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7
1.
정신을 차렸을 땐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콸콸 흐르다시피 양 콧구멍에서 쏟아지는 코피.
뇌내의 혈관이란 혈관은 죄다 부풀어 버린 듯한 팽창감.
관자놀이 사이에서 쿵쿵 거칠게 뛰는 맥박이 뜨겁게 두개골을 가로지른다.
반사적으로 영체 상태를 파악하고 공격을 받은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단지 인간이 접해서는 안 되는 지혜를 엿보았기에 일시적 과부하에 걸렸을 뿐이다.
“퉤.”
목울대에서 끓는 새빨간 가래를 뱉어낸 시우는 자신이 어느새 예언기관에 홀로 남겨졌다는 걸 깨달았다.
묵시의 마녀는 처음부터 허깨비였다는 양 자취를 감췄다.
“이게, 대체….”
과거에서 봤던 마녀.
너무 흐릿하고 빨랐기에 제대로 식별할 수 없었다.
조금만 집중을 놓쳤어도 금방 현실로 튕겨 나왔을 것이다.
“그건…. 케테르였지?”
시우의 목숨을 구해주긴 했지만 동시에 묘한 수작을 벌여놓은 케테르 공작.
그녀의 어머니가 창조의 마녀였다는 건가?
그녀는 거듭된 실패 끝에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불순물을 걸러냈다.
그렇게 탄생한 존재가 릴리스 케테르 즉, ‘속삭임의 마녀’.
‘여(余)가 치유해 주도록 하겠다. 아이를 데려오거라.’
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했기에 뭔가를 했다.
누군가를 치료해 주었다.
정확히 누구를 치료했다는 건지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정황상 시우를 치료했고 영혼의 마녀에게 검진받았듯 다양한 수작을 부린 거겠지.
어지러운 머리를 털어낸다.
하루 만에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연인들을 걱정을 시키지 않는다는 구실로 비밀로 하기에는 너무 큰 문제가 엮여 있다.
2.
시우가 회랑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앞에서 기다리던 연인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랐다.
다시 나타난 시우가 반쯤 넋이 나가 있는 데다가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초췌했기 때문이다.
“시우야, 무슨 일 있었어?”
“아니야. 아니, 있긴 했는데….”
걱정스러운지 눈물을 글썽이며 묻는 샤론.
어지간하면 겉치레로나마 걱정 말라는 말을 늘어놓는 그가 말끝을 흐리자 다들 걱정이 배가 되었다.
“어디 앉아서 이야기할 만한 장소 없을까요? 조금 길어질 것 같아서요.”
결국 장소를 이동.
인근 빈 통나무 집을 잡아 테이블에 둥글게 모여 앉았다.
“이걸 어디서부터 말하면 될지….”
시우는 먼저 조금 전 알게 된 케테르 공작에 과거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케테르 공작이 창조의 마녀를 어머니라 부르며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
속삭임의 마녀의 진명은 릴리스 케테르이며, 본디 케테르 공작에게서 분리된 존재라는 것.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그녀가 시우를 매개로 초월을 꿈꾸고 있다는 것.
“그럴 수가…. 그게 정말인가?”
“확답은 못드리겠지만….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묵시의 마녀가 굳이 짚어 보여준 과거거든요.”
시우가 밝힌 사실은 하나 같이 마녀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킬 쇼킹한 진실이다.
하나하나 곱씹어보면 이해가 가는 이야기기도 했다.
릴리스가 케테르의 질서를 번번이 망가뜨렸던 것.
그럼에도 케테르가 릴리스를 죽이지 않았던 것.
이상하리만치 시우에게 관심을 보이며 많은 안배를 두었던 것.
이 정황만으로 사실 여부를 판가름할 순 없다.
만약 생판 모르는 남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헛소리로 치부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마녀는 모두 시우를 철석같이 믿었다.
“케테르가 대체 왜….”
“남자 마녀였기 때문일까요?”
