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838화 (838/917)

#838

1.

‘감히 부부 관계를 방해하다니! 큰 주인장에게 따지겠다!’라고 씩씩거리는 르뤼에를 애써 진정시킨 시우는 방문을 나왔다.

손님 방문이라길래 그래도 멀끔하게 차려입어 보았다.

예전 아멜리아가 시우를 플로라 양장점에 데려가 맞춰 준 그 양복이다.

물론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근육이 붙었기에 한번 수선했지만 말이다.

알비레오가 손끝을 까딱하며 지적했다.

“시우 군, 넥타이 흐트러졌어요.”

“아, 지금은 좀 어떤가요?”

“아직도 영 어색하네. 이리 와 봐요. 여자친구가 너무 많으니까 넥타이도 혼자 못 매나요?”

평소라면 가시처럼 날이 서 콕콕 박힐 대사인데 오늘따라 간지러운 핀잔 정도다.

알비레오의 가느다란 손끝이 넥타이를 쥐었다.

시우보다 낮은 눈높이에서 집중하듯 느긋하게 깜빡이는 눈꺼풀.

“…….”

시우는 잠깐 침을 삼켰다.

미리 변명하자면 이건 조건반사다.

데네브와 알비레오는 오딜과 오데트처럼 똑 닮은 쌍둥이.

다른 점이라고는 체모의 색과 평소 코디 뿐이다.

이런 거리에 그녀답지 않은 친밀한 행위까지 더해지자 자연스레 작은 장모님과 겹쳐 보이는 것이다.

평소에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지척에서 나긋한 손길이 목 근처를 스쳐 지나가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무튼 이 거리는 조금 부담스럽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데네브와는 여러 번 관계를 맺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함께 사지를 헤쳐나간 사이니 사위 장모 관계 아니었다면….

오해와 갈등을 품었다가 함께 시련을 극복하고 이어진 커플 그 자체 아닌가?

물론 작은 장모님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무슨 일 있어요? 얼굴을 빤히 보고.”

“아, 아닙니다.”

“이거 참…. 모처럼 방법을 알려주는데 제대로 보지도 않고. 다시 보여 줄게요. 자, 집중하세요.”

능숙하게 매듭을 짓더니 좌우로 매듭을 주는 알비레오.

멋들어진 양복에 어울리는 클래식한 에스콰이어 노트였다.

“이렇게 하는 거군요.”

“그래요, 앞으로는 혼자서도 잘할 수 있겠죠?”

불건전한 잡념을 털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알비레오 님.”

“왜요?”

“제 말이 우습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네.”

“오늘은 화 안 내시나요?”

알비레오는 르뤼에가 잘근잘근 베개를 씹고 있을 방문을 슬쩍 보더니 웃음을 흘렸다.

“한두 번도 아니고, 예고도 없이 찾아온 건 저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평소라면 이미 정강이를 두 번 정도 걷어차였어야 했는데.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시우 군 덕분에 살롱에서 어깨에 힘 좀 줬거든요. 덕을 봤으니 조금 관대해진 거일 수도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시우 군이 그래도 능력 하나는 괜찮다는 걸 확인했다는 의미에요.”

“아.”

이해했다.

아마도 논문에 관련된 이야기인 것 같았다.

“정말 경탄했어요. 혼자서 사부작거린 마법을 그 경지까지 끌어올리다니. 아직도 모르고 있었나요? 지금 게헨나 전체가 시우 군 논문 얘기로 떠들썩해요.”

“정말요?”

알비레오는 장갑 낀 손을 뻗었고 시우는 자연스레 에스코트했다.

복도를 거닐며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요컨대 별생각 없이 게재했던 논문에 뜨거운 반응과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큰 장모님이 싱글벙글하는 것 역시 사위가 ‘마녀’에게 가장 중요한 ‘연구’ 분야에서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설마 그럼 오늘 손님도?”

“네, 시우 군 논문에 무척 관심이 많은가 봐요.”

“누구인가요?”

“‘연성의 마녀’ 루이사 모이어티 남작이랍니다. 21 위계, 에메랄드 타블렛의 메이가스에요.”

“메이가스요?”

“네, 사실상 학회장 바로 아래의 직급이죠.”

진리진명 학술회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에메랄드 타블렛.

메이가스 급 학회원이라면 10명으로 제한된 명예로운 직급이다.

