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8
1.
시우는 예언을 들은 즉시 게헨나로 돌아왔다.
소식을 전해야 할 곳이 많았던 만큼 바쁘게 움직였다.
장모님과 예소드 백작님은 따로 찾아뵈어 이번 사태에 대해 말씀드리고, 오딜과 오데트에게도 진실을 전했다.
예빈에게도 소개해줘서 살았다며 감사를 표했고 말이다.
예소드 백작님은 당장 추가 연구에 들어갔다.
감수성이 풍부하신 작은 장모님은 울음을 터뜨렸고, 큰 장모님은 한숨을 푹푹 쉬며 어떻게든 방도를 찾아보겠다며 시우를 위로해주었다.
고상하신 작은 장모님도 눈물을 보일 정도인데 오딜과 오데트의 경우는 난리도 아니었다.
“조수님은 매일 왜 그러는 거야…! 전생에 나쁜 짓 많이 한 거 아니야?”
“조수님이 죽으면…. 저도 따라 죽을 거에요.”
목을 놓아 울던 쌍둥이를 진정시키려 부단히 애를 썼다.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다.
언제일지도 알 수 없다 등의 말을 늘어놓으며 말이다.
하지만 좀처럼 쉽지 않았다.
시우가 에아에게 당해 사경을 헤맬 때 일이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는 오딜과 오데트였던 것이다.
식사도 거부, 수업도 단호하게 거부.
오직 시우 옆에 붙어있기를 고집했다.
“오딜, 오데트. 그래도 수업은 들어야 하지 않겠니?”
“조수님, 옆에서 절대로 안 떨어질 거에요!”
“스승님도 이해해 주셔야죠! 저희 마음 절대로 모르실 거에요!”
평소라면 시끌시끌한 쌍둥이가 찍소리도 못하게 엄하게 타이를 알비레오지만….
이번만큼은 경우가 달랐다.
잠시만 떨어져도 분리불안처럼 구는 귀염둥이들을 어떻게 혼내겠는가?
좀처럼 안정을 되찾지 못하는 쌍둥이를 보며 알비레오는 특단의 대책을 결심했다.
“하아…. 알겠어. 시우 군, 잠시 나 좀 볼까요?”
“네.”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와인을 한 병 딴 알비레오는 잔에 콸콸 붉은 술을 따르고 벌컥벌컥 마셨다.
병나발을 불 만큼이나 속이 타보이는 모습이었다.
“시우 군.”
“네.”
“당분간은 쌍둥이 좀 케어해 줄 수 있나요?”
“네, 당연히 그래야죠.”
비록 쌍둥이를 구해줬다고 하지만 그만큼 마음고생도 잔뜩 시킨 시우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견습마녀인만큼 특히나 속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시우의 모습에 알비레오는 잔 하나를 꺼내 술을 따라주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대뜸 혼날 것 같지는 않았다.
“시우 군, 여태 너무 책망만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제가 한 잘못도 많은 걸요.”
“음, 그…. 쌍둥이랑 오랜만이죠?”
“예?”
잠시 망설이더니 어렵게 입을 여는 알비레오.
“관계를 맺은 지 오래된 거잖아요.”
시우도 한참 뒤에야 알비레오가 말하는 ‘관계’가 뭔지를 이해했다.
설마하니 큰 장모님 입에서 그런 말이 떨어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긴 했습니다.”
그렇긴하다.
헥센나흐트로 붙잡혀 있는 동안 못했고, 돌아온 뒤에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 하지 못했다.
알비레오는 굉장히 겸연쩍은 듯 연신 헛기침을 하면서도 이 말은 꼭 전해야겠다는 양 입을 열었다.
“큼큼, 제가 책에서 찾아보니, 연인 간의 성행위는 안정과 관련된 호르몬을 분비해서 도움이 된다고 들었어요. 정말인가요?”
“일단은 그런 것 같기는 합니다.”
“오늘 쌍둥이네 방에서 자도 좋아요. 시녀들에겐 제가 말해 둘게요.”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동시에 놀랐다.
큰 장모님이 쌍둥이와의 관계를 암묵적으로 허용해 줬다는 건 알고 있다.