“우리 시우는 일전에 없던 존재니까~ 수천 년 동안 찾지 못했던 답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 든다면 그럴듯해.”
그 중 가장 관심이 몰리는 화제는 ‘케테르가 시우에게 무엇을 바라는가?’였다.
릴리스의 정체도 충분히 충격적이지만 당장 가장 중요한 건 시우가 아닌가?
“그 부분에 관해서는 아직 드릴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다음으로 전달한 건 오늘 영혼의 마녀에게 진단받은 시우의 현재 상태였다.
가뜩이나 무거운 분위기 속 한 마디 한 마디를 꺼낼 때마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다들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아멜리아 님,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팔은 이미 치료가 끝났고 덕분에 빨리 진단받을 수 있던 거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아멜리아 양 진정해요.”
펑펑 울며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는 아멜리아를 샤론과 시우가 다독였다.
사실 여기까지라면 시우도 그런저런 해프닝인갑다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원체 바람잘 들 날 없이 온갖 사건에 휘말리던 인생 않던가?
낙인의 복제가 흑기사를 강하게 하는 원인이라면 성관계 대상을 늘리지 않으면 된다.
현재 보유한 마법을 발전시키는 것만으로 스승님에 대적할 퍼포먼스를 뽑아낼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조심 또 조심하며 일신의 무력을 갈고 닦으면 된다.
그러나 예언에서 봤던 건 미래는 경각심을 안겨주는 문제였다.
즉,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다.
“이제부터는 제가 봤던 미래를 말씀드릴게요. 그 전에 스승님, 한가지 여쭤도 될까요?”
“무엇이든 물어보게나.”
“예언기관의 예언이 실현될 확률은 어느 정도인가요?”
한참 고민하던 엘로아는 겨우 입을 떼었다.
몹시 두려워하는 목소리였다.
“…시기는 부정확하지만 거의 반드시 실현된다고 보면 되네.”
예언이 희보라면 구태여 이런 사실을 묻지 않았으리란 추측에서 기인한 두려움이었다.
“만약 두 가지 예언을 보게 됐다면 예언을 보여준 순서와 실제 시간대는 관련이 있나요?”
“…없다고 알고 있네.”
“그렇군요.”
“시우, 뭘 봤길래 그러느냐….”
평상시엔 언제나 텐션이 하늘을 뚫던 르뤼에도 우울한 목소리로 묻는다.
항상 당당하게 솟았던 눈썹도 불쌍하리만치 가운데로 모여있다.
시우는 예언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결국 무의식에게 육체를 빼앗겨 마녀의 왕으로 추앙받던 미래.
아마도 견습마녀를 안고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어르고 있던 자신의 미래.
후자 쪽의 시우는 적어도 행복한 표정이었으나 현시점에서 좋은 경우의 수를 떠올리긴 어렵다.
어찌됐건 계승을 하는 쪽은 죽어야 한다.
시우는 견습마녀를 사랑으로 키울 것이고 언젠가 낙인을 맡긴 뒤 떠날 테지.
마녀로 살아온 기간보다 인간으로 살아왔던 시간이 더 길었다.
그런 만큼 시우는 마녀 간 ‘계승’을 숭고한 헌신이라기보다는 슬픈 이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자신이 계승을 결심할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한 답도 현재로선 내릴 수 없었다.
어쩌면 까마득히 먼 훗날의 미래를 본 것일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연인들의 반응은 확실했다.
“당장 케테르를 만나봐야겠네.”
“만악의 근원이 케테르인게냐? 짐의 국서에게 수작을 부린 대가를 엄중히 물을 것이다.”
“…….”
엘로아, 르뤼에, 린네는 화를 냈다.
멋대로 연인을 앗아가려 드는 케테르에 대한 날카로운 적의였다.
“안 돼…! 이런 게 어딨어! 그리고 견습마녀라니….”
“설마, 설마 제가 케테르 공작에게 시우를 부탁해서….”
샤론, 아멜리아는 벌써 시우가 죽기라도 한 듯이 펑펑 울음을 쏟아냈다.