남작에 21위계라는 사실만 들어도 짐작할 수 있지만 뭔가 대단한 사람이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거의 공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마녀인데 어지간히도 인상 깊었나 봐요. 아, 물론 저도 놀랐어요. 시우 군이 그렇게 능력자일 줄이야.”

발랄하고 산뜻한 어조로 말하는 알비레오의 목소리는 흡사 노랫소리 같았다.

그녀를 알게 된 이후 가장 활기찬 음색이 아닐까 싶다.

“시우 군 소피아 남작에게 조언을 듣고 작성했다고 했죠? 마무리도 일부러 그렇게 지은 것이고?”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모이어티 남작이 왜 찾아왔는지도 얼추 알고 있겠네요.”

“소피아 교수님이 이렇게 하면 돈 벌 수 있다고 하셔서….”

설마하니 대마녀, 거기에 남작이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솔직한 시우의 말에 알비레오는 피식 웃었다.

“선물을 가져왔을 거에요. 적당히 조건을 보고 시우 군이 마음에 들면 질문을 받고 알려주면 돼요.”

“일대일 과외 같은 느낌이군요.”

“정확해요. 선물은 수업료인 거고요.”

“흠….”

애초에 목적은 비서고 정문 뚫기였고, 기술이전을 통한 돈벌이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모처럼 온 기회를 충분한 값을 받고 팔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수익을 챙길 좋은 기회니 말이다.

당장 장모님께 갚아야 할 빚이 한화로 80억이나 된다.

“그러면 어느 정도 선에서 선물을 받아들이면 될까요?”

“무슨 의미죠?”

“정해진 액수라던가 있나요?”

“시우 군의 업적이니 시우 군이 마음에 드냐 안드냐에 따라 달렸죠. 단, 거절하는 걸 어렵게 생각하진 마세요. 정중히 사양한다면 누구도 결례라고 여기지 않아요.”

한 마디로 오징어처럼 시가라는 말이다.

제일 어렵다.

“아, 왜 그런 걸 묻는지 알았어요. 설명이 부족했네요.”

알비레오는 말하던 중 떠올렸는지 시우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겼다.

“ ‘선물’을 대가로 ‘과외’를 해주는 건 일대일 계약이에요. 모이어티 남작의 선물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다른 마녀에게 가르쳐 줄 수 없는 건 아니라는 의미죠. 속된 말로 모이어티 남작 한 명에게 뽕을 뽑을 필요는 없다는 거에요.”

요컨대 앞으로 물어보러 오는 사람의 선물을 몽땅 받고 죄다 알려줘도 괜찮다는 의미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만약 제가 남작에게 강습해주면 모이어티 남작이 또 다른 마녀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건가요?”

“시우 군, 전에도 말했지만 게헨나는 신뢰 사회에요. 타인의 성과를 가로채는 짓을 했다간 마녀명에 큰 오점을 남기고 말죠.”

“고기 뷔페에서 고기를 싸오는 사람 취급하는 거군요.”

“…고기 뷔페가 뭐죠?”

다소 엉뚱한 대화를 끝으로 시우는 모이어티 남작과 대면할 수 있었다.

2.

백작가 롱 갤러리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응접실.

화려하기로 이름 높은 제머나이 백작가에서도 가장 귀한 손님을 응대할 때 사용하는 방이다.

루이사 모이어티 남작은 모자를 벗은 채 소파에 앉아 메이드가 가져다준 홍차를 훌쩍이고 있었다.

게헨나의 가정 방문은 규칙이 까다롭다.

친교와 정보교류가 목적이라 한들 예법과 교양을 지켜야 한다.

학회 내에서 마법 연구에만 몰두하는 모이어티 남작도 기본적인 예절 정도는 알고 있었다.

가령 실내에 들어온 손님이 호스트의 권유 없이 모자를 벗는 건 ‘30분 이상 머물다 가겠다’라는 사인이다.

그런 예의범절에 입각하면, 동이 튼 직후 가정 방문을 하는 건 다소 실례가 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모이어티 남작은 이번만큼은 기꺼이 결례를 무릅쓰기로 했다.

색안경을 끼고 남자 마녀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동료 마녀가 손에 쥐어 준 남자 마녀의 논문.

이 대단한 걸 써내려간 그와 직접, 가장 먼저 대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시라도 빨리 갑론을박을 벌이고 싶다.

더욱 높은 경지에 이르고 싶다.

