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9
1.
“잘했어요, 리센느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드메르 남작은 계획대로라는 미소와 함께 리센느를 반겨주었다.
“죄송해요, 멋대로 추가 조건에 응하고 말았어요.”
리센느는 드메르 남작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절차는 원하는 대로 끌어냈지만 그 과정에서 신시우 측 제안을 받아들였다.
방청객 수가 100명이나 되니 만약 이번 공방에서 패배한다면 상당한 금액을 물어줘야 한다.
물론 리센느에겐 그런 돈이 없고, 드메르 남작이 후일을 맡아주겠다 했으니 일이 잘못된다면 그녀의 지출이 되겠지.
“괜찮아요, 어차피 블러핑일 게 뻔한 걸요. 아니면 하도 오냐오냐만 받아서 그런지 기고만장 했던가.”
“그렇겠죠?”
“그럼요.”
물론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드메르 남작에겐 배상금이 얼마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보기에 신시우가 의견 조율에서 보인 반응은 둘 중 하나였다.
리센느가 금액에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서길 바랐던 블러핑이거나.
어린 마녀답게 남이 만들어 준 명예에 취해 대책 없는 객기를 부렸거나.
어느 쪽이건 깊게 생각할 건 없다.
만에 하나 신시우가 이긴다고 해도 가정방문 비용 정도야 대수롭지 않다.
“오호호,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네요. 그렇죠 리센느?”
“…네.”
드메르 남작은 떨떠름해하는 리센느의 기색도 눈치채지 못한 채 어여쁜 팔찌를 어루만지며 큰 소리로 웃었다.
2.
“너 은근히 영리하구나?”
의견조율에서 있던 일을 들은 소피아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학자로서 능력이 출중하다는 건 이번 논문을 계기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여우처럼 잔머리까지 잘 굴리는 타입인 줄은 미처 몰랐다.
소피아가 지켜봐 왔던 시우는 아멜리아만큼이나 요령 없고, 티페레트 공작만큼이나 처세에 능하지 못한 전형적인 천재상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혼자 씩씩하게 의견 조율에 들어가더니 그럴듯한 협상 결과까지 전리품으로 가져왔다.
“일방적으로 판돈을 걸기엔 꼴 받잖아요.”
“그건 그렇지.”
“돈이라도 왕창 뜯어야 성이 차겠어요.”
“나도 선물 사주는 거야?”
“그럼요, 도와주셨는데.”
“고마운 걸? 눈독 들이던 만년필이 있었는데.”
시우는 담배 필터를 잘근잘근 씹으며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어제부터 쭉 저기압인데 소피아가 보기엔 상당히 귀여웠다.
사실 이번 감사는 일방적인 강요에 가까웠다.
고발당한 것이 불쾌해도 피할 수 없으며, 만에 하나라도 소명에 실패할 경우 시우만 리스크를 짊어지는 불쾌한 이지선다였던 것이다.
반대로 고발자 측은 거의 아무런 리스크가 없다.
하지만 시우는 ‘방청객’ ‘자유토론’이라는 떡밥으로 상대를 끌어들이고 ‘배상금’이라는 리스크를 짊어지게 했다.
“근데 순순히 받아들일 걸 알았어?”
“당연하죠. 그 치들이 보기에 전 후견인의 권력에 취한 어리숙한 마녀일 텐데. 고작 이 정도 판돈에 꼬랑지 말면 체면이 서겠습니까? 결투를 건 것도 아니고.”
타인의 시선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도, 그 선입견을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안다.
거기까지라면 선 잘 타는 간잽이에 그치겠지만 압도적인 자신감의 근원이 본인 능력에 있으니 멋진 거다.
“연구 노트는 왜 제출 안 한 거야?”
“그래야 조금 더 만만하게 보일 것 같아서요. 켕기는 게 있으니까 저런갑다 하겠죠.”
“블러핑 용이라는 뜻?”
“그것도 그건데 제 연구노트 자체가 워낙 중구난방이라서 굳이 논문으로 제출 안 하려던 부분까지 끼어 있습니다.”
“음? 그게 무슨 말이야?”
“논문으로 제출한 게 1세대 초기모델이라면 지금 제가 사용하는 마법은 5세대쯤 됩니다. 그런데 연구노트엔 전부 혼재되어있으니까요. 살림밑천 다 공개할 필요는 없죠.”
소피아는 그의 말을 이해하는데 잠깐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하기야 마녀들이 자료를 공유한다 해도 정말 핵심적인 부분은 빼놓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뜩이나 학계에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논문이 고작 초기모델?
