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836화 (836/917)

#836

1.

아르스 마그나 타운의 ‘첫 번째 붉은 지붕 살롱’.

괜스레 긴 이름 때문에 붉은 살롱, 혹은 살롱 등으로 대체되어 불리는 이 장소는 돈 많고 시간 많은 고위 마녀들의 친목 도모 커뮤니티다.

친목 종목 중 하나로 ‘누가누가 더 아름답게 꾸몄는가?’를 겨루는 것이 일상인 살롱이지만 오늘만큼은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살롱 곳곳에서 지적인 토론과 흥분에 찬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마녀들의 손에 우아한 부채 대신 두툼한 학술지가 들려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곳의 아가씨들은 본질적으론 마법의 궁극을 탐구하는 ‘마녀’들이니 말이다.

오후 4시.

주인공은 늦게 등장한다는 신조에 맞춰 살롱의 피크 타임에 느지막이 등장한 드메르 남작 주위로 그녀의 추종자들이 모여들었다.

“드메르 남작, 이번 아카데미 학술지 보셨나요?”

“그럼요, 아…. 그래서 오늘따라 사람이 이렇게 많았던 거군요?”

“네네, 그 유명한 남자 마녀가 논문을 등재했어요!”

“그런가요?”

교양 넘치는 미소와 온화한 말투로 응수하긴 했으나 드메르 남작의 속내는 다소 심드렁했다.

어찌나 소문이 떠들썩한지 기상하자마자 시녀에게 해당 소문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엔 놀랐으나 곱씹어 보면 시시한 이야기다.

분명 아카데미 학술지가 게헨나 3대 학술지인 건 맞다.

아직도 권위와 효용이 인정되며 마녀들이 발행일마다 꼭 챙겨보기도 하니.

“아직 안 읽어 보셨군요?”

“네, 읽지 않았어요.”

“아하.”

드메르 남작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추종자 중 하나가 애매한 미소를 띠었다.

기 싸움과 눈치 싸움이 일상인 살롱이다.

교양으로 포장된 불쾌감을 읽어내는 건 손금보듯 해야 하는 게 소양이다.

“남자 마녀, 이름이 신시우였던가요? 그는 티페레트 공작의 제자이잖아요. 더불어 제머나이 백작가의 데릴 사위고, 예소드 백작가의 귀한 손님이죠.”

“그렇죠.”

“마녀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권력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신성한 배움의 터전에서 알량한 입김을 허가하다니. 이름 높던 트리니티 아카데미도 전 같지 않네요.”

드메르가 느끼는 언짢음의 근원도 여기에 있었다.

“아무래도 제머나이 백작은 데릴 사위의 명패를 반짝이게 하고 싶은 모양이에요.”

“그, 저….”

전부터 제머나이 백작과 드메르 남작 사이에 신경전을 알고 있는 추종자들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때 구름 같은 마녀 무리를 제치고 누군가 등장했다.

검은 드레스로 몸을 휘감은 살롱의 유명인사, 알비레오 백작이었다.

뒷담 현장을 적발했음에도 싱긋거리는 미소다.

“드메르 남작, 그 발언은 설마 제가 뒷돈이라도 찔러 넣었다는 이야긴가요?”

“설마요. 하지만 제머나이 백작가가 여러 방면에서 유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뿐이죠.”

교묘하게 비꼬는 드메르 남작도 꽃 같은 웃음으로 응수했다.

제머나이 백작가라면 꼭 뒷돈이 아니라도 충분히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가시가 숨겨져 있었다.

“직접 읽어보지도 않으셨다면서 험담을 늘어놓는다니. 근래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드메르 남작답지 않네요.”

“그건 실례했어요. 예전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인지라.”

알비레오는 두꺼운 책 한 권에 가까운 학술지를 꺼내 들었다.

입 아프게 말해 무엇하랴? 직접 읽어 보라는 의미다.

“시간 낭비가 아니길 빌죠.”

“그럼요.”

