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823화 (823/917)

#823

1.

이번 검진의 지향점은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다른 연인, 특히 아멜리아가 걱정하지 않도록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한 가벼운 검진’이라 칭하는 것.

하나는 예빈마저 알아낼 수 없는 왼팔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다.

아무튼 간에 스승님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있으면 괜한 걱정을 살 수 있기에 적당히 주위를 물렸다.

어설픈 변명에 걱정스러운 듯 자리를 지키려던 연인들이지만 스승님이 나서자 다들 자리를 비워주었다.

따라서 저택에 남은 인원은 엘로아, 시우, 그레텔뿐.

나머지는 근처의 명소를 둘러보기로 했다.

“잠시만 기다려. 준비해야 하니까.”

그레텔은 응접실에 엘로아와 시우를 남겨둔 채 공방으로 돌아갔다.

뭘 그리 열심히 준비하는지 벌써 30분째 기다리는 중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 건가?”

너무 깊게 몰두하던 모양이다.

옆에서 의아하게 바라보는 스승님을 한참 뒤에나 눈치챘으니.

“아, 이번에 꿈속에서 익힌 기술들 말입니다.”

불과 두 시간 전.

시우는 꿈속에서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며 엘로아와 겨루었다.

그 모의 전투는 많은 영감을 안겨주었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것과 다른 방식의 힘.

새로운 경지를 엿본 느낌이었다.

실제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단계는 뛰어올라야겠지만 영감의 힘은 위대하다.

당장 검증해보고 싶은 마법이 수십 가지는 머리에서 맴돌았다.

꿈 속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스승님과 자웅을 겨루는 수준까지 올라선다면.

어지간한 위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도 된다.

일전에 다짐했듯 이 많은 연인을 거느리기에 부족함 없는 멋진 남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치기 어린 포부에 가슴이 뜨겁게 부풀고 마는 것이다.

“뭐?”

조금 쑥스러운 속내를 스승님께 털어놓았다.

눈이 휘둥그레졌던 스승님은 강아지풀로 발바닥을 간질이는 양 크게 웃었다.

“스승님, 저 진지합니다.”

“나도 알고 있네. 미안하네. 헌데, 헌데…. 미안하네…. 잠시만 이대로 있겠네….”

어떻게든 웃음을 멈추려고 입술을 씰룩거렸지만 결국 눈물이 찔끔 나올 때까지 배를 잡고 웃는 스승님.

처음엔 어딘가 못마땅했던 시우도 결국 피식 웃었다.

좀 쪽팔리면 어떤가?

스승님이 즐거워하시면 됐지.

“멋진 남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니. 그대는 이미 내게 멋진 남자라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죄송한 걸요. 적어도 모두가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수준은 되야하지 않겠습니까?”

매일 방방곡곡에서 얻어터지고 툭하면 실종되어 연인들의 마음을 썩이는 남자친구라.

이만큼 한심한 일이 어딨는가?

“그대가 왜 그리 생각하는지는 알겠고 또 너무 귀엽네만…. 케테르 공작이라도 될 셈인가?”

“그건 그렇죠.”

“천천히 하게나 천천히. 그대는 이미 유례없는 성장을 이루고 있으니.”

“그나저나…. 스승님 괜찮으신가요?”

“음? 아....”

꿈의 결말을 본 시우는 엘로아가 긴 방황 끝에 자신을 용서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지는 본인이 아니면 모르는 노릇.

적당히 분위기가 풀리자 물어본 것이다.

그녀는 제 분홍 머리칼을 귀 뒤로 쓱 넘기더니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레텔이 아직 돌아올 기미가 없는 듯하자 시우에게 폴싹 안긴다.

“물론이네. 이렇게 마음이 편했던 적은 처음이야.”

“다행입니다.”

끈끈한 신뢰로 이뤄진 관계에 많은 말을 필요 없었다.

그저 엘로아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아, 스승님.”

“또 뭔가?”

“그러고 보니 꿈에서 이런 말씀 하셨죠?”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허리에 둘린 손을 엉덩이로 뺀다.

전조 없는 음흉한 손놀림에 흠칫 놀라는 스승님.

“하루에 한 번 3시간씩 꼭 사랑을 나누기로 약속했다고….”

“그그그그게 무슨 말인가?”

모든 방면에 뛰어난 엘로아가 딱 하나 서툰 게 있는데, 그게 바로 거짓말이다.

둘러대는 것조차 참 못하신다.

화들짝 놀라서 두 다리를 찰싹 붙이고 엄한 허공을 보는데 어떻게 눈치챌 수 없으랴?

“그것도 스승님이 바라시는 건가요?”