“…….”
어쩔 수 없는 질투에 잠깐 아니꼬운 마음이 되었던 소피아지만 이내 갈무리했다.
“훌륭하네. 분위기는 어땠어? 보통 경험 없이 미숙한 어린 마녀라면 꽤 부담감을 느낄 법도 한데.”
“그냥 연구 열심히 하는 마녀들 모아놓은 것 같던데요.”
“하긴, 네 주변에 워낙 쟁쟁한 인사들이 많아야지. 내일도 잘할 수 있겠지?”
“물론이죠.”
“준비 안 해도 돼?”
“안 해도 됩니다. 이미 가정방문 때 비슷한 거 많이 했어요.”
소피아는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자신감 좋아. 그날 코디는 내가 도와줄게.”
“코디요?”
“네가 방청객을 불러들인 순간 이미지도 중요해. 거기에 모인 사람은 언제든 네 적이 될 수도 아군이 될 수도 있어. 가능한 냉철하고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풍길 수 있게 코칭도 해줄게.”
3.
“그거 들었어?”
“부정연구감사 얘기 맞죠?”
“리센느 선임사서가 찔렀다는데?”
“세상에나…. 간도 크네요.”
“제머나이 백작이 언짢아 하겠어요.”
게헨나는 다시금 뜨거운 이슈로 들썩였다.
요새 귀에 딱지가 내려앉을 만큼 자주 들려오는 그 이름.
신시우.
쉽사리 풀리지 않는 난제를 던진 논문과 함께 등장한 그가 비서고에서 부정감사 공방을 벌인다는 소식은 꽤나 자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고액의 선물을 준비할 필요도 없이 연구발표 비스름한 마법 논검을 볼 수 있는 방청객 선출도 이슈로 부양했다.
비서고의 감사위원회 측에서 진리진명 학술회에 30석, 에메랄드 타블렛에 30석을 우선 배정하고 나머지 40석은 신청자에 한해 무작위로 선별한다 고지했다.
“방청객 선출 지원했어?”
“떨어졌어. 아쉽네.”
“하여간 신시우는 자신 있는 모양이야. 듣기로는 자유 토론도 그쪽에서 제시했다는데.”
“우와, 그쪽도 배짱이 장난 아니네요.”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사리분별 못하는 건지….”
“결과를 보면 알겠죠.”
“하아, 내가 갔어야 했는데….”
그리하여 수많은 마녀의 관심이 집중된 지금.
운 좋게 방청객으로 참여 자격을 얻은 마녀들은 제2회관에 앉아 개꿀잼 마법 논문 배틀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발자 리센느에 관한 관심은 다소 옅었으나, 저자 신시우에 대한 눈빛은 가히 따가울 지경이었다.
거기엔 의혹의 시선도, 교조적인 시선도, 막연한 거부감의 시선도, 순수한 관심의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이목이 쏠리는 것쯤은 익숙하다는 듯 그의 태도는 태연하면서도 여유가 넘쳤다.
느슨하게 양복 자켓을 걸치고,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채 다리를 꼬고 담배를 피우는 샤프한 미남 신시우.
살짝 건들거리는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아직 감사가 시작하기 전이니 문제없다.
오히려 그런 태도이기에 뻣뻣하게 앉아있는 리센느 측보다 자신만만해 보였다.
두 거대 학회 출신의 마녀들이 서로 의식하며 체면 차리는 와중, 랜덤 선출된 방청객은 가감 없이 의견을 나눴다.
“인물이 훤칠하네.”
“담배 섹시하게 피운다….”
“원래 저런 이미지였던가? 좀 더 순했던 것 같은데.”
물론 모든 랜덤 방청객이 시우에게 우호적인 건 아니다.
특히 진리진명 학술회와 에메랄드 타블렛 소속 마녀는 보수적인 정통파가 많은 만큼 한결 깐깐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좀 싹퉁머리 없어 보이네.”
“뒷배경 믿고 설치는 것도 어지간해야죠. 오늘 금박이 벗겨지는 걸 볼 수도 있겠네요.”
오후 5시 정각.
“지금부터 제1444회 연구부정감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착석해주세요.”
시계를 살피던 그레모리 사서장의 선언과 함께 소란이 잦아들었다.
“전달되었겠지만 금일 연구부정감사는 심층 논증으로 진행됩니다. 저자 신시우 씨.”
“네.”
