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1
1.
선임 사서와 고등 사서로 구성된 감사위원회와 충분한 논의를 마친 그레모리 사서장.
충분한 논의랄 것도 없었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결과인 만큼 3분 정도 대화를 나누며 사안을 정리했을 뿐이니까.
“제1444회, 연구부정감사. 저자 신시우 ‘상이한 자성마법 간 결합: 위상 일치를 활용한 반발통제모형에 대한 논의’의 도용 의혹에 대한 최종 의견을 밝히겠습니다.”
비서고는 엄밀히 말하면 사법기관이 아니었기에 판결이 아닌 ‘의견을 밝힌다’라는 식의 표현을 사용했다.
하지만 양 학회에 끼치는 영향력을 고려할 때 사실상 선고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사법 권한이 없긴 한데 불복하려면 해 봐’라는 느낌이다.
“먼저 제1444회 감사는 도용 의혹에 관한 충분한 채증이 이뤄지지 않은 고발이었으며, 저자와 고발자는 의견조율을 거쳐 상호 합의하에 심층 논증 형식을 소명 방식으로 채택하였음을 재차 명시합니다.
본 감사위원회는 저자 신시우는 논문에 대한 연구가 본인의 능력임을 입증하였다고 판단합니다.
따라서 도용 의혹에 대해서는 혐의없음으로 판단합니다.
고발자는 이에 대해 2회까지 추가 감사를 요청할 수 있음을 고지합니다. 리센느 에르밧, 추가 감사를 요청하겠습니까?”
이제껏 어깨를 볼품없이 늘어뜨린 채 배경쯤으로 취급받던 리센느에게 다른 마녀의 시선이 쏠린다.
제머나이의 심기를 있는 대로 건드린, 명확한 채증도 없이 도용 의혹부터 제기한 마녀의 말로가 흥미진진하다는 눈빛들이다.
리센느는 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승복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의견조율 당시 고발자는 저자 측이 도용 의혹에 관해 완벽히 소명할 경우 감사 탓에 감소할 잠재 수익 배상을 약조했습니다.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내일 오전 중 자택으로 통지서가 발급될 것입니다. 3개월 이내에 배상금을 지급해 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이상으로 부정연구감사를 종결합니다.”
장황했던 논증과는 달리 연구감사는 짧은 박수와 함께 싱겁게 끝났다.
후련한 기분을 느끼며 재킷을 챙겨 드는 시우.
“잠깐 제 연구실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그런 시우에게 메티스 사서장이 다가왔다.
“물론입니다.”
방청객 쪽에서 서성거리던 마녀들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아마 그녀가 먼저 오지 않았더라면 무수한 악수 세례를 받지 않았을까?
“편히 앉아요.”
“감사합니다.”
그녀의 연구실에 도착한 시우는 곧 홍차와 간단한 쿠키를 대접받았다.
메티스 사서장은 찻잔을 들어 올리기 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손을 올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일전의 무례와 섣부른 판단에 대해 사과하고 싶어요.”
“마음에 담아두지 않습니다. 해야 하는 일을 하셨는 걸요.”
“아닙니다. 일전 신시우 씨를 대함에서 편협한 고정관념에 조금도 사로잡히지 않았다고는 단언할 수 없어요. 이만한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신비로운 마도의 길 앞에서는 어린아이나 다름없다는 걸 다시 한번 배우고 가네요.”
메티스는 정중히 사과했지만 애초에 억하심정이 남아있는 건 아니었다.
처음에야 조금 화가 났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녀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오히려 이번 부정연구감사에서 메티스가 보여준 모습은 퍽 호감이 갔다.
은근히 남자를 아래로 보는 게헨나의 풍조 상 자칫 불공정한 감사가 될 수 있다고도 예상했는데, 그런 염려와 달리 메티스 사서장은 누구보다 공정히 감사를 이끌었으니 말이다.
조금 융통성 없는 사람일지는 몰라도 그만큼 공정한 마녀였던 것이다.
