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8
1.
리센느 에르밧은 초조함에 손끝을 물어뜯었다.
한 시간 뒤인 오전 10시가 되면 비서고의 제2회관에서 연구부정감사를 위한 의견조율이 시작된다.
참여 인원은 총 11명.
부정감사를 주관하는 사서장 그레모리 백작, 비서고의 고등 사서 셋, 선임 사서 다섯.
참고인인 논문의 저자 신시우와 고발자 리센느 에르밧까지.
“이건 진짜 미친 짓인데….”
거액의 빚 때문에 드메르 남작의 지시를 억지로 떠맡은 리센느지만 이 일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신시우가 논문이 자신의 성과임을 입증하지 못한다고 해도 문제.
입증해낸다면 전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욱 큰 문제다.
감사 과정에서 이의제기 및 공방에 필요한 자료는 드메르 남작이 준비해주었고, 혹시 뒷일이 생겨도 잘 처리해주겠다는 약조를 받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드메르 남작이라도 뿔난 제머나이 백작과 티페레트 공작을 어찌 상대하겠는가?
그게 가능했으면 지가 전면에 나섰겠지.
결국 일이 틀어지면 독박을 쓰게 되는 건 리센느라는 의미다.
“서러워서 살겠나….”
리센느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홍차를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을 무렵.
드메르 남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센느 준비는 잘 끝났나요?”
“네.”
“계획은 기억하고 있죠?”
“네, 무조건 심층 논증으로 밀고 가라는 거죠?”
사실 부정감사는 정해진 틀이 존재하지 않다.
윤리적 문제나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있을 경우에야 재판처럼 절차에 따라 진행되지만, 도용 같은 증빙이 모호한 사안은 천차만별의 방식을 고발자와 저자 합의하에 채택한다.
따라서 오늘처럼 감사에 앞서 의견조율을 갖는 것이고 말이다.
“신시우의 논문이 타인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면 준비되지 못한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못할 거에요.”
“그렇죠, 아무리 메뉴얼을 짜두었다고 해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심층 논증처럼 자유 토론 쪽으로 끌고 간다면 결국 바닥을 보일 게 뻔하다는 말이죠.”
리센느는 손에 들린 두툼한 자료를 매달리듯 움켜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드메르 남작과 그녀의 측근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까다로운 질문집이다.
“그가 10개의 질문 중 3개만 제대로 답변하지 못해도 그레모리 사서장은 저희의 손을 들어줄 거에요.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드메르 남작은 메티스 사서장이 어떤 인물인지 안다고 자부한다.
그녀는 에렐림 공작 못지않게 고리타분한 정통파 마녀다.
대뜸 등장한 남자 마녀의 논문에 대해서 지극히 보수적인 잣대를 들이밀게 분명하다.
“정말 그럴까요…?”
하지만 리센느는 확신이 없었다.
드메르 남작의 말이 아예 허무맹랑한 건 아니지만, 선입견에 갇혀 오판을 내리는 사서장의 모습은 가히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이죠, 절 믿어요.”
“네, 믿을게요.”
“이 일이 잘 풀린다면 그간 밀린 이자도 전부 탕감해주고, 빚도 반으로 줄여 줄게요.”
“…네.”
하지만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황에서 이제 와 의심해봐야 의미가 있나.
그저 소망을 담아 있는 힘껏 믿을 뿐이다.
2.
비서고의 제2회관은 층층이 늘어선 의자가 강단을 둘러싼 구조의 넓은 강당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세미나를 위해 사용되는 만큼 학구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지금부터 논문부정감사를 위한 의견 조율을 시작합니다.”
법정을 연상케 하는 엄숙함 속에서 메티스 그레모리가 입을 열었다.
“고발자 리센느 에르밧.”
호명받은 리센느가 먼저 중앙 단상에 앉은 메티스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중압감에 짓눌려 터져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짓던 리센느지만, 막상 지금은 태연한 포커페이스다.
그녀 역시 온갖 권모술수와 눈치싸움이 난무하는 붉은지붕 살롱에서 살아남아 온 전사인 것이다.
“저자 신시우.”
하지만 근사한 양복을 걸친 신시우가 마주 놓인 테이블에 앉는 순간 리센느는 잠시 평정을 잃었다.
워낙 유명인사였던 만큼 먼발치서 본 적은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잘생겼고, 좀 순하게 생겼네’가 리센느의 인상이었다.
하지만 부드러움 일절 없는 차가운 입매와 냉정한 시선을 던지는 그는 어린 마녀라기보단 역린을 뜯긴 원로 학자의 위압감마저 풍겼다.
리센느를 대놓고 노려보진 않지만 서늘한 기색이 돋은 안광은 70년 차 마녀 리센느조차 찔끔할 정도다.
“이번 감사는 신시우 저, ‘상이한 자성마법 간 결합: 위상 일치를 활용한 반발통제모형에 대한 논의’에 관하여 진행합니다.
고발자는 저자의 논문이 타인의 성과를 도용한 것이란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리센느 에르밧 양, 작일 제출한 자료 말고 추가로 제출할 것이 있나요?”
“아니요.”
“신시우 씨, 감사위원회는 고발자가 제출한 도용 의혹에 관한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따라서 저자가 소명을 원치 않는다면 감사는 이 자리에서 종결됩니다.”
리센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차라리 거부해라, 거부해라라고 속으로 열심히 기도한다.
그것만으로도 드메르 남작은 만족할 것이다.
감사가 불발로 끝나도 신시우가 자신이 없으니 부정감사 요청에 불응했다는 식으로 소문이 돌 테니 말이다.
리센느로선 본의도 아닌 싸움에 깊게 얽히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기대가 무색하게 신시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명에 응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진행하겠습니다.”
