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7
1.
살롱의 하루가 꼬박 지났다.
마녀의 숫자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고, 대신 책상 위로 잉크가 말라가는 종이 뭉치가 난잡하게 흐드러졌다.
더불어 텅 비어버린 와인병과 아무렇게나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마녀도 숫자가 늘었다.
“으으으, 이게 왜 안 되는 건데?”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되는 거죠?”
“끼에에엑…!!!”
이마를 짚고 신음하는 마녀.
눈이 벌게진 채 머리를 쥐어뜯는 마녀.
속이 타는지 벌컥벌컥 와인을 들이켜는 마녀.
너무 힘을 준 나머지 펜촉을 부러뜨리는 마녀.
밤새 검증과 증명에 매달렸기에 다들 초췌한 기색이다.
우아하기로 정평 난 붉은 지붕 살롱은 고작 하룻밤 사이에 대학원처럼 변해 있었다.
새로이 등장한 이론에 찬사와 감탄을 뱉는 한편, 오기와 분함을 느낀 건 드메르 남작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엄청엄청 유용하고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았는데 정작 건전지와 설명서를 찾을 수 없어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상태.
이 많은 숫자의 마녀가 머리를 맞대고 끙끙거려도 명쾌한 해답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논문은 그 흔한 인용 한번 하지 않고 시우가 제로부터 새로이 쌓은 이론이다.
시우에겐 마녀 뉴비 시절부터 사용해 온 기초적인 마법식이라고 하나, 다른 마녀로선 독자적인 암호를 활용해 만든 코드나 다름없다.
논리적으로 이해는 가도 막상 활용하려면 필요한 부분은 쏙 빼고 말해두었으니 속이 탈 수밖에.
“아, 때려치우자.”
“저도 집에 가서 잘래요.”
“고약한 패러독스 같은 걸 거야.”
“정작 실제로 사용 가능한 지는 모른다는 거 아니에요?”
결국 불평을 내뱉는 마녀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정작 포기하는 이는 몇 없었다.
“그래도 딱 한 번만 증명할 수 있으면 되는 거잖아?”
“나도 그노시스의 알이 2개나 있는데 제대로 못 써먹고 있다고….”
“두 개나요? 간절할 만 하네요.”
다들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논문이 지닌 황금 같은 가능성을.
혁신적인 마법 이론은 무수한 응용으로 이어진다.
가령 실생활에 영 쓸모없어 보이는 상대성이론이 각종 우주 항공분야와 GPS에 응용되고, 예소드 백작의 역장 이론이 사시사철 꽃을 피우는 게헨나 실내 조경에 응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헌데 신시우의 이론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활용 여지가 무궁무진하다.
조금만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곳에 먹음직스러운 포도가 있는데 어찌 그냥 등을 돌릴 수 있겠는가?
“조금만 더.”
“이제 금방이야….”
“끼에에에에엑!”
여러 마녀가 정신줄을 놓고 있는 와중….
제머나이 저택 내에만 머무는 시우는 이런 파란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채 르뤼에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레모리 백작에게 항의하다 시우와 사이좋게 벤 당한 르뤼에.
샤론과 아멜리아가 비서고에서 자료 조사에 힘쓰는 동안 그녀의 힘을 빌리기로 한 것이다.
훈련의 목적은 붉은가지의 ‘왜곡’을 활용한 방어.
일전 스승님의 꿈에서 떠올린 방식을 현실에서도 구현하는 것이었다.
“준비되었느냐?”
“아뇨, 잠시만요.”
널따란 정원 한가운데 이면결계를 펼쳐둔 시우는 마지막으로 머릿속 공식을 정리했다.
“됐습니다.”
“짐은 힘 조절이 미숙하도다. 다치지 않게 조심하거라.”
“네네.”
“깊게 잠겨라!”
르뤼에의 발치를 시작으로 중후하게 퍼진 마력.
-쿠구구구구구궁!
아직 대낮임에도 하늘이 삽시간에 어두컴컴하게 변한다.
정원을 단숨에 해저도시로 만들어버릴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파도가 치솟은 까닭이다.
물 한 방울 없는 곳에서 저만한 파도를 소환할 수 있다는 건 르뤼에가 겉보기와 달리 23 위계의 대마녀임을 여실히 증명했다.
심지어 그냥 파도도 아니다.
압도적인 마력을 바탕으로 일궈낸 ‘파동’ 그 자체.
어지간한 마법은 통째로 삼켜버리고, 가로막는 모든 것은 산산조각내어 가라앉혀 버리는.