“괘념치 않다면 신시우 씨가 이번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을 비서고에 비치하는 걸 조건으로 열람 권한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하나만으로 괜찮을까요?”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아 혹시 전에 저와 함께 입구컷…이 아니라 열람 제한당한 마녀도 함께 괜찮을까요?”
“심해의 마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때 분기탱천한 르뤼에가 메티스에게 온갖 악담을 퍼부은 까닭에 기부금을 반환당했었지.
메티스는 어려운 고민이라는 듯 살짝 눈썹을 찌푸리더니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하긴 그때 르뤼에가 보였던 모습은 굉장히 오만방자했으니 아직은 앙금이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다.
“좋습니다. 단, 비서고 안에서는 언제나 정숙해야 함을 명심하도록 전언 부탁합니다.”
시우는 살짝 당황했다.
르뤼에가 메티스 사서장에게 깽판을 쳤기 때문에 입구컷 당했던 게 아니란 말인가?
“그때 기분 상하셨던 게 아니었군요?”
이에 대해 묻자 메티스 사서장은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제 기분은 열람 권한과도 기부금과도 관계없어요. 단, 서고 내 정숙은 당연히 지켜야 할 기본적인 사항입니다.”
“하하하….”
“왜 웃는 거죠?”
어쩐지 메티스 그레모리 백작이 어떤 마녀인지 조금 더 이해하게 된 기분이 들었다.
2.
앞으로도 좋은 활동으로 마녀 학계에 이바지해달라는, 실로 메티스다운 격려를 듣고 밖으로 나오게 된 시우.
기분이 썩 좋았다.
간만에 온몸을 흠뻑 적신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는 아직도 은은한 전율과 함께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학자로서의 명성, 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논문, 다른 이로부터의 인정.
과거 그토록 꿈꿔왔던 일이 아닌가?
심지어 마녀 사회에서 논문은 돈이 된다.
방청객이 100명이었고, 그 절반 분의 손실액을 리센느로부터 배상받게 되었으니….
“400억 원 정도인가?”
계산하고 입 밖으로 내뱉고도 머리가 멍해지는 금액이다.
게헨나에 오기 전 복권 한 번만 당첨되면 좋겠다고 그렇게나 빌어왔는데.
세후로 따지면 20번은 넘게 1등에 당첨되어야 할 금액이 단숨에 손에 들어온 것이다.
정말 현실감이 조금도 없었다.
직접 눈으로 봐야 절반쯤 믿길 것 같았다.
이걸로 큰 장모님께 빌린 돈을 갚고도 어마어마한 액수가 남는다.
매번 신세만 지다 모처럼 생긴 목돈이니 의미 있게 사용하고 싶었다.
우선 연인들의 선물을 준비하는 거다.
남은 돈은 적금해서 알뜰살뜰하게 써야지.
“음?”
“이봐요, 저쪽 저쪽!”
“저기 온다!”
그런 시우를 비서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한눈에 봐도 50명은 훌쩍 넘길 것 같은 마녀들이었다.
다들 얼굴이 눈에 익다.
오늘 감사의 방청객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앞다투어, 그러나 모종의 방식으로 순서를 정한 듯 한 명씩 시우에게 다가왔다.
“이번 감사 정말 인상 깊었어요. 함께 연구를 진행할 기회가 있다면 좋겠네요.”
“저희 황금여명회에 신시우 씨를 초대할 수 있다면 정말 기쁘겠어요.”
“깊이 있는 식견에 탄복했어요. 위상에 대해서 떠올린 바가 있는데 교류할 수 있는 자리를 주선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 명함이에요. 연구에 필요한 부분이 생긴다면 불러주세요.”
“저희 에메랄드 타블렛은 새로운 연구원을 언제나 환영합니다.”
“저 기억 나시나요?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정교수였어요….”
“연구에 관해 도움이 필요하다면 불러주세요.”
몇몇은 악수를 권하고, 몇몇은 명함을 남겼다.
사실 이런 상황 자체는 마녀가 된 이후 질리도록 겪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전과는 모양이 많이 달랐다.
이제껏 접근해오던 마녀가 시우에게 품는 목적은 대부분 호기심뿐이었다.
