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834화 (834/917)

#834

1.

“어느 근본 없는 도시가 일국의 여왕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느냐. 이건 말이 안 된다! 하물며 짐의 국서까지 마녀가 되다 만 반푼이로 취급하다니. 이 굴욕은 결단코 잊지 않을 것이니라!”

르뤼에는 뺨이 퉁퉁 불어 있었다.

쾅쾅 발을 구를 때마다 마력이 일렁이는 것이 퍽 분한 모양이다.

불과 5분 전에 르뤼에는 시우와 사이좋게 입구컷을 당했으니 말이다.

르뤼에는 위의 말과 거의 비슷한 대사를 내뱉으며 메티스의 결정에 항변했다.

문제가 있다면 그 항의 방식이 진상 민원인 수준으로 오만불손했다는 것이다.

샤론이 말려봐야 별 의미 없었다.

‘그런가요? 어쩔 수 없네요.’

르뤼에의 횡포에도 메티스는 화를 내거나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대신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르뤼에의 기부금을 반환, 이어 르뤼에의 열람 자격마저 회수했다.

결국 시우와 나란히 비서고 밖으로 쫓겨난 것이다.

“시우, 짐이 누구더냐?”

“위대하신 누켈라비 왕조의 적통 후계자 르뤼에 누켈라비 님이시죠.”

“그렇다. 그러니 짐에게 한마디만 부탁하거라. 저 시건방진 꼬불머리 마녀를 도서관 채로 수장시켜주겠느니라.”

“절 봐서라도 참아주세요.”

“으으으!!! 빨리 부탁해라!”

르위에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더니 제풀에 지쳤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미안하도다. 짐도 도움이 되고 싶었거늘….”

“아닙니다. 어떤 마음으로 그러셨는지 아니까요.”

르뤼에의 등을 토닥이며 진정시키는 한편, 온화한 샤론도 옆에서 씩씩대고 있었다.

“뭐 저런 규칙이 다 있어? 시우가 얼마나 대단한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진짜 백작님들은 다 대단한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네!”

“넌 왜 그렇게 화났어?”

“당연히 화나지! 널 마녀로도 인정하지 않는다잖아!”

무슨 의미인지는 안다.

마녀 사회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은 ‘마녀’.

그 외의 인간은 아무리 훌륭하다 한들 눈 아래로 본다.

고지식한 정통파 마녀 중에는 대화를 나눌 상대로도 인정하지 않을 만큼 백안시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이다.

샤론에겐 눈앞에서 남자친구가 인종차별을 당한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민원 쓸 거야! 시청에 넣으면 되나? 내가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거 아니야?”

참고로 게헨나 시청은 그다지 힘이 없다.

비서고의 운영 기금 역시 기부금으로 충당된다.

“짜증 나! 완전 앞뒤 꽉 막혀가지곤.... 시우야 우리 저런 데는 가지도 말자!”

어지간해서는 화내는 일이 없는 샤론이 씩씩댈 때마다 아멜리아의 어깨가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메티스 백작의 모습이 썩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 아멜리아는 저렇게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고, 마녀 우월주의인 모습으로 시우를 못살게 굴었던 전적이 있으니 말이다.

원래도 조용한 아멜리아기에 그녀의 위축을 눈치채지 못한 시우는 잔뜩 화가 난 르뤼에와 샤론을 다독였다.

“괜찮아, 어차피 같이 가려고 했던 것도 내일인데 나만 쏙 빠지기 눈치 보여서 그런 거였고.”

“그래도….”

“정말 괜찮다니까. 뭐, 다른 방법이라도 찾아볼게.”

아까는 그레모리 백작이 풍기는 답답함에 자연스럽게 ‘꼰대’를 떠올리고 말았지만 그녀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시우는 실제로 비서고에 이바지한 게 없다.

기부할 돈도 없다.

남의 힘을 빌려 슬쩍 숟가락 얹으려는 모습이 자긍심 높은 그레모리 백작에겐 마땅찮게 보였을 수도 있다.

다만 궁금한 점은 있었다.

“아멜리아 님.”

“네, 시우.”

묘하게 침울한 목소리로 답하는 아멜리아.

“사서장 권한이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네, 비서고 장서 절반 분은 대대로 ‘궁서(弓書)의 마녀’, 그레모리 백작가가 모아온 것이니까요.

