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840화 (840/917)

#840

1.

좋은 소식과 그다지 좋지 않은 소식이 있다.

그다지 좋지 않은 소식을 먼저 말하자면 아멜리아와 샤론이 비서고에서 그럴듯한 해결방안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묵시의 마녀건, 케테르 공작이건 죄다 베일에 싸인 신비스러운 존재다.

고작 일주일 정도의 자료 조사 정도로는 시우의 문제를 해결할만할 단서를 찾을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다.

시우가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이 마녀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 여파인지 비서고에 들낙이는 사람도 크게 늘었으며 도시 어디에서나 신시우 이 세 글자가 입에 오르내렸다.

요 며칠 시우는 가르침을 청하며 가정방문하는 마녀를 응대하기 바빴다.

알비레오 백작에게 듣길 돈도 어마어마하게 벌고 있다고.

그와 연이 있는 아멜리아와 샤론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거나 말을 걸어오는 일도 왕왕 생겼다.

유명인의 지인은 그만한 관심을 받는 것이다.

연이은 희보에 샤론은 덩달아 어깨가 으쓱해지는 걸 느꼈다.

불과 얼마 전 매몰차게 비서고 출입을 거부당하는 걸 봤기 때문일까?

‘불완전계승’이라는, 일종의 장애를 짊어진 채 마녀가 되었던 샤론은 마녀사회의 능력주의가 얼마나 냉혹한지 알고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능력이 인정된 사람은 한없이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시우의 진가를 뒤늦게나마 알게 된 마녀들에게 고소함과 뿌듯함을 느낀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이에게 인정받는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나날이 높아지는 어깨뽕과 달콤한 초콜릿 같은 자랑스러움 뒤엔 약간의 쌉싸름함이 뒷맛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샤론도 시우의 논문을 읽었기 때문이다.

“하아.”

늦은 밤.

비서고에서 돌아온 샤론은 지혜열로 뜨끈거리는 머리를 차가운 술로 가라앉히며 재차 펜을 쥐었다.

고작 50페이지 남짓으로 짧게 축약한 논문.

이것이 샤론의 카카오빈이다.

“진짜 대단해, 역시 시우라니까.”

샤론은 아주아주 부족했던 시우의 과거를 알고 있다.

신촌에서 함께 동거하던 때이니 그리 오래 거슬러 갈 필요도 없다.

샤론은 ‘어떻게 마법을 쓰는 거지?’ 싶던 노베이스 야매 마녀 시우에게 마법의 기초를 가르쳐 주었다.

엄청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다.

보통 견습마녀 때 인풋하고 넘어갔어야 할 부분을 조목조목 짚어주며 더불어 시우가 독자적으로 연구하던 마법에도 조언을 주었을 뿐이다.

그 당시 연구하던 마법이 서로 다른 자성마법을 엮어내는 것이었으니 어찌 보면 이 논문의 전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겨우 2년 정도 만의 시간에 시우는 샤론을 추월했다.

연인뿐 아니라 모든 마녀가 인정할 성과를 보였다.

아무리 그가 케테르에게 그릇을 부여받고 특이체질이 되었다 한들 이 자체가 시우의 능력임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

만약 샤론이 시우처럼 강력한 자성마법들을 보유하게 됐더라도 그만큼 능숙하게 활용할 자신은 없었다.

그만큼 그의 재능은 독보적이었다.

일주일간 하루 8시간씩 투자하는 논문 해석도 샤론이 시우를 도와 토대를 다진 일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끄으응…. 역시 어렵네.”

전이라면 그 쌉싸름함이 곧장 자괴감 혹은 열패감 따위로 전환됐겠지.

또다시 까마득히 벌어진 격차에 고개를 떨궜을지도 모른다.

“나라고 못할 건 없어!”

하지만 지금의 샤론은 다르다.

시우가 말하길 샤론은 세상에서 제일 귀여우니까!

시우가 첫눈에 반한 여자니까!

불합리하게 보이는 재능의 격차도….

“이게 모두 내가 너무 귀엽기 때문이지. 암암.”

라고 담대히 넘길 수 있게 되었다.

“…….”

물론 반쯤 농담이고 대신 굉장한 자극과 향상심 또 승부욕으로 전환 되었다.