남자 마녀라는 희귀 생물에 대한 연구욕과 소유욕 등에서 기인한 호기심 말이다.
더러는 곱상한 얼굴에 원나잇을 요구하는 정도였달까?
그러나 지금 그들의 악수에는 호의가, 명함을 건네는 손길에는 같은 길을 걷는 자에 대한 존중이 느껴진다.
“오늘 밤, 야심한 밤에 단둘이 만나뵐 수 있을까요?”
“나 진짜 잘하는데. 같이 야한 짓 하면서 놀래?”
물론 여전히 뜨거운 마녀 누님들도 많았지만 말이다.
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노골적인 추파를 걷어내면서도 거절당한 마녀들이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다는 것에 감개무량함을 느꼈다.
이제야 겨우 대등한 상대로 봐주는구나 싶어서 말이다.
아무튼 정리하자면, 이번 감사로 얻게 된 소득은 비단 400억원에 달하는 현금뿐만이 아니었다.
학자로서의 명성과 이로부터 기인한 ‘인간관계의 인프라’가 증정품으로 끼어있다.
증정품이라지만 무시할 게 못 된다.
만약 시우가 학회원이 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다면 어떤 학회이건 시우를 데려가기 위해 근사한 조건을 제시하겠지.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도움을 청한다면 기꺼이 나설 마녀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미 능력과 포텐셜을 증명했으니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는 것이다.
결국 모든 마녀의 명함을 받아든 시우의 주머니는 듀얼리스트처럼 두둑해지고 말았다.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3.
연구부정감사의 결과는 또 한 번의 파장을 일으켰다.
아무런 감사가 없었더라면 후일 ‘그래서 진짜 걔가 한 거 맞아?’라는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만큼 지나치게 뛰어난 성과였다.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니고 메티스 그레모리가 좌장으로서 이끈 감사 결과에 의문을 품는 이는 없었다.
비서고 인증 ‘도용, 표절, 조작 없는 SSS급 논문’이라는 마크가 붙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100여 명의 각기 다른 소속의 마녀가 방청객으로 참관해 박수갈채를 보냈으니 여러모로 논란의 여지가 사라졌다 말할 수 있겠다.
방청객들은 밤이 깊도록 떠들어대며 연구감사 후기를 이곳저곳에 퍼 날랐다.
가령 회원만 드나들 수 있는 레노먼트 타운의 프라이빗 살롱에서.
“고발자 얼굴, 가관이었지.”
“아주 하얗게 질리던데요?”
“남 잘되는 꼴 못 보는 사람은 꼭 그렇게 초를 치더라니까?”
“우습게 된 거죠. 제머나이 백작과 티페레트 공작이 흰 눈으로 보겠네요.”
“당분간 얼굴 들고 다니기도 힘들걸?”
가령 아르스 마그나 타운의 다양한 학회에서.
“이번 연구 주제를 정했어. 신시우한테 공동 연구를 제안해볼까 하는데…. 어렵겠지?”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쟁쟁한 인사들이 줄을 설 테니까요.”
“너는 어쩔 거야?”
“저도 마침 경매에서 큰 맘 먹고 산 알이 있거든요. 잘 부화해 봐야죠.”
“학장님께 보고해볼까?”
“이미 움직이고 계시다던데….”
가령 첫 번째 붉은 지붕 살롱에서.
“알비레오 백작님, 너무 대단하세요! 귀인은 귀인을 알아본다더니! 그런 출중한 남자였기에 사위로 들이셨던 거군요.”
“오호호, 이 정도로 뭘요. 그래서 그렇게나 훌륭했다고요?”
“그럼요! 강연에서도 그렇게 뜨거운 갈채가 쏟아지는 건 처음 봤어요! 저도 가슴이 흠뻑 웅장해져서 저도 모르게 기립했다니까요? 그래서 그런데 혹시…. 가정방문을 신청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대기자가 많긴 하지만…. 흠, 그 간의 정도 있으니 특별히 조금 앞당겨 드릴게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모두가 놀라고 경악하며 즐겁게 떠드는 와중.
“에효….”
죽을상이 된 리센느는 마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드메르 남작의 저택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