마녀의 발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비서고를 개방한 것도 메티스 그레모리 백작이어서…. 소유권을 두 학회에 넘기긴 했어도 여전히 많은 권한을 인정받고 있어요.”

“그렇군요….”

이렇게 된 이상 선택지는 두 개다.

하나는 깔끔하게 입장을 포기하고 샤론과 아멜리아에게 비서고 조사를 맡기는 것.

그동안 시우는 스펙 업과 연구에만 몰두하면 된다.

다른 하나는 논문을 제출해 보는 것이다.

어려울 것도 없다.

단지 제출하지 않았을 뿐이지 지금까지 쌓아둔 연구자료가 제법 양이 되지 않은가?

조금만 가다듬어서 제출한다면 비서고 출입자격을 얻을지도 모르니 해봐서 나쁠 건 없다.

이 김에 마법의 전반적인 토대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거다.

“일단 아멜리아 님이랑 샤론에게 비서고는 부탁할게요.”

“시우는요?”

“저는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잠깐 가보겠습니다.”

간만에 학자로서의 학구열이 불타올랐다.

2.

학문의 꽃 논문.

마법 또한 학문이기에 마법 연구의 정점은 논문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 눈치 빠른 사람은 이런 의문을 떠올릴 것이다.

‘뭐야? 마녀는 제각기 자성마법을 연구한다며? 다른 마녀가 쓴 논문이 필요나 있어?’

한편으로는 지당한 말이다.

자성(自成)마법은 문자 그대로 스스로 이루어 가는 고유한 마법이다.

대와 대를 걸쳐 이어진 그 마법은 타인이 간섭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설령 20 위계의 대마녀가 15위계 마녀의 자성마법을 본다 해도 대부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마녀 간 지식공유는 유용하다.

많은 마녀의 자성마법 연구 현황을 한 장의 그림으로 나타내자면 성게의 형태가 된다.

하나의 구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가시가 서로 다른 길이와 방향으로 뾰족뾰족하게 치솟은 모양새 말이다.

‘가시’ 하나가 독립된 마녀의 성취라면 가시가 양분 삼는 기반 지식이 ‘구’이다.

논문의 공유는 ‘구’의 크기를 키운다.

공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마법에 대한 접근법, 영감, 공식 따위가 풍부해진다는 것이다.

조악한 비유다만 ‘자연과학’이 발전할수록 천문학, 건축학, 생명공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응용과학에서 약진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뭐, 아무튼. 이거면 되겠지?”

따라서 제머나이 저택의 연구실을 들른 시우는 보편적으로 활용도가 높을 것 같은 연구 자료를 하나 꺼냈다.

분야마다 논문의 길이는 몇 페이지에서 책 한 권 분량까지 다양하지만 마법의 경우 유독 두껍다.

시우가 고른 연구 자료도 A4 분량으론 400페이지에 가까웠다.

조금만 가다듬은 다음 제목만 라노벨처럼 그럴듯하게 지으면 된다.

“그러면 일단….”

시우는 곧장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소피아 아베느가를 찾았다.

논문하면 역시 교수 아닌가?

논문이라면 써본 경험이 있다지만 마녀의 논문을 위해선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좋을 것이다.

소피아 아베느가는 수석교수인데다가 대마녀이니 도움받기엔 적격이다.

“여기도 거의 안 변했네.”

간만에 찾았지만 옛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 아카데미 복도.

항상 드는 생각인데 전역 이후 군부대를 방문하는 기분이다.

울고 웃었던 기억도 새록새록, 저 나무는 어떻게 가지치기했었는데, 저 배수로는 어떻게 팠었는데 따위의 기억을 곱씹자니 금방 연구동까지 도착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들어와.”

길이 엇갈리면 어쩌나 싶었는데 운 좋게 노크와 동시에 답변이 돌아왔다.

하긴 대다수의 마녀는 하루 대부분을 연구로 보내니 이상할 것 없다.

문을 열자 보랏빛 찰랑이는 머리카락의 거유 누님, 아멜리아의 절친, 노예 시절 시우를 도와주곤 했던 소피아의 모습이 보였다.

“이게 어쩐 일이야? 그 동안 잘 지냈어? 라고 묻기엔 너무너무 사건에 많이 휘말리네.”

소피아는 반가움 가득한 표정으로 시우를 반겼다.