달에 한 번 정도는 별 탈 없이 꼭 비밀스러운 장난을 쳤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예 판을 깔아주다니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저….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엔 뭐하지만 괜찮으신가요?”
알비레오는 손 부채질을 펄럭펄럭하며 애꿎은 와인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후우…. 오랜만에 만나서 몰래몰래 하려면 괜히 서두르다가 실수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쌍둥이도 진정시킬 겸, 오래간만에 만난 시우 군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시우 군을 무척 좋아하잖아요.”
“그렇군요.”
“시우 군을 못 믿는다는 건 아니에요. 아시죠?”
“물론이죠.”
못 믿었다면 애초에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줄 리 없다.
“잘 해봐요.”
갑작스러운 특명을 받은 시우는 쌍둥이네 방으로 향했다.
2.
오딜과 오데트는 같은 방, 같은 침대를 쓴다.
‘둘이서 하나’라는 제머나이의 특성상 견습마녀부터 함께 생활하며 호흡을 맞춰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억지로 하는 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의 반쪽이기에 겉으로는 항상 투닥거려도 오딜은 여동생을 무척 아꼈고, 오데트도 마찬가지였다.
걱정과 우울을 공유할 수 있는 최고의 상대기도 했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어 호화로운 침대에 걸터앉은 오딜과 오데트.
발끝에 매달린 슬리퍼가 달랑였다.
벽난로의 온기가 뺨을 간질이는 가운데, 보드라운 양털 파자마를 입은 둘은 똑같은 표정으로 울상이 되어 있었다.
반곱슬의 흑발을 촘촘한 빗으로 삭삭 빗으면서도 손길에 영혼이 없다.
“오데트.”
“응, 언니.”
“그냥 불러봤어.”
“응.”
마음이 심란하다.
현세에서 계속 여행하지 못한 채 계승을 위해 가신들을 만났던 건 괜찮다.
오딜과 오데트는 언젠가 제머나이의 이름을 이을 것이고, 현세의 기업들도 소유하게 될 것이니 꼭 필요한 과정이다.
“언니.”
“응, 오데트.”
“나도 그냥 불러봤어.”
“응.”
하지만 조수님이 전해준 예언은 다르다.
머지않아 조수님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가장 분한 건 견습마녀인 오딜과 오데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무기력함, 불안함, 걱정, 슬픔은 끝이 뭉툭한 바늘뭉치가 되어 가슴을 쿡쿡 찌른다.
그 탓에 서로 실없는 부름만 주고받으며 눈을 붙이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달칵!
그때 조용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었다.
처음엔 침실 벽난로를 점검하러 온 시녀들 혹은 갈리나 시녀장이라고 생각했다.
“주무세요?”
하지만 침실문이 열렸을 때 등장한 사람은 놀랍게도 조수님.
한껏 우울하던 와중에도 쌍둥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수님!”
“조수님!”
“아직 안 주무셨네요.”
슬리퍼가 벗겨질 기세로 우다다 달려든 쌍둥이는 각기 좌우에서 시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튼튼한 품에 안기자 또 코끝이 시큰해진다.
얼굴만 봐도 이렇게 행복한 조수님을 어쩌면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철없는 행동만 할 수는 없다.
오딜과 오데트는 애써 꿋꿋한 척 활짝 웃었다.
“여기는 어떻게 왔어?”
“지금 밤이잖아요!”
“아, 허락받고 왔습니다. 오늘은 함께 자도 좋다고 말씀하셔서요.”
같이 자도 좋다?
아주 잠깐이지만 불안한 마음보다 기쁜 마음이 훅 부풀어 오른다.
“야호!”
“역시 스승님이에요!”
말라가던 이끼에 물을 뿌린 것처럼 파릇파릇 되살아나는 오딜과 오데트.
가뜩이나 심란할 조수님에게 불안을 전염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있었지만, 때아닌 깜짝 선물에 기뻐하는 것도 진심이다.
시우는 팔짝팔짝 뛰는 오딜과 오데트의 머리를 쓱쓱 쓸어주었다.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침대로 가자!”