그런 향상심 앞에 심장을 두근대고 있으려니 구두 소리가 들렸다.

-뚜벅 뚜벅

소문으로만 듣던 남자 마녀.

한 번도 직접 본 적 없는 그가 곧게 허리를 편 힘찬 걸음걸이로 들어온다.

모이어티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모자를 쥐고 있던 손에 힘도 저도 모르게 느슨해진다.

“모이어티 남작님,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신시우라고 합니다.”

모이어티보다 머리 하나 높은 위치에서 들려오는 중후한 음색.

고급스러운 양복 너머로도 돋보이는 잘 단련된 신체.

눈을 비스듬히 가린 안대조차 패션으로 승화하는 조각 같은 외모.

곱상하면서도 남성미가 풀풀 넘치는 이율배반적인 아름다움.

절제된 동작에서 풍기는 은은하게 흐르는 관록과 여유까지.

이제껏 모이어티 남작이 정의하던 ‘남자’와는 다른 생명이 악수를 권해온다.

그래, 당연한 일이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냥 남자가 아니라 낙인이 있는 남자니까.

하지만 모이어티 남작이 상상한 신시우는 천재일지라도 아직 풋내기인 기색이 완연한 어린 마녀였다.

설마하니 북부 대공 같은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 나올 줄이야….

“…….”

“남작 님?”

모이어티 남작은 입이 점차 벌어지고 있었음을 깨닫고 황급히 입가를 가렸다.

그리고는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는 그의 손을 뒤늦게 맞잡는다.

여자의 것과는 전혀 다른 두껍고 힘 있는 손과 슬며시 마주 잡자 등골이 찌릿찌릿했다.

“안녕하세요. 이른 아침부터 실례가 많았어요.”

“문제없습니다.”

하지만 모이어티 남작은 어엿한 마녀다.

초면에 품위 잃은 모습을 보일 만큼 허술한 예절 교육을 받지 않았다.

요즘 날씨가 어떻다느니, 저택 내의 예술품이 인상 깊다느니 하는 사교 토크를 영혼 없이 꺼냈다.

하지만 왜 자꾸 떠오르는 걸까?

견습마녀가 되기 전 무도회에서 첫눈에 반했던 고위 귀족이 떠오른다.

그땐 모이어티도 아주 어렸고, 말 한번 걸어보지 못하고 사랑의 열병에 끙끙댔었지.

마도의 길을 걷는 걸 일생의 목표로 삼은 이후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는 건 처음이었다.

“귀하의 논문을 몹시 인상 깊게 보았기에 찾아오게 되었어요. 몇 가지 의문점이 생겼는데 의견 구할 수 있을까요?”

모이어티 남작은 품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살짝 벌려 보였다.

“귀한 시간을 내주시는 만큼 사례도 준비했답니다.”

반쯤 열린 상자 안에는 비둘기 피처럼 새빨간 빛을 내뿜는 작은 루비가 있었다.

“오오.”

방금 전까지 한 점 흐드러짐 없던 위압감은 어디 갔는지 신시우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상자를 살폈다.

본디 ‘선물’의 가치를 측정하는 건 3초 내외로 재빨리 끝내는 것이 서로 간의 예의다.

다른 사람이 한참이나 보석을 바라보고 있다면 ‘뭐하자는 거지?’ 혹은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그런 말로 하지’라고 내심 언짢게 생각했을 터.

하지만 모이어티 남작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멋진 남자가 물욕에 절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마음에 드시는 것 같네요. 연금이나 원소 계열도 연구 중이신가 봐요.”

“아? 네? 네. 그렇죠.”

“보시다시피 미얀마 몽슈 산 피전즈블러드랍니다. 제가 직접 세공했고 보증서도 동봉해 두었어요.”

“혹시 금화로 환산하면 가치가 어느 정도 될까요?”

“아, 마녀가 된 지 얼마 안 되셨죠?”

이렇게 배려심 없는 모습을 보였다니!

모이어티 남작은 자책했다.

“제가 20년 전에 경매에서 사들였을 때 1,000파운드 정도 지급했어요.”

사실 직접 가격을 묻는 건 실례 중의 실례지만 뭐 어떠한가?

오히려 풋풋해 보이는 그의 태도가 신선하기까지 했다.

“좋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해볼까요?”

입을 다물지 못하고 히죽이는 그의 모습에 너무너무 뿌듯해진 모이어티 남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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