“…….”
조금 예외인 사람은 도로시였다.
평소라면 다른 이들을 수습하며 적당한 농담을 꺼내주었을 그녀마저 손가락을 깨물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진정하세요. 아직 정해진 일도 아니잖아요.”
사실 별로 괜찮지 않다.
어느 쪽이건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
온갖 발버둥을 치며 살아남아 왔는데 운명이라는 정체불명의 선고에 어떻게 죽게 될지 고민이나 하고 있어야 한다니.
괜히 울렁거리고, 남은 연인들이 슬퍼할 걸 생각하니 괜히 눈가에 눈물이 핑돈다.
하지만 심지를 바로잡아주는 다짐이 있다.
과분한 사랑을 받는 만큼 멋진 남자가 되어야겠다는 다짐.
“아예 수백 년 뒤의 이야기일지 모르고 또 다들 알잖아요? 저 악운에는 더럽게 강한 거.”
당사자가 보인 침착한 목소리에 소란이 많이 잦아든다.
그의 말이 신빙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다른 마녀들이 한평생 만날 공적보다 많은 공적을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만났다.
매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도 목숨을 걸고 살아나왔다.
아직 마녀로서는 풋내기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관록 비스름한 것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근거는 없지만 어쩐지 이상합니다.”
“무엇이 말인가?”
“예언의 마녀는 절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어요. 그저 바꿀 수 없는 과거와 피할 수 없는 미래를 보여주기 위함이라면 저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거나, 꿈의 계시를 내릴 필요가 있었을까요?”
절박한 상황 속 자신이 원하는 바를 내뱉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우는 아주 조금의 희망이라도 남아있다면 포기할 생각 따윈 없었다.
슬퍼할 연인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대책을 세워보죠.”
3.
아쉽지만 여행은 여기까지였다.
엘로아, 린네, 도로시는 예정대로 위치포인트 도쿄 지부으로 향할 것이다.
예정대로 형벌 부대라는 명목으로 현세의 안정을 도모하는 데 힘을 보태기로 한 것이다.
그것만이 목적은 아니다.
게헨나에 많은 양의 정보가 모여있는 건 사실.
그러나 현세는 게헨나보다 수만 배나 넓다.
위치포인트의 정보망을 활용하면 현 상황을 타개할 마녀나 호문쿨루스와 조우할 수 있다.
나머지 인원은 게헨나 내의 비서고에서 다양한 정보를 찾을 예정이었다.
목적지가 다른바 먼저 출발할 채비를 갖추는 두 스승님, 그리고 도로시에게 인사를 준비했다.
“낭군.”
팔을 벌려 시우를 꽉 껴안는 린네.
“기필코 낭군을 구하겠다. 낭군이 그랬던 것처럼.”
“너무 무리는 하지 마세요.”
그 사이를 은근슬쩍 비집고 들어오는 엘로아.
“시우, 곧 수아 선생을 보내겠네. 이런 때에 함께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네.”
“아닙니다. 그런데 수아 지부장님을요?”
“분명 힘이 되어 줄 걸세.”
마지막으로 도로시까지 슬쩍 다가왔다.
깜짝 놀랄 정도로 덥석 안기자 부드러운 압박감이 상체를 짓누른다.
“도로시 님?”
“다치지 마. 너한테 문제가 생기면 정말 슬플 테야.”
잔잔하고 낮으면서도 촉촉한 목소리.
“도로시 님….”
혹시 울고 계시냐고 물어보는 건 너무 멋대가리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쯤.
시우의 가슴팍을 가볍게 떠민 도로시가 멋들어지게 등을 돌렸다.
“아무튼~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누님들이 멋지게 해결책을 들고 갈 테니 말이야.”
“네, 도로시 님도 부디 몸조심하세요. 조만간 뵙겠습니다.”
인사를 나눈 시우, 아멜리아, 샤론, 르뤼에는 곧장 호수로 뛰어들었다.
“써도 좋네.”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도로시에게 엘로아가 손수건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