드메르 남작은 자리에 앉아 학술지를 펼쳐 들고 남자 마녀가 작성했던 부분부터 읽기 시작했다.

“흥.”

거창한 제목에 코웃음부터 치고 보는 드메르 남작.

사실 그녀가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시우 주변의 인물들이야 시우가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인물인지 알고 있다.

최소 대마녀 이상의 격과 다양한 전투 경험을 갖춘 게 확실하지 않은가?

하지만 일반적인 마녀는 신시우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었다.

기껏해야 서울 코엑스 겁난에 휘말렸다느니, 탐욕의 마녀와 대적해 살아왔다느니, 헥센나흐트에 잡혀가 탈출했다느니….

당최 능력을 가늠할 수 없는 뜬구름 잡는 소문만 횡행할 뿐이다.

이는 두 백작가와 티페레트 공작이 합심해 정보를 통제한 까닭이었다.

그런 고로 진상을 모르는 마녀에게 신시우는 ‘악운에 강한’ ‘남자라는 특수성 때문에 관심을 받는’ ‘인맥이 좀 뛰어난' ‘얼치기 마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물며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학자로서의 기량은 그 누구도 높게 쳐주지 않았다.

“…….”

그러나 희미한 경멸의 색조마저 띄던 드메르 남작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려간다.

변변한 심사조차 받지 않은, 끽해야 조잡하게 구색만 갖춘 유사 논문일 게 뻔했다.

아니, 그래야 했다.

그러나 참신하고도 임펙트 있는 주장이, 몇 번을 반복해 읽어도 단박에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술식이 화려하게 학술지 위를 수놓고 있다.

물론 학술지에 등재되어야 하는 관계로 몹시도 축약된 내용이고 그렇기에 해설도 불친절하다.

여기 기재된 내용으로는 그가 제시하는 이론이 참인지 거짓인지 완전히 증빙할 수 없었다.

하지만 드메르 남작은 정통성 있는 대마녀다.

몽상가의 허황된 망상과 깊이 있는 식견에서 비롯한 전문성 있는 가설 정도는 금세 구별 가능하다.

드메르 남작은 주위의 분위기를 다시 살폈다.

처음 살롱에 입장했을 때.

사방에서 들려오는 술렁임의 정체가 얼토당토않은 논문을 게재한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대한 비웃음, 더 나아가선 악수를 강행한 제머나이 백작가에 대한 뒷이야기 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주위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이게 정말 이런 식으로 된단 말이야?”

“저도 해봤는데 증명은 못 하겠어요.”

“이걸 일개 남자 마녀가 적었다고…?”

“그것도 마녀가 된 지 10년도 안 됐어요.”

“사실은 검증할 수 없는 거 아니야? 뒤에 부분은 단순한 말장난인 거고.”

마녀들은 하나 같이 같은 주제에 떠들고 있었다.

근 반백년 간 가장 우수하고 혁신적인 논문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예소드 백작의 ‘역장 이론’.

그게 처음 공개 됐을 때만큼이나 커다란 술렁임.

마녀 사회의 최정상에 위치한 드메르 남작조차 감탄이 절로 나온 논문이다.

새로운 깨달음을 제시하는 동남풍 앞에 너도나도 돛을 펼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

이해하지 않는 부분에 관해서는 토론하고, 깨달음 앞에 감탄하며, 새로운 영감에 몰두한다.

또한 입을 모아 신시우에 대한 칭송을 늘어놓는다.

“정말 대단하네요….”

“전에 호스트바에서 봤는데 얼굴도 엄청 잘생겼어. 매너 있고 유머러스하고.”

“분하네요, 제가 그렇게 어릴 땐 10년 동안 스무 번 넘게 반려 당했는데….”

“재능충 죽어.”

얄미운 알비레오 백작이 씨익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득의양양해 보였다.

“어때요? 우리 사위 능력 좋죠?”

마음 같아서는 ‘고작 이 정도로요?’라고 반박하고 싶고 당장 학술지를 덮어둔 채 여유를 과시하고 싶다.