안경을 낀 메티스가 서류를 펄럭였다.
잠깐 고개를 갸웃하는 메티스 사서장.
“신시우, 연구 노트를 제출하지 않았네요. 아직 전달되지 않은 걸까요? 지금 제출하여도 좋습니다.”
“아닙니다. 제출할 예정은 없습니다.”
“신시우 씨가 해명 요구를 밝힌 이상 본 감사는 도용 의혹에 대해 철저히 검증하여야 합니다. 연구노트는 도용 의혹 판별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제출 여부에 관한 선택지는 저자에게 있으나 제출거부 시 감사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인지하고 있습니까?”
“네, 제출하지 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리센느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논문은 제출해놓고 연구노트는 숨기려 든다?
역시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거다.
“도용 의혹 소명에 관한 절차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자와 고발자 간 논증 절차에 관해 합의를 주선하겠습니다. 관례에 의해 저자 측부터 제시 바랍니다.”
리센느조차 부담감을 느끼는 자리인데 아까부터 태연자약한 신시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층 논증을 요구합니다.”
리센느는 불안감 사이를 비집고 좌르르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됐다.
오늘은 되는 날이다.
참고 자료를 통한 교차 검증이나 감사위원회 내부 자체 심사 같은 이야기가 나왔더라면 오히려 골치 아파 질 수도 있었다.
정말 이 논문이 제머나이 백작가의 사위 몰아주기 프로젝트의 일환이라면 서류상 공방을 부족함 없이 보충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유 토론 형식으로 나아가려 했던 건데.
어떻게 밑밥을 뿌려야 입질이 올지 전전긍긍하던 와중 대어가 낚싯바늘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단,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보세요.”
“방청객을 들이고 싶습니다.”
“방청객을요?”
정숙했던 감사위원회 석에서 약간의 소요가 일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모호한 도용 관련 감사인만큼 방청객을 들이는 게 전례 없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 측에서 이를 요청하는 건 흔치 않았다.
방청객을 대동한 심층 논증의 경우 고발자 측에서뿐 아니라 방청객에게도 질문 기회가 있는데 완벽히 답변할 수 있다고 확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리 논문의 저자라도 다른 각도에서 찔러오는 질문 공세엔 절절매는 일이 있으니 말이다.
지나치게 장고하거나 흐지부지한 답변을 내놓는다면 곧장 심증 악화로 이어진다.
경험 없는 풋내기 마녀가 선택하기엔 아무리 봐도 자충수였다.
“대신 완벽히 소명할 경우, 본 감사 탓에 감소할 잠재 수익을 고발자 측에서 배상해주길 원합니다.”
의아한 기색을 내비치던 메티스 사서장은 시우의 뜻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하면 감정이 떠오르지 않는 눈동자 위로 얼핏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지나갔다.
그는 최근 논문을 통해 가정방문객을 받고 있다.
하지만 방청객을 선출해 감사를 연다면 그만큼 가정 방문할 ‘잠재 고객’이 감소한다.
해명 과정에서 신시우가 해당 논문에 대해 해설할 테니 말이다.
그에 따른 손해 배상은 고발자 측에 뒤집어씌우겠다는 말.
한 마디로 판돈을 얹는 레이즈였다.
리센느 측에도 배상금이라는 부담이 전가되지만, 방청객까지 끼어 있는 상태에서 소명에 실패했다간 정말 나락까지 명예가 추락할테니 말이다.
잠시 주변 사서들과 대화를 나누던 메티스 사서장이 선언했다.
“좋습니다. 단 방청 인원은 일백 명으로 제한, 잠재 수익 산정은 가정방문에 지급 받은 사례금 평균치의 절반으로 측정하겠습니다. 신시우 씨, 해당 조정에 대해 이의 있나요?”
“없습니다.”
가정방문은 세세한 일대일 코칭.
반면 방청객은 강의를 듣는 것과 크게 다름이 없을 것이니 합리적인 산정이었다.
“리센느 에르밧 양, 저자 측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어요?”
한편 리센느는 손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뭔가 이상하다.
신시우의 태도가 너무 당당하다.
심층 논증을 제시한 것도 모자라 방청객까지 들이겠다니.
고민하는 리센느에게 시우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고발자의 부족한 증거에도 의혹 해명에 응했습니다. 마도에 대한 존중은 충분히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심층 논증이 아닌 감사위원회의 내부 심사에 맡기겠습니다. ”
단호하게 말을 끝내는 시우의 모습에 리센느의 머리에 섬광이 일었다.
가만 보자.
이거 순 허세 아닌가?
심층 논쟁은 도용 의혹을 가장 깔끔하게 소명할 수 있으나 수비 측이 불리한 방식이다.
원숙한 마녀조차 때때로 예기치 못한 질문에 실수를 한다.
아마도 그는 처음부터 내부 심사를 원했을 것이다.
그에게 가장 좋은 그림은 다소 부담스러운 제안에 고발자 측이 꼬리를 내리고 내부심사로 결정짓는 것이다.
이 경우 처음부터 내부심사에 고집한 게 아니므로 떳떳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즉, 실리와 심증을 교묘하게 챙긴 블러핑이다.
리센느는 그리 판단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메티스 사서장이 조율 사항을 정리했다.
“고발자와 저자 간 의견이 합치되었음을 확인합니다. 소명 방식은 심층 논증. 저자의 요구는 일백의 방청객을 들이고 소명 성공에 한하여 잠재 수익 손실을 고발자에게 청구할 것. 다르게 이해한 사항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습니다.”
“연구부정감사는 익일 오후 5시, 본 회관에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에 맞춰 출석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상으로 연구부정감사에 대한 의견조율을 마칩니다.”
리센느는 마지막으로 신시우의 얼굴을 보았다.
“…….”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