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833화 (833/917)

#833

1.

어딘가 불길한 예언을 보나 케테르의 뒷수작이 훑고 간 몸 상태를 보나, 해결법이 모호한 정체불명의 상황에 빠진 시우다.

케테르 공작의 상아탑은 여전히 외부인에게 굳게 닫혀 있었고 현 상태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건 크게 두 가지였다.

가장 먼저 시우 자신이 강해져야 했다.

영혼의 마녀, 그레텔의 의견에 따르면 무의식이 표층의식을 잠식하는 건 무의식의 마법이 시우의 것보다 월등히 강력해 졌을 때.

그걸 방지하기 위해선 시우 본인의 힘을 키워야 했다.

어떤 미래가 와도 자력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스펙업을 노릴 필요가 있었고 말이다.

통상 21 위계쯤 되는 전투력을 지니면 어디서 맞아 죽을 걱정은 거의 없겠으나 시우는 일반적인 마녀가 아닌 게 문제다.

둘째로는 현 상황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명확한 데이터 없이 추측만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최대한 많은 정보와 마법을 조사해 보는 게 주요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시우의 이상 상태를 근원적으로 치유할 방도를 찾을지도 모르고, 역사서를 뒤적이다 보면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인물을 발견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아멜리아, 시우, 샤론, 르뤼에 이 4인방이 아르스 마그나 타운의 비서고(祕書庫)로 향한 이유도 더 많은 양질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이 비서고, 풀네임 ‘발렌티누스 비서고’가 무엇이냐?

게헨나의 최대 학파인 진리진명 학술회와 그와 비슷한 규모의 에메랄드 타블렛이 공동소유 중인 거대한 도서관이다.

각 학회에서 해마다 쏟아지는 양질의 마법서 및 논문 복사본이 모두 이곳에 저장된다.

게헨나 이전에 전해져오는 희귀 장서나 금단의 도서 따위도 말이다.

시우가 노예시절 담당했던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도서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고유한 자료들이 방대하게 모인, 한 마디로 마녀의 아카이브인 것이다.

소문만 듣다가 직접 본 비서고의 외관은 로마의 랜드마크인 ‘판테온’과 닮은 돔형 건축물이었다.

돌출된 전면부가 파르테온 신전을 연상케 하는 점도 비슷하다.

“예상보다 큰데요?”

“오오, 벙커처럼 생겼도다. 제법 구색을 갖춰 지어두었느니라.”

아직 내부까지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감탄이 절로 나온다.

칭찬에 인색한 르뤼에도 호평을 아끼지 않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하긴 예전부터 게헨나가 건물 하난 기똥차게 짓기는 했다.

“안은 더 넓어요.”

“아멜리아 님도 오신 적 있으세요?”

“네, 한 두 번 정도요.”

“샤론 너는?”

“나도 자주 와봤어.”

이 비서고는 게헨나 시민이라 해서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논문 발표나 장서 기증, 운영기금기부 등의 기여 내역이 없다면 열람이 제한된다.

독고다이 성향이 많은 마녀가 학회에 속하는 이유 역시 기여 내역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메리골드’와 ‘에버그린’ 모두 비서고 출입이 자유로울 만큼 업적을 쌓아두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전 남작이고 샤론 역시 유서 깊은 원소계통의 대마녀이니 당연했다.

얼마 전 시민이 된 르뤼에는 막대한 유산을 바탕으로 돈찍누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5년 치 운영기금을 기부함에 따라 출입허가증을 받아낸 것이다.

“시우, 이쪽이에요.”

가까이서 보니 더욱 장엄하고 아름다운 현관부를 지나자 내부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와….”

“오오오…!”

시우와 르뤼에는 예상보다 수 배는 널따란 비서고의 풍경에 넋을 놓았다.

외관만으로 아주 넓다 싶었는데 내부는 지맥을 활용한 공간굴절 마법이 걸려 있었다.

길이만 100M요, 폭은 마차 두 대가 거뜬히 지나갈 법한 대형 홀.

오크통을 반으로 자른듯한 둥근 목제 천장이 갤러리를 따라 길게 이어진다.

일자로 쭉 뻗은 갤러리를 줄기 삼아 일정한 간격으로 책장 늘어서 있는데 책장의 높이가 천장까지 닿아서 흡사 기둥 자체를 책장으로 쓰는 듯했다.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를 뒤집어 놓는다면 대충 이런 실내 풍경일 듯 싶었다.

책장 하나하나가 고풍스러운 책으로 꽉꽉 채워져 있기에 노예 시절 이곳의 관리인이었다면 청소하다가 늙어 죽었을 것이다.

“이, 이게 다 마법 관련 서적인 건가?”

“역사 서적도 있어.”

“마녀는 책도 논문도 많이 집필하거든요.”

“그건 알고 있었는데….”

다양한 교수들을 옆에서 지켜봤던 시우는 알고 있었다.

마법에 인생을 베팅한 마녀답게, 그들은 평균적으로 한 해에 백과사전 두께에 달하는 학술서를 5권 정도 집필한다.

소논문까지 합치면 더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그 결과물들이 이렇게 모여있는 걸 보니 마녀란 존재가 얼마나 마법에 진심인지 재차 확인한 것 같았다.

“이 많은 자료 중에 필요한 걸 어찌 찾겠느냐?”

“르뤼에, 이쪽으로 와볼래?”

책더미에 파묻혀 허우적거리는 상상을 한 르뤼에가 살짝 질색한 가운데 샤론이 그녀의 팔을 이끌었다.