실로 ‘심해의 마녀’라는 이명에 걸맞은 마법인 것이다.
“피어라.”
거센 파도가 밀어낸 대기가 태풍으로 화했다.
살을 찢을 듯 흉흉하게 몰아친다.
아직 직접 파도가 오지도 않았는데 땅을 버티고 서 있기 힘든 수준.
심신이 위축되는 장면 앞에 시우는 침착하게 붉은가지로부터 왜곡장을 끌어내었다.
두개골 사이의 뇌가 확 부푸는 감각이 느껴졌다.
낙인의 도움을 받아 가속된 사고.
무수한 수식과 마법식을 이루는 활자가 정신없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이어 시우는 반죽처럼 짜낸 왜곡장을 갑옷의 표면에 얇게 도포했다.
정면에서 흘러들어오는 공격을 틀어내는 심상을 떠올린다.
마땅히 발생해야 하는 충격량조차 왜곡하여 도탄 시키는 게 이 ‘왜곡 방벽’의 핵심이다.
완성만 된다면 도로시의 절대력에 버금가는 절대 방어를 자랑하게 되리라.
-콰과과과광!
“꿱!”
그러나 막상 충격을 받고 나니 대응해야 할 변수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가속한 사고로도 따라잡지 못한 계산에 왜곡 방벽이 흐트러지고 나머지 절반 분의 충격은 죄다 갑옷에 직접 맞부딪쳤다.
-쿠구구구구….
한 차례의 해일이 스치고 지나간 정원은 풀뿌리 하나 남지 않고 파헤쳐졌다.
“꼬르르르륵….”
무릎까지 바닷물이 찰랑이는 가운데 대자로 뻗은 시우에게 르뤼에가 호다닥 다가왔다.
해초처럼 떠다니는 시우를 건져 올린 르뤼에.
“시우! 괜찮은 것이냐?!”
“헉!”
미처 감쇄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충격량에 잠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콜록! 괜찮습니다.”
“미안하도다. 다음에는 더 약하게 해보도록 하겠느니라.”
르뤼에가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막상 정면에서 상대하고 보니 머리로 알고 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어마어마한 파동으로 전신을 두들겨 맞는 감각이랄까?
르뤼에로선 이조차도 힘을 최대한 뺀 평타라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실전에선 이런 파도를 훨씬 강한 위력으로 수십 번씩 몰아친다고 들었다.
더군다나 그런 와중에 파도 안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는 초대형 사역마를 상대해야 하니 누켈라비의 위명이 괜한 것이 아니다.
“어후,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애초에 짐의 파도를 정면에서 받을 생각을 하는 얼간이가 세상 어디 있느냐?”
“훈련이니까요.”
“아무튼 힘을 좀 더 빼보도록 하겠느니라.”
“아닙니다. 방금 거랑 똑같이 해주세요.”
하지만 훈련으로는 아주 적당하다.
르뤼에의 파도는 전방위에서 덮쳐오는 파동 공격.
이 공격을 완벽하게 상쇄할 수 있다면 3차원 내에서 벌어지는 어지간한 마법은 빗겨내는 게 가능하다는 의미다.
물론 막대한 연산력과 집중력, 그리고 마력을 소모하는 관계로 장시간 유지는 힘들지만 말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막아내는 방패’의 사기성은 비앙카 전과 도로시 전을 통해 느끼고 있다.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가치는 충분하다.
“역시 전투에 활용되는 마법은 직접 해봐야 감이 잡히네요.”
“그런 것이냐?“
르뤼에가 보기엔 몸만 축내는 바보짓이었지만 은근 쇠고집인 시우다.
보이지 않게 한숨을 살짝 쉬고 다시 마법을 준비했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는 법.
시우는 밤이 깊을 때까지 배가 가득 찰 정도로 바닷물을 실컷 들이켜고 말았다.
2.
“후우….”
침대에 걸터앉은 시우는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벌써 동이 트고 있다.
“흠냐냐냐….”
슬쩍 뒤를 돌아보자 매끈한 뒤태를 자랑하며 알몸으로 잠든 르뤼에가 보인다.
땀도 듬뿍 흘렸던 터라 혹시라도 감기에 걸리지 않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연인이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책임져야 할 잠자리도 많아진다는 뜻.
훈련이 끝나자마자 르뤼에와 회포를 거하게 풀었다.
헥센나흐트에서 돌아온 이후 재회 섹스를 하지 못한 르뤼에와 간만에 뜨거운 밤을 보낸 것이다.
“침대에선 내가 최강이다.”