시우에게 반드시 도움이 되자는 다짐이 언제 결실을 맺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 평생 사랑할 거니까 그 기간 내에만 해내면 돼.”

그런 일념을 꾹꾹 곱씹으며 오늘도 논문을 편 것이다.

적어도 시우의 도움 없이 이 논문을 완벽 증명 및 활용해 보는 것이 샤론 첫 번째 목표였다.

“음, 으으음…. 흐으으음….”

하지만 어렵다.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가장 중요한 골자 부분을 증명하기 위해선 고차원적인 추론 능력을 요구한다.

그런 주제에 막상 해보기 전까지는 쉬워 보이는 게 제일 화난다.

“아.”

날카로운 집중력을 선보이며 이제껏 자신의 가설을 총망라해가던 샤론은 야트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번개를 맞은 것처럼 찰나에 찾아온 감각.

도저히 뚫어낼 수 없을 것 같던 두꺼운 벽에 아주 작은 균열이 일어나는 듯한 감각이었다.

동시에 전율이 달린다.

샤론 애버그린이, 그 선대가, 그 선대의 선대가 쌓아왔던 지혜의 금자탑이 굉음과 함께 무너져내린다.

그간 샤론을 가둬두었던 선입관, 고정관념 그리고 스스로 규명 지었던 한계가 껍질처럼 바스러졌다.

그리고 무너져 내린 파편이 하나의 길로 이어진다.

샤론의 자성마법은 타르바의 5원소를 기반으로 한 마법이다.

역대 에버그린은 누구보다 원소의 ‘덧셈’에 애썼다.

다섯 번째 원소인 ‘아카샤’를 덧셈 연산자로 삼아 서로 다른 네 원소의 균등한 조화를 운행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 할까?

균등, 조화, 덧셈.

말은 좋다.

그러나 인위적인 융합은 결국 궁극적인 한계에 맞부딪치고 만다.

이토록 훌륭한 짜임새를 지닌 시우의 논문조차 서로 다른 자성마법을 완벽히 결합하는데 한계를 인정했다.

시우는 모든 걸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버릴 건 과감히 버렸다.

숫자를 무조건 크게 가져가 ‘덧셈’이라는 연산자를 고집하는 대신 조금 작은 수를 취하더라도 ‘제곱’이라는 연산자를 사용했다.

100 더하기 100보다는 100의 2 제곱이 훨씬 더 크지 않은가?

“스승님이 틀렸어.”

마침내.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맹신해 왔던 자성마법의 방향성까지 붕괴한다.

선대의 가르침을 초월하는 순간 ‘자성마법’은 한층 더 높은 경지의 마법으로 거듭난다.

샤론은 꿈에서 악마를 만나고 악상을 떠올린 작곡가처럼 펜을 쥐었다.

무아지경에 빠져 거침없이 종이 위에서 춤추는 펜촉이 쉴 새 없이 사각거렸다.

2.

물 들어 올 때 노 저으란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다만 하루 정도는 쉬어둬야 했다.

각기 다른 자성마법을 지닌 마녀들의 다양한 관점에서의 질문.

여기서 얻은 깨달음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루 동안 피객패(避客牌)를 걸어놓은 시우는 적당히 정리를 끝내고 아멜리아의 가게로 향했다.

지금쯤이라면 비서고에서 돌아왔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거 영 마음이 불편하다.

아멜리아와 샤론은 시우를 위해 열심히 비서고를 조사 중인데 정작 본인은 고액 알바 중이라니.

두 사람이 이에 대해 불만을 품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양심이 있지.

“이제 슬슬 연락 올 때도 되지 않았나?”

이쯤되면 비서고 측에서도 접선이 있을 줄 알았건만 감감무소식이다.

아무튼 말쿠트 갤러리의 메리골드 향수점은 오늘도 밤늦게까지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딸랑딸랑

경쾌한 도어벨 소리를 듣고 고개를 올리는 아멜리아.

“시우.”

그녀의 얼굴이 단박에 환해졌다.

린네만큼이나 무표정이던 아멜리아지만 시우와 함께 있을 땐 은은한 미소가 디폴트다.

“바쁘세요?”

“아니요, 막 오늘치 조향이 끝났어요.”

“잘 됐네요. 아 참, 소소한 선물이 있어요.”

“선물이요? 눈 감으면 되나요?”