뜻밖에 샤론의 말을 잘 따르는 르뤼에답게 쫄레쫄레 그녀의 뒤를 쫓는 르뤼에.

“비서고의 자료는 모두 검색이 쉽게 색인기능이 있어. 여기 크리스탈에서 필요한 책의 태그를 검색할 수도 있고…. 이렇게 하면 참고문헌에 담긴 관련 자료도 확인할 수 있어”

“오호….”

게헨나식 신문물에 르뤼에가 눈을 반짝이던 그때.

옆 통수에서 별안간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머나.”

너무 조용히 다가와 깜짝 놀랐다.

눈을 돌리자 긴 금발을 유럽 공주님 풍으로 세팅한 마녀가 커다란 책을 품에 안고 서 있었다.

아멜리아보다 밝은 계통의 금발을 어찌나 꼬불꼬불 잘 말아두었는지 손질에만 족히 2시간 정도는 투자해야 할 것 같았다.

복장은 고지식할 정도의 마녀 정복(正服).

소매를 금실로 수놓은 것 외에는 멋 부린 구석조차 없다.

무테 안경 너머로도 이지적인 날카로움을 풍기는 녹안은 이 마녀가 어떤 성향인지 단박에 알게 해주었다.

“오랜만이네요, 메리골드.”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는 아멜리아와 다르게 시우는 몹시 놀랐다.

이 정도 거리가 된다면 굳이 안대를 벗지 않아도 상대의 기량을 가늠하는 게 가능하다.

의도적으로 숨기지 않는 이상 대마녀의 마력이 지니는 역장은 외부로도 티가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다가온 이 마녀는 얌전한 생김새와 달리 무서울 정도로 정련된 마력을 숨기고 있다.

“그레모리 백작, 그간 별일 없었나요?”

“저야 여느 때와 같죠. 메리골드 양이야말로 최근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으셨다고.”

“잘 수습했어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백작…?”

코하브, 예소드, 제머나이, 아도나이와 같은 게헨나에 일곱밖에 없는 백작 중 하나.

그 위계는 무려 23위계.

신기하긴 한데 강한 마녀만 보면 긴장되는 시우로선 괜히 눈치가 보였다.

“초면인 분이 많네요. 저는 메티스 그레고리. 발렌티누스 비서고의 사서장이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신시우입니다.”

“이름은 들어봤어요. 이대로 나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중한 인사와 동시에 칼 같은 퇴거를 요청하는 메티스.

시우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어 아멜리아와 샤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멜리아도 샤론도 퍽 당황한 눈치다.

“그레모리 백작, 그는 예소드 백작과 제머나이 백작에게 추천장을 받았어요.”

“그런가요? 하지만 비서고의 관리 전권은 그레모리 백작가에 있어요. 추천장을 거부할 권한도 있다는 의미죠.”

그제야 일행은 메티스가 얼굴을 드러낸 게 호의적인 이유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거부하는 건 오직 신시우 씨의 열람이에요. 다른 일행분들은 기꺼이 환영할게요.”

“어이, 그레고리 백작이라 하였느냐?”

“르뤼에! 일단 가만히 있어 봐!”

뜬금없이 등장해 시우를 쫓아내려는 메티스에게 성큼성큼 걸어가는 르뤼에.

르뤼에가 사고 치기 전에 필사적으로 만류하는 샤론.

시우는 침착하게 물었다.

“어째서인가요?”

차라리 접점이라도 있다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우와 메티스는 오늘이 초대면이다.

아무런 타산도 악의도 없는 얼굴로 문전박대할 사이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유라도 알고 싶습니다.”

시우는 어지간한 마녀는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는 독특한 연구소재.

혹시 이 입구컷이 흥정을 위한 소재라면 미련 없이 등을 돌릴 계획이었다.

연인들에게만 일을 맡겨두는 것도 미안하긴 하지만 시우는 시우대로 할 일이 많다.

억지에 어울려주면서까지 비서고에 출입할 이유는 없다.

“비서고의 규정에 어긋나기 때문이에요.”

메티스는 미안하다는 기색도 없이 덤덤히 말했다.

그녀의 대답을 듣자마자 시우는 메티스의 등장과 동시에 느꼈던 막막함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건 비단 정련된 마력에서 오는 압박감이 아니었다.

“일정한 요건만 갖추면 열람이 가능한 거 아니었나요?”

“신시우 씨, 비서고는 비단 책이 모여 있는 장소가 아니에요. 현역 마녀와 선대, 그 선대의 선대에 이르러 우러러보아 마땅한 유서깊은 유산이 잠든 지혜의 방주입니다.

일정한 자격을 갖춘 마녀에게는 마땅히 개방되어야 하는 장소죠. 거시적으로 본다면  마녀가 수 대에 걸쳐 낙인을 물려받는 과정을 통해 마법발달에 이바지를 했을 테니까요.”

“…….”

“한편 저는 신시우 씨를 마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불쑥 튀어나온 이레귤러일 뿐이죠. 비서고의 규정상 마녀가 아닌 자는 설령 추천장을 들고 왔다 해도 출입을 허가할 수 없습니다.”

메티스는 그 이후로 ‘대신 ~해주면 특별히 들여보내 주죠’ 등의 요구를 하지 않았다.

제 할 말은 끝났으니 반론해 보라는 듯 눈을 깜빡이고 있을 뿐.

정말로 뭔가 이득을 보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자신이 세운 규율을 반드시 관철하는 원리원칙주의자.

오랜 세월을 반복한 깐깐함이 분위기로 굳어진 사람.

처음으로 만나게 된 메티스 그레모리는 쉽게 말해 숨이 턱 막히는 꼰대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