. 우아하고 경쾌한 손동작으로 슬며시 얹듯 쥐는 거에요. 아참, 그리고 모자에 타조 깃털을 꽂는 건 조금 유행이 지났답니다.’

리센느가 마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기.

붉은 지붕 살롱에서 어정쩡하게 있던 리센느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던가?

다소 부족했던 사교의 기술이라던가, 예법에 대해서도 꼼꼼히 알려주었다.

‘흐음, 그 정도는 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

또 사업실패로 술독에 허덕일 때도 기꺼이 리센느를 위해 빚을 갚아주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리센느는 진작 게헨나 밖에서 앵벌이를 하러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어린 마음에 그런 남작을 사모했던 적도 있다.

물론 서로의 차이를 깨닫고 단념한 지 오래였지만 말이다.

옛날 생각을 하니 뭔가 눈물이 글썽였다.

“내가 너무 배은망덕했어….”

그렇게 많은 도움을 받아 놓고 정작 연구부정감사에는 억지로 휘말린 듯이 싫어했다니.

심지어 배신을 생각하고 있었다니.

리센느는 제 얄팍함이 미워졌다.

어쩌면 이건 은혜를 모르는 리센느에게 내려진 벌일지도 모른다.

2.

드메르 남작의 어두컴컴한 집무실.

그녀는 어스름한 새벽녘을 술잔에 담으며 긴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착잡한 기색이 가득한 미모다.

“죄송해요. 제가 전부 망치고 말았어요.”

“…….”

리센느는 솔직하고 담백하게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준비했던 말도 꺼냈다.

“배상금의 절반은 저도 함께 책임지겠어요. 시간이 아무리 걸려도 천천히 갚아나가겠습니다.”

제 입으로 꺼냈지만, 말을 하는 순간 심장이 차게 식는 것 같은 발언이었다.

하지만 꼭 해야 할 말을 했다는 후련함도 있었다.

“리센느.”

드메르 남작이 일어났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부드러운 웃음기마저 서려 있었다.

-또각또각

가까이 다가오는 걸음에 리센느의 어깨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다.

뺨을 맞아도 기꺼이 내어줄 생각이다.

“아얏!”

곧 이마에 어마어마한 충격이…아니라 딱밤이 왔다.

겨우겨우 시선을 올리자 드메르 남작이 보였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못 말리겠다는 듯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뭘 그렇게 떨어요.”

그 웃음에 리센느를 탓하는 기색은 전혀 없다.

“드메르… 남작님….”

“저도 연구감사 얘기는 전해전해 들었어요. 완전히 제 오판이죠. 리센느가 미안할 게 뭐 있겠어요? 자료도 전부 제가 준비했는데.”

“…….”

“설마 남자 마녀가 진짜 천재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질투심에 눈이 멀어서 너무 급하게 진행했어요. 가정방문 사례도 차근차근 들어봤다면 단순한 도용이 아닐 거라는 것도 알 수 있었을 텐데. 바보 비용을 큰 값에 치르는 거죠 뭘.”

“…….”

“하아, 당분간 알비레오 백작이 뻣뻣하게 굴 걸 생각하니 그건 머리가 아프네요. 이런, 왜 계속 서 있어요? 편히 앉아요.”

드메르 남작은 과장스레 한숨을 내쉬며 리센느를 소파에 앉혔다.

“리센느도 고생 많았어요.”

리센느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자신은 조금 전까지 드메르 남작을 배신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드메르 남작의 태도엔 안절부절못하는 리센느를 진정시키려는 노력이 느껴졌다.

“하, 하지만…. 배상금도 5만 파운드나 되고….”

“알아요, 확인했으니까. 속도 쓰리고요. 하지만 말했잖아요. 제가 책임진다고. 조만간 요트 한 대 장만하려고 했는데…. 그걸 포기하죠 뭐.”

리센느는 결국 펑펑 울며 드메르 남작의 품에 안겼다.

“어차피 몇 달 시끄럽다가 말 테지만, 리센느의 명예 회복에 관해서도 힘써 볼게요. 알비레오 백작에게도 따로 찾아가 사과해 두었고요.”

“괘, 괜찮으시겠어요…? 훌쩍….”

“본의는 아니었다만 그 쪽도 제 덕을 본 셈이니. 크게 문제 삼지는 않을 거에요. 아쉬운 소리는 조금 해야했지만요.”

드메르 남작은 싫은 기색 없이 리센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기고만장하는 알비레오 백작의 비위를 맞춰주느라 애지중지하던 팔찌를 넘겨야 했던 건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외톨이끼리 술이라도 마시면서 감사 내용이나 들어 볼까요? 사실 저도 궁금한 게 많거든요. 수업료를 400억이나 냈는데 그 정도는 괜찮겠죠.”

“네, 남작님.”

드메르 남작은 리센느의 술잔에도 골골 브랜디를 따라주었다.

호박빛 예쁜 술이 담긴 술잔을 쥔 리센느를 보며 지나가듯 말하는 드메르 남작.

“리센느, 이제는 술잔도 제대로 잡네요.”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던 리센느는 처음으로 웃었다.

드메르 남작의 주위에 사람이 몰리는 건 비단 남작이라는 배경 때문만이 아니었다.

감정에 휩쓸려 잘못된 판단을 할지언정 아랫사람을 도마뱀 꼬리처럼 잘라내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공적이나 추방자와는 다른.

게헨나 귀족이 지닌 긍지의 밑거름이자 지켜야 할 의무였다.

3.

감사로부터 나흘이 흘렀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시우는 리센느로부터 사과를 받아 주었고, 모처럼 목돈도 쥐게 되었다.

르뤼에 대신 갚아야 할 기부금도 큰 장모님께 전부 드렸으며, 아직 뭘 줘야 할지 고민 중인 오딜과 오데트를 빼곤 연인들을 위해 두둑한 선물도 건네 주었다.

시우의 치유를 도울 영혼의 마녀 ‘그레텔 네프시스’의 입국 절차는 차근차근 진행되어 입국을 앞두고 있었다.

조만간 스승님의 부탁으로 수아 지부장 역시 시우를 돕기 위해 게헨나로 들어올 예정이다.

꽃길만 걸어가는 나날이 계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순간.

늘 그렇듯 최악의 위기란 꿈같은 나날을 깨뜨리기 위해 찾아오기 마련이다.

“조수님….”

옆에 쌍둥이가 있었다.

두 사람의 손에 들려있던 작은 선물 상자가 차가운 빗속에서 형편없이 바닥을 뒹군다.

아마도 조금 전에 보게 된 충격적인 장면 때문일 것이다.

존경해 마지않는 스승님이 사랑하는 연인에게 뜨거운 키스를 하는 장면을 보아버렸으니.

“오딜…. 오데트….”

조금 전까지 시우에게 뜨거운 키스를 해오던 데네브의 두 뺨이 딱딱하게 굳어간다.

그 모습은 패륜을 자식에게 목격당한 어머니의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가 섞이지 않았다 해도 스승과 견습마녀는 어머니와 딸 관계이니.

“조수님, 진짜, 나빴다….”

“작은 스승님…. 너무 실망이에요….”

무표정하던 오딜과 오데트의 눈물이 빗방울에 섞여 들어간다.

붙잡을 수도 없이 매몰차게 등을 돌리고 사라진 쌍둥이와 빗속에 남겨진 시우와 데네브.

사랑방 시우와 작은 장모님.

끔찍한 오해와 비정한 착각으로 점철된 이야기가.

이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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