아무리 르뤼에가 대단한 마녀라도 침대에 오른 시우를 이겨낼 순 없었다.
오늘 훈련 내내 바닷물을 먹었던 만큼 르뤼에의 배에도 가득 정액을 리필해 주었다.
평소 오만하고 콧대 높은 여왕님 르뤼에가 침대에만 오르면 순하디순한 공주님이 되는 갭은 언제봐도 귀여운 것이었다.
오늘도 진득하게 겨드랑이를 핥으며 덮치자 아주 자지러졌지.
“요 앙칼진 것.”
3번의 입싸와 1번의 질내사정을 했음에도 회상과 함께 풀발기 상태가 되어버린 자지가 르뤼에의 타고난 꼴림력을 증명해 주었다.
“우으음, 시우?”
한번 더 어떻게 할까 말까? 하는 시선이 너무 강렬했던지 르뤼에가 눈을 부비적거리며 일어났다.
“물 드실래요?”
“괜찮도다…가 아니다! 이미 그대가 억지로 너무 많이 먹이지 않았느냐.”
“억지라뇨, 저희 합의했잖아요.”
“합의? 지금 합의라 하였더냐? 앗…!”
르뤼에는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이 알몸임을 깨닫고 재빨리 이불로 몸을 가렸다.
입술을 쭉 내밀고 투덜거리듯 항의하는 르뤼에.
“…짐이 계속 가고 있는데 몰아붙이듯 입에 싸지 않았더냐? 심지어 그 맛 없는 걸 삼키라고까지 강요했다!”
“그랬죠.”
“그건 반칙이니라! 현명한 짐이라도 그 상태에선 그대의 부탁을 거부할 수 없단 말이다!”
그러면서도 시우에게 몸을 붙여오는 것이 진짜 화난 건 아니고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아닌게 아니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기가 젖을 빠는 것처럼 자지에 매달려 시우 특제 아기즙 밀크를 쪼옥쪼옥 빨았으니 말이다.
“이것도 얼마 남지 않았느니라. 짐은 매일매일 성관계에 익숙해지고 있도다. 짐의 정력이 그대를 넘어서는 순간 그간의 수모를 모두 갚아주겠느니라.”
그리고 그런 풋풋한 반응으로는 점점 능글맞아지는 시우를 이길 수 없다.
“그러면 그 전에 많이 혼쭐을 내드려야겠네요.”
“앗!”
르뤼에의 가슴을 와락 움켜쥐자 다시금 흩어지는 여왕님의 위세.
시우의 다리 사이로 시선을 옮긴 르뤼에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그토록 해놓고도…. 짐이 남자가 아닌 수컷을 국서로 들였도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시우의 손을 치우려는 시도조차 없다.
그간의 그리움을 몸에 대화로 풀기엔 하룻밤으로는 턱도 없는 것이다.
“이번에도 입에 싸게 해달라고 부탁할게요.”
“흥…! 이번엔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라! 그대는 오늘 침대 위의 여왕을 목도할 것이니라!”
저항하는척 여왕의 품위를 내보이는 르뤼에를 반쯤 강제로 눕히고, 어디서부터 손질할지 입맛을 싹 다시는 순간이었다.
-딸랑 딸랑
초인종이 울렸다.
일반적으론 노크로 대체하지만, 시우의 방에 함부로 들어왔다간 민망한 꼴을 볼 수 있는 까닭에 설치한 것이다.
이 이른 아침부터 누구지?
“시우, 무시해도 좋다! 부부관계보다 중요한 손님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행여나 다른 연인이 끼어들까 봐 견제를 놓는 르뤼에를 다독였다.
보통 이런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연인 중 하나고,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꽤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기에 대충 가운만 걸치고 방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네요.”
문 앞에는 시우가 가장 어려워하는 상대가 서 있었다.
맵시 좋은 드레스를 입은 큰 장모님이다.
“알비레오 님? 어쩐 일이신가요?”
게다가 타이밍이 다른 연인과 질펀한 관계를 맺고 또 한 번 더 맺으려고 하는 순간.
눈치 빠른 큰 장모님이라면 시우가 자다 일어난 게 아니란 것쯤은 금세 눈치챌 터인데….
노심초사하는 시우 앞에 알비레오는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시우 군, 손님이 왔어요.”
“손님이요?”
“매일 여자친구만 늘려오길래 괘씸했는데 이번 기회로 다시 봤네요.”
“네?”
예상대로 눈치를 챈듯하지만 뜻밖에 책망하는 기색은 하나도 없고, 아주 흐뭇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