사서장의 호명에 신시우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거대한 칠판이 놓인 강단에 올랐다.
이번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은 의도적으로 골자, 위상 결합에 대한 증명 부를 빼먹었다.
질의응답과 토론, 논증이 오가기 전 그 부분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했다.
“…….”
신시우가 분필을 쥔 채 강단에 오르자 가뜩이나 조용하던 회장 안에 한층 무거운 정적이 흐른다.
한창 주목을 끌며 많은 마녀를 골머리 앓게 한 문제의 답을 출제자 본인이 써내려가는 것이다.
그는 번지르르한 말이나 자기소개는커녕 변변한 인사도 없이 고풍스러운 대형 칠판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증명에 대해 필기하기 시작했다.
-딱 따각!
계산식을 써내려가는 동작도, 필요한 곳에 마법식을 그리는 손짓도 1초의 멈춤이 없다.
속도만 빠른 것이 아니라 사람 엉덩이 위에 써도 능히 알아볼 수 있을 법한 유려한 필체였다.
삽시간에 검은 칠판 한 면이 하얀 판서로 가득 찼다.
시우는 망설임 없이 다른 칠판으로 걸음을 옮겨 나머지 분을 적어간다.
-탁 타닥 타다닥
분필이 보드를 때리는 명쾌한 소리만이 가득하던 가운데 방청객은 물론 위원회 사이에서도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저걸 저렇게….”
“그러니까 위상 결합의 의미가….”
마녀 학계의 귀추가 주목되던 논문인 만큼 여기 모인 누구 하나 증명에 매달리지 않았던 이가 없던 것이다.
심지어 고발자 리센느조차 콜롬버스의 달걀에 비견되는 획기적인 발상을 제시하는 증명에 입을 벌린 채 빤히 판서를 바라보았다.
방청객석이 바빠진다.
일단 이해가 가지 않아도 증명식을 옮겨적으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손을 놀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센느는 초조해졌다.
양 거대학회 측에선 적지 않은 대마녀가 선출되어 방청객으로 앉아있다.
처음 그 면면을 확인할 때까지만 해도 내심 다행이라 여겼다.
60명 중 반수 가량이 각 분야의 쟁쟁한 명사 혹은 대마녀 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까다로운 질문이 신시우를 향해 쇄도할 것이고, 그는 높은 확률로 답변에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막상 판서가 시작되자 분위기가 변한다.
연구부정감사라기보단 저명한 마녀를 초청한 강연에서나 볼법한 분위기다.
“…이러면 안되는데….”
이번 감사도 연구성과의 빼어남을 보이는 자리가 아니라 도용 여부를 판단하는 자리다.
그러나 방청객들은 그 본질을 잊은 듯 단순히 성과에만 집중하고 있다.
-탁 탁 탁
신시우의 마지막 글자를 적은 뒤 뒤를 돌았다.
“여기까지가 증명식입니다.”
“고발자 리센느 에르밧, 준비해 온 문답을 진행해 주세요.”
리센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장내의 흐름을 바꿔야 한다.
“빼어난 증명입니다. 하지만 본 감사의 쟁점은 논문의 빼어남을 판가름하는 게 아니라 그의 능력을 시험하는 자리죠. 저 정도 판서를 외워서 다른 사람 앞에 쓰는 건 견습마녀도 할 수 있습니다.”
마법적 사색에 몰두하거나 그저 감탄하던 방청객들의 입이 다물렸다.
놓치고 있던 본질을 짚는 리센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도 있었다.
“요는 그가 자신의 논문에 대해 얼마나 이해도를 지녔느냐를 이 자리에서 증명해 보이는 게 맞겠죠. 그에 걸맞은 질문을 여럿 준비해두었습니다.
부디 이번 감사가 명예에 눈이 멀어 연구부정을 저지른 어린 마녀를 지탄하는 자리가 아닌 새로운 인재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리이길 바랍니다. 저자, 먼저 첫 번째 질문 드리겠습니다.”
대뜸 도용 시비를 걸어놓은 주제에 새로운 인재의 탄생을 축하한다를 운운하다니.
구태여 어린 마녀라는 호칭을 붙인 꺼낸 것도 의도가 빤하다.
그게 퍽 우스웠는지 여태껏 무표정이던 신시우가 사납게 웃었다.
“어디 한번 씨부려 보세요.”
“저자 측, 발언에 주의를 요구합니다.”
메티스의 건조한 경고와 함께 본격적인 심층 논증이 막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