시우는 조향대 겸 카운터로 성큼성큼 다가가 준비한 선물을 휙 꺼내 들었다.

별건 아니고 꽃다발이다.

미안한 마음 반 고마운 마음 반으로 오는 길에 하나 사온 것이다.

“너무 예뻐요. 고마워요, 시우.”

하루 반나절은 꽃에 파묻혀 지내는 아멜리아지만 시우가 준 꽃다발은 의미가 남다르다.

하얀 이가 보일 정도로 방긋 웃은 그녀는 슬며시 코를 파묻어 향긋한 꽃내음을 맡았다.

그림이다 그림.

“이야…. 진짜 꽃 앞에서는 제가 가져온 꽃다발은 아무것도 아니네요.”

시우의 너스레에 잠깐 고개를 갸웃한 아멜리아는 뒤늦게 ‘뭐에요 시우’라고 손을 저으며 쿡쿡 웃었다.

조향대 너머를 돌아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르자 아멜리아는 꽃다발을 잠시 테이블에 올려놓고 가볍게 키스해왔다.

“시우, 오늘따라 꾸며 입었네요?”

“아, 이 옷 기억나시죠? 요즘은 거의 매일 입는 중이에요.”

“그것도 그거지만…. 뭔가 평소보다 잘생겼어요.”

사실 타카쇼네 가게에 들러서 머리도 단정히 세팅하고 왔다.

꽃다발을 준비한 것도 음흉한 속내가 숨어있다.

귀환 이후 다른 연인들과는 한 번씩 관계를 맺었지만 아멜리아는 번번이 타이밍이 빗나갔던 것이다.

뭐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멜리아가 은근히 단둘이 있길 피하는 모습도 보였고 말이다.

오랜만이니 먼저 말하기 부끄러워하는 중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큼큼, 아멜리아 님. 이후에 뭐하시나요?”

시우의 의미심장한 질문에 아멜리아의 몸이 조금 움츠러든다.

옆머리를 슬며시 어루만지며 시선을 피하는 동작은 그녀가 수줍을 때 보이는 사인이다.

사실 시우도 아멜리아랑 이렇고 저런 일을 할 때 슬쩍 겸연쩍어지곤 했다.

막상 본게임에 들어가면 그딴 거 없지만, 아무래도 연인으로 지낸 기간보다 그렇지 않았던 기간이 훨씬 길어서 일수도….

“시우, 마침 저도 시우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어요.”

아멜리아가 조향대의 서랍을 열어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처음엔 당연히 시우가 쓴 논문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딱 그 두께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표지에 적힌 아멜리아의 글씨를 보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는다.

“이게…. 뭐죠?”

시우는 눈을 끔뻑였다.

한차례 심호흡한 아멜리아는 굉장히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시우가 꽃다발을 줄 때도 저런 표정을 지었지 않았을까?

“제목 그대로예요. 상황극용 대본이에요. 시우는 상황극을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각종 문헌을 참고 해서 시우가 좋아할 만한 상황을 여러 개 써두었어요.”

“…….”

“지금까지는 조금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진행했으니까요. 아무래도 임기응변에만 의존하다 보면 저도, 시우도 당황하는 경우가 있었잖아요?”

“…….”

“하지만 여기  큰 설정, 세부 흐름, 수위 그리고 모종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세이프워드, 준비물 등을 기록한 대본이 있다면 훨씬 만족스러운 상황극이 될 거에요.”

그러고보니 이걸 준비하느라 그간 은근히 일정이 어긋났던 걸까?

아멜리아와의 상황극이라면 극적인 재결합 섹스 이후 곧잘 해먹던 소재이긴 한데….

그래도 이렇게 대본까지 짜두는 게 맞나 싶다.

가상한 노력의 방향이 빗나간 좋은 예시다.

“와, 정말 마음에 듭니다.”

“다행이에요.”

하지만 차마 ‘저 잘했죠?’라는 표정으로 칭찬을 기다리는 아멜리아를 보고 속내를 말할 수 없었다.

“조금 시간이 늦었으니까 다음에 참고하고…. 오늘은 그냥 어때요?”

“…네?”

하늘이 무너지듯 시무룩한 표정을 보니 엄청 공들여 준비했나 보다.

시우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

“아닙니다, 바로 참고해볼게요.”

“네!”

아멜리아는 방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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