“맞아요! 저희 침대 완전 푹신거려요!”
“스웨덴 왕실에 납품하는 업체에서 만든 거래!”
“예전부터 자랑하고 싶었어요!”
“이게 그 유명한 침대인가요?”
둘과 알고 지낸 건 오래됐지만, 침실까지 발을 들이는 건 처음이었다.
보통 밀회를 가질 땐 언제나 타로 타운의 전초기지에서 행해졌으니 말이다.
그 쪽도 귀족의 타운하우스를 연상케 하는 으리으리한 별장에, 가구 역시 죄다 고급품임에도 본가에 있는 침대 자랑을 어찌나 해대던지.
시우도 호기심이 생길 정도였다.
“누워, 조수님, 누워 누워.”
“여기로 와요! 여기!”
“이야, 이거 진짜 기대됐는데 드디어 누워보네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이불을 휙 걷고 시우가 누울 수 있게 침대 자리를 마련해주는 오딜, 오데트.
세 사람이 넉넉히 누울 침대 위를 팡팡 두드리며 재촉했다.
“오우.”
호들갑에 어울려주긴 했어도 그래도 침대가 침대겠거니 했던 시우다.
하지만 막상 등을 눕히는 순간 깜짝 놀랐다.
구름으로 짜낸 둥지에 몸이 푹 가라앉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제머나이 저택의 다른 가구도 훌륭하긴 하지만 견습마녀에겐 수면이 필수인 만큼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침대를 공수해 온 게 아닐까 싶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소감을 기다리는 쌍둥이.
“천연소재로만 만든 내장재! mm 단위로 설정된 섬세한 스프링 탄성 조절! 섬세한 바느질까지!”
“어때요? 저희가 왜 그렇게 난리 피웠는지 아시겠어요?”
“저희 체형에 맞춤 제작한 거라 조오금 불편할 수 있지만.”
“그래도 엄청 좋으시죠?”
“이거 죽이네요.”
시우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답해주자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좋아하는 오딜 오데트.
별로 피곤하지 않은데도 잠깐 눈을 붙이면 벌꿀처럼 달콤한 수면이 가능할 것 같다.
더군다나 침구류 곳곳에 스며든 오딜과 오데트의 상큼한 체취가 무척이나 포근하다.
문득 궁금해졌다.
딱히 사치품에 관심이 없는 시우지만 ‘적당한 가격이면 하나 장만해 볼까?’ 싶었던 것이다.
“실례지만 이런 침대는 얼마나 하나요?”
“글쎄? 오데트 이거 얼마더라?”
“10년 전에 스승님이 주신 건데 한국 돈으로 해서 21억 원 정도 했다고 들었어요.”
“…….”
아니나 다를까 이상한 자릿수가 나왔다.
부자들의 세계는 가끔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다.
“조수님도 가지고 싶어?”
“마음에 드시면 이번 수확제 선물로 드릴까요?”
“어휴, 아닙니다.”
“아냐, 진짜로 줄 수 있어. 모아둔 용돈에서 쓰면 돼.”
“그런데 빨리 말씀 주셔야 해요. 주문 제작이라 반년 정도 걸린다고 들었거든요.”
“마음만 받을게요.”
아무리 그래도 염치가 있지.
가뜩이나 숙소와 식사도 무상으로 후원받는 처지에 이런 거액의 침대까지 받는다?
잠자리가 아무리 편해도 마음이 불편해서 잠을 설칠 것이다.
한동안 주겠네 괜찮네 투닥이던 실랑이는 결국 쌍둥이가 시우의 양옆을 파고들면서 막을 내렸다.
“진짜 꿈 같다. 우리방 침대에서 조수님이랑 있다니.”
“완전완전 좋아요.”
세상 싱글벙글한 쌍둥이의 조막만 한 얼굴이 때때로 시우의 뺨에 키스를 날렸다.
“오랜만이네 조수님이랑 셋이서만 있는 거.”
“다 같이 시끌시끌한 것도 좋지만 조수님 독점하는 것도 좋아요.”
그렇게 간만에 단 셋이 만난 오딜, 오데트, 시우는 이야기꽃을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