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6
1.
마녀가 존재한 이후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예언기관에 대한 해석은 불분명하다.
묵시의 마녀가 어떤 존재인지 역시 속삭임의 마녀 이상으로 베일에 감싸여있다.
무한한 운명의 실낱.
올올이 엮인 인과의 교차로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굽어보는 자.
전능(全能)하지 않되 전지(全知)한 신의 관측대에 올라선 존재.
엘로아는 그런 묵시의 마녀를 다른 차원의 존재라고 단언했다.
그녀는 수만의 바꿀 수 있던 과거, 수억의 갈림길이 늘어선 현재, 수조의 결과로 나누어진 미래를 동시에 관측한다.
따라서 그 눈동자에 비치는 모든 것은 무의미하며 그렇기에 방관자를 자처한다.
오직 주어진 책무 ‘예언기관의 관리’와 ’마녀의 계승 인도’를 기계장치처럼 반복할 뿐이다.
그렇기에 일전 예언의 꿈에도 그리 큰 무게를 두지 않았다.
묵시의 마녀의 ‘중요도’와 일반적인 기준은 전혀 궤가 다르다는 말을 들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묵시의 마녀가 직접 전달하는 미래는 일반적인 기준에서 하등 중요치 않은 요소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구태여 발걸음을 옮긴 마녀들이 하등 쓸모없는 예언에 툴툴거리며 돌아갈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묵시의 마녀는 두 번째로 시우에게 말을 걸었다.
첫 번째는 ‘거꾸로 매달린 왕에게 저의 경배를’ 두 번째는 ‘기다리고 있었어요’.
거기엔 분명 의지가 있었다.
단순히 기계장치나 톱니바퀴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의지가.
더군다나 시우가 본 미래는 예삿일이 아니었다.
뜬금없이 마녀의 왕이 된다니.
견습마녀를 지니게 된다니.
어느 것 하나 너무 의미심장해서 탈이지 않은가?
“기다리고 있었다니요?”
시우는 가까스로 혼란을 끊어냈다.
터질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킨 채 차분히 대화를 시도한다.
모든 질문에 대해 답해줄 존재가 앞에 있다.
“…….”
그리고 그녀와 얼굴을 맞댄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이 느낌은 뭐랄까….
그래.
과거 지워졌던 기억이 복구되는 과정에서 몇 번 정도 보았던 케테르 공작과 몹시 흡사하다.
어떤 부분이 어떻게 흡사한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 소녀가 시우에게 초점을 맞추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엇을 비추는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색상의 눈동자에서 시우의 존재가 쉼 없이 사라지고 나타나고를 반복했으니 말이다.
“절 기다리고 있던 건가요?”
“응. 아, ——, ——, ——.”
작은 입이 벌어지며 무언가를 말했다.
그건 분명 일정한 형식과 규칙을 지킨 언어였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 아니라 그 말을 그대로 따라 하려 해도 발성 단계에서 포기할 것이다.
뇌가 수용을 거부하는 기분이었다.
두통이 일었다.
“이해 못 했습니다.”
그 순간 소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입을 뻐금거리지만 그런다고 의사 전달이 제대로 될 리가.
뭔가 의사소통이 여의치 않다는 걸 어리짐작할 뿐이다.
“어휴.”
한숨을 쉰 묵시의 마녀.
한숨은 평범하게 들린다.
묵시의 마녀는 허리를 숙였다.
호숫가에 손끝을 담그더니 아주 조금의 물을 퍼올린다.
살짝 젖은 그녀의 손이 뺨에 닿았다.
작은 손이었지만 아주 거대한 것과 맞닿은 느낌이었다.
의식이 범람한다.
우주처럼 검고 드넓은 공간에 총천연색 색상의 실이 흐른다.
너무나 가느다란 그 실낱은 때로는 흩어지고, 때로는 다발로 모이며, 때로는 신경다발처럼 사방으로 종횡무진한다.
그것은 이루어지지 못한 과거다.
당도하지 못한 현재며 미래다.
세상에 실존했던 역사와 실존하지 못한 역사가 공존하며 기록되어 있다.
수억년을 투자해도 절반도 셀 수 없을 방대한 양의 실이, 손을 뻗으면 닿는 곳부터 보이지 않는 저 무한한 공간까지 흐른다.
그리고 시우는 나선으로 휘감기는 흐름의 가운데 실의 움직임을 내려보고 있다.
전지한 신의 관측대.
무심코 그 단어를 떠올렸다.
침을 삼키고 눈 바로 앞에 떠 있는 실을 톡 건드렸다.
하나의 스크린에 수십 개나 되는 영상기를 재생한 듯 겹치는 시야.
거기엔 예언기관을 배경으로 묵시의 마녀가 뺨을 어루만지던 그 자세 그대로 서 있다.
“날 운명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 사람은 당신뿐이야. 그러니까 네게 미래를 알려줄게. 날 사용해줘.”
“나도 이제 드디어 성장할 수 있겠네. 언제나 열 살배기 아이의 모습인 건 정말 싫었어.”
“아아, 이게 평범한 인간이 보는 세계구나. 정말 마음에 들어.”
“사랑한다고 말해도 될까?”
이것은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
시우가 과거 다른 선택을 했을 때, 어쩌면 구현됐을지도 모르는 현실이다.
묵시의 마녀, 그 이름은 ‘데키마 베르단디’.
모종의 이유로 기계장치로 전락해버린 데키마를 시우는 목숨을 걸고 구해냈다.
‘더는 너 혼자 고통받을 필요 없어’같은 멋들어진 대사를 하며 말이다.