하지만 드메르 남작 역시 마녀다.

앎의 지평을 넓혀주는 새로운 지식을 두고 눈을 뗄 수 없었다.

시기 질투를 감추지 못하고 혀를 찬 드메르는 알비레오의 이죽거림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논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시우의 논문은 혁신적인 만큼이나 극악의 난해함을 자랑해 드메르 남작조차 단번에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반발통제모형의 핵심이론인 ‘위상일치’에 대한 증명이 명확하게 검증되어있지 않았다.

해당 이론에 대한 증명이야말로 이 모든 연구자료를 정상 구동하게 하는 크랭크축이나 다름없다.

그것만 증명된다면 분명 얼마 전 얻었던 그노시스의 알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뭐야! 장난해?”

그런 기대감에 부풀었던 드메르 남작이 테이블을 내려쳤다.

이 순간만큼은 남작으로서의 기품도 교양도 잠시 잊고 말았다.

드메르 남작보다 먼저 논문을 살폈던 마녀들은 예상대로라는 듯 작은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드메르 남작에겐 주위를 신경 쓸 여력이 남지 않았다.

“이에 대해 놀라운 증명법을 발견했으나, 분량이 부족해 적지 않는다…?”

논문의 골자를 완성해 줄 최종 증명이 이따구로 끊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첫 학술지 논문을 기재하는 풋내기라고는 믿기지 않을 시건방진 태도.

가장 분한 건 그 태도에 분함이 아닌 호기심과 애탐을 느끼는 자기 자신이다.

왜, 왜, 왜 다 알려주지 않은 걸까?

몸이 달아오른다.

당장에라도 만나서 심도 있는 토론을 하며 그의 의견을 듣고 싶다.

“저희 사위가 장난기가 좀 많아서요.”

옆에서 고개를 들이민 알비레오가 이죽거렸다.

드메르 남작은 들으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설마 제가 이 정도도 못해 낼까 봐요? 한번 증명해볼게요.”

드메르 남작은 종이와 만년필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지금 살롱에 모인 다른 마녀가 그렇듯 신시우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2.

“소피아 님, 이거 이래도 되나요?”

논문 등재 하루 전.

소피아로부터 마지막 검수본을 받은 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이거 빼면 활용 못 할 텐데. 증명도 힘들고요.”

소피아의 검수본엔 자성마법 결합의 핵심인 ‘위상일치’에 관한 증명이 쏙 빠져있었다.

기껏 논리적 결락을 피드백해주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사유랍시고 내놓는 말이 ‘분량이 부족해 적지 않는다’라니.

5쪽만 더 추가하면 될 일 아닌가?

천재 코스프레를 하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소피아는 씨익 웃었다.

“논문에도 쇼맨십을 필요해. 많은 관심은 더 많은 명예와 관심을 부르거든.”

“명예는 둘째치고 관심은 그만 받아도 될 것 같은데요.”

비서고 하나 때문에 시작한 일인데 괜한 짓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런 논문을 수십 편은 써보았을 소피아 수석교수의 첨삭에 딴소리하는 것도 그렇고….

“당연히 돈도 들어오고.”

“돈이요?”

“이런 논문이라면 다들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서 난리가 날 걸? 근사한 선물을 들고 오는 고객도 많을 거야. 그걸 전부 다 무료로 풀어버리기엔 너무 아깝잖아?

기본적인 내용은 오픈 소스로 공개하되 핵심은 대가를 받고 가르침을 준다. 이것도 마녀가 연구비를 버는 방식이거든.”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돈은 항상 필요하다.

아직 큰 장모님께 빌린 기부금도 다 갚지 못했고, 또 앞으로도 빌붙어서만 살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

소피아가 지혜롭게 안배해 주었겠거니 싶었다.

“뭐, 소피아 님 말씀이 맞겠죠.”

시우는 대수롭지 않게 소피아의 검수본에 최종 동의 사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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