오랜만에 봐도 작은 거동만으로 공격적으로 출렁이는 바스트는 여전하다.

“도움을 받고 싶은 일이 생겨서요.”

시우의 답변에 소피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이 꼭 눈치만 보고 앉아있다가 마침내 제 할 일을 찾은 인턴 같다.

“이날 만을 기다렸어. 우선 앉을래? 커피, 홍차 어느 쪽이 좋아?”

“아, 홍차로 부탁드려요.”

소피아는 시우에게 빚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피아가 일방적으로 부채의식을 지닌 거지만 말이다.

아멜리아와 시우의 악연이 시작된 계기가 소피아다.

하지만 그녀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관계도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시우가 노예 시절 때 은근히 살뜰하게 챙겨주었던 그녀다.

옛일에 연연하지 않는 시우로서는 딱히 ‘보상을 받아야겠다!’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여기, 제일 좋은 찻잎을 우렸어. 혹시 밀크티가 좋아?”

“네? 아닙니다.”

주섬주섬 옷자락을 풀어헤치길래 식겁해서 말렸다.

무슨 우유를 넣어주겠다는 건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언뜻 농담처럼 보이지만 그녀 나름의 미안함의 표시이리라.

“여전히 짓궂으시네요.”

“나는 갚을 수 없는 빚을 몸으로라도 갚으려 했을 뿐인걸.”

“빚이라고 생각 안 해요. 그리고 아멜리아 님이 무척 화내실걸요?”

“그건 그러네.”

소피아는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그래서 나한테 부탁하고 싶은 일이 뭔데? 뭐든 편히 말해. 최선을 다할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소피아에게 시우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비서고에서 메티스를 만나 입구컷을 당한 일.

그래서 당당하게 열람 권한을 얻기 위해 논문을 제출하려 한다는 것.

하지만 자료를 몇 번 읽어본 적은 있어도 형식과 규격에 맞춘 마법 논문을 써본 적은 없기에 소피아의 도움을 받고 싶다는 것.

“좋은 논문을 비서고에 제출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하, 그런 도움이구나? 잘 찾아왔네.”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보였던 조금 전과 달리 조금은 난처한 기색이 엿보였다.

“어려운 일인가요?”

“음….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운 일인데 난도의 평균치를 놓자면 어려운 쪽에 속하지.”

“어떤 면에서요?”

소피아는 애교스러운 몸동작으로 입가를 어루만지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비서고에 들어갈 만한 기여사항, 그 커트라인을 넘기느냐가 문제야. 엄격한 평가제거든.”

“그게 어려운 건가요?”

“혁신적이고 센세이션을 일으킬만한 논문이라면 한 편짜리로도 열람권한이 부여돼. 그런데 보통은 힘드니까 양으로 밀어붙이지.”

“대충 얼마나요?”

“아주아주 일반적인 경우엔 으음, 100편 200편가량?”

“오우….”

자신감이 팍 줄었다.

100~200편의 논문이 말도 안 되는 숫자 같긴 하겠지만 대와 대를 잇는 마녀에게는 크게 문제가 될 게 없다.

가령 선대가 50편, 선대의 선대가 50편 이런 식으로 같은 ‘마녀명’을 지니고 있다면 기여내역으로 인정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시우는 풋내기 마녀다.

논문을 제출해 둔 스승은 당연히 없고, 여태 연구한 내역을 대강 정리해도 20편 내외다.

절대적인 시간도 문제였다.

가뜩이나 할 게 많은데 논문 집필에만 매달리기엔 리턴에 비해 코스트가 너무 높다.

그렇다고 단 한편으로 열람 권한이 인정될 만큼 기깔난 논문을 쓸 자신이 있냐?

그것도 아니다.

“역시 포기해야겠네요. 홍차 잘 마셨습니다.”

조금 아쉽지만 놓을 건 놓아줘야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보여주기나 해봐.”

“그럴까요?”

“응, 혹시 모르잖아?”

저렇게까지 도와주려는데 ‘시간 낭비인 것 같아서 이만….’이라고 하기도 뭐하다.

시우는 거창하게 제목을 휘갈긴 초본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상이한 자성마법 간 결합: 위상 일치를 활용한 반발통제모형에 대한 논의. 제목 잘 지었네.”

소피아의 긴 손가락이 논문의 첫 장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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