영원한 속박을 벗어던지게 한 이후엔 둘도 없이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베르단디는 ‘관리자’로서의 능력은 대부분 상실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렇게나 사랑하니까.
묵시의 마녀가 사라진 만큼 계승 문제도 차질이 생기겠지만 다음에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볼 일이지.
고난을 극복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 지금은 그저 행복할 뿐이다.
그 위에 겹치듯 상영되는 또 다른 가능성이 보였다.
“네가 이 꼴이 되어서 찾아올 줄 알았지.”
“이제야 내 지혜를 구걸할 마음이 생기니? 이미 늦었어.”
“내게 가장 큰 행복은 네 절망스러운 표정을 보며 비웃는 거야.”
무표정한 묵시의 마녀의 얼굴 위로,
사랑스러운 데키마 베르단디의 얼굴 위로,
또 다른 색상의 표정이 겹친다.
혐오와 경멸, 비웃음과 통쾌함이 적당히 배합된 색조이다.
묵시의 마녀는 자신을 증오해 온 신시우를 굴복시키며 희열을 맛보는 중이었다.
당장 무릎을 꿇고 과거를 참회하며 고개를 조아리지 않는 한, 그녀의 협력을 받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네 창자를 손으로 꺼내봐. 영체라면 그 정도론 죽지 않으니까 각오를 보여줘.”
잔인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우욱…!”
시우는 구토감을 느끼며 재빨리 실에서 손을 떼었다.
전혀 다른 상반된 감정이 일제히 뇌를 강타했다.
데키마를 사랑했고, 증오했다.
그녀는 전혀 접점이 없던 타인이었으며 때로는 심장을 꺼내줄 수 있는 연인이었다.
양극에 달한 감정이 전부 현실감이 넘쳐 그녀를 향한 감정이 잔뜩 헝클어져 뒹군다.
과연 그것 중 무엇이 의미 있는 현재이며, 무엇이 의미 있는 인연일까?
이것이 묵시의 마녀가 세상을 인지하는 시야다.
헤아리는 게 불가능한 영겁의 삶 동안 불확실성의 경계에 놓인 존재에게 ‘현실’은 딱히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소름 끼칠 정도로 실감이 되었다.
네가 봐야 할 건 그쪽이 아니야.
우주 전체에 울리듯 소리 없이 전달되는 데키마의 의사.
미시적으로는 자유분방하게, 그러나 거시적으로는 커다란 나선을 그리던 운명의 실낱이 물레에 이끌리듯 감긴다.
시우의 앞에 놓인 건 고작해야 두 가닥 정도의 가느다란 실.
아직 손에 닿지 않았지만 알 수 있다.
이건 확정되었던 과거로 연결된 실이라는 걸.
솔직히 별로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지 범위를 초과하는 정보와 감정을 뇌에 쑤셔 박는 느낌이었으니까.
숨을 죽이고 재차 손을 뻗었다.
그래도 확정된 과거라면 괜찮겠지.
이 공간에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가야 한다.
그런 직감이 있었다.
더 낮은 곳으로 의식이 가라앉는다.
“네, 어머니. 어머니의 소망대로.”
한 마녀는 어머니의 유지를 이어받길 원했다.
삼라만상을 창조하고 파괴하는 경지.
세계의 규칙조차 수정할 수 있는 위대한 위업을 뒤따르길 원했기에 그녀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나아갔다.
무지개 위에 서기 위하여.
숨이 막힐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갈고 닦았다.
어머니가 남겨 둔 안배를 따라, 때로는 동족을 먹어치우는 것도 서슴지 않으며 더욱 강대한 힘을 얻기 위해 기나긴 일생을 바쳤다.
또한 마녀가 번성토록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주 긴 시간이 흘렀다.
세상은 변했다.
무수한 시행착오와 실패 끝에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은 어머니처럼 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인간을 초월하기 위해선 먼저 굴레를 벗어던져야 했다.
마녀는 제 영혼의 불순물을 그러모아 분리했다.
질서에 반대되는 사악한 혼돈을 잘라내고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내었다.
육신과 영을 찢어 순수만을 걸러낸 자리에 남은 건 끈적한 오물과 찌꺼기였다.
영원히 불사르는 불길로 오탁을 일소하려던 마녀는 그 안에서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손을 거두었다.
부정한 존재임을 알면서도, 질서가 아닌 혼돈과 혼란을 불러일으킬 존재임을 알면서도.
삶을 향한 강렬한 갈구가 울음소리 안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녀는 고민 끝에 아기를 품에 안아 거두었다.
밤하늘을 닮은 눈동자를 보고 그 이름을 릴리스라 칭하였다.
충격에 잠길 새도 없이 또다시 시야가 변한다.
까마득한 시차가 두 기억 사이에 존재했다.
모든 노력은 무의미했다.
그토록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힘썼음에도.
육신과 영을 찢어 불순물을 걸러냈음에도.
마녀는 여전히 실패자였다.
마음을 바꾸어 거두어들였던 릴리스는 오직 파괴와 혼돈만을 원하는 존재가 되었다.
고작 두 계단을 남겨두었던 경지는 영원토록 좁혀지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모든 마녀는 실패자이다.
무지개 위에 설 수 없도록 한계가 설정된 결함품들.
비관하고 절망하던 마녀는 한가지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아주아주 희박하지만 유일하게 매달릴 가능성을.
케테르는 입을 열었다.
“여(余)가 치유해 주도록 하겠다. 아이를 데려오거라.”
그리고.
씨앗을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