돌이켜보면 그 꿈은 스승님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

작은 설정 하나가 무의식을 반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많이 의외였다.

스승님은 성욕이 거의 없는 편이 아니시던가?

그게 아니라면….

“실은….”

젖을 찾는 새끼 토끼처럼 우물 꾸물대는 스승님의 입술.

“실은?”

“…….”

오랜 침묵에 슬쩍 되물었는데도 도로 입을 꾹 다무는 엘로아.

사실 엘로아는 고민 중이었다.

도로시와 했던 성욕 색상 진단의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말이다.

물론 도로시는 연인 간의 사랑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성욕 또한 천박한 것이 아니니 허심탄회하게 터놓으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나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워진 가치관이 말 몇 마디로 변한다면 그걸 가치관이라고 부를 순 있을까?

결국 시우는 그녀에게 답을 듣지 못했다.

“준비됐어. 따라와.”

그 전에 준비를 마친 그레텔이 호출했으니 말이다.

그레텔의 공방은 시우와 엘로아가 들어섰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다른 방을 찾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굉장히 마니악한데요?”

“남의 마법 흉보는 거야?”

“그런 건 아닙니다만….”

작업대가 놓였을 뿐 말끔한 사무실 같던 방이 하드코어 오컬트 샵처럼 변해있다.

어둑한 암막 커튼, 부글부글 녹색 액체가 끓는 작은 솥, 바닥에 피로 그려진 오망성 등등.

흔히 동화 속에 나오는 ‘사악한 마녀의 집’하면 떠올릴 수 있는 광경이다.

마녀 짬밥이 쌓인 만큼 상징 구축을 위한 주변 정돈이란 건 알아차렸다.

“나도 취향인 거 아니거든?”

“압니다. 근데 저거 진짜인가요?”

시우는 촛대처럼 양초를 받친 해골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레텔은 시시한 질문에 답해 줄 의리는 없다는 양 과감히 무시했다.

“일단 벗어.”

“네?”

‘또 그런 상황?’ 이라는 생각이 들 법했다.

스승님을 보니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레텔을 보고 있다.

“벗어야 진단을 하지. 내가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해?”

“왜 화를 내십니까. 알겠습니다.”

하긴 수많은 마녀의 추파를 넘겨오며 얻게 된 스카우트 능력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레텔에게는 딱히 욕망의 자락이 보이지 않는다.

셔츠와 바지를 벗자 잘 발달한 근육이 나타났다.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만약 현세에서 수학자로 그대로 살았다면 이런 근사한 육체를 가졌을까 싶다.

기능성과 심미성 모두를 잡은 근육 위로는 크고 작은 흉터가 남성미를 더한다.

“근육의 결이 좋네. 남자는 이런 식으로 구현되는구나. 아니지, 이건 수련이 더해진 성과일 거야.”

별안간 차가운 손이 가슴을 짚었다.

쓰윽쓰윽 내려온 손이 배와 허벅지까지 더듬는다.

옆에서 꾸욱 입술을 깨무는 스승님.

하지만 그레텔은 아랑곳하지 않고 감정사의 건조한 시선으로 시우의 몸 구석구석을 보고 있었다.

“뭐해? 벗으라니까.”

“네? 팬티도요?”

“태초의 그 모습 그대로 돌아가야 영혼의 본질을 볼 수 있는 거야. 아니면 팬티라도 입고 태어났어?”

곱게 말하는 법이 없는 그레텔의 뾰족한 힐난.

시우는 괜히 엘로아의 눈치를 보며 주섬주섬 팬티도 벗었다.

어째 생판 모르는 남한테 고추를 보이는 게 익숙해지는 기분이다.

덜렁덜렁 물건이 드러나자 그레텔의 눈이 살짝 커졌다.

“…평균을 아득히 웃도네.”

“그만하게!”

그레텔이 고추를 움켜쥐려는 순간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선 엘로아.

“꼭 필요한 행위가 아니면 자제하게나.”

“모양이 웃기네. 나는 의사야. 게다가 고작 알몸보고 환자한테 정욕을 품을 것 같아?”

그레텔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스승님이 평소처럼 똑 부러지게 선을 긋지 못하는 게 그 증거다.

“스승님, 차라리 밖에서 기다리실래요? 별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어. 옆에서 사사건건 방해하면 귀찮거든.”

결국 스승님은 문 바로 앞에서 대기하고 단둘이 남은 그레텔과 시우.

갑자기 돌변한 그레텔이 끈적한 교태를 부리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까다로운 사람인지는 몰라도 직업의식만은 투철한 것 같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요?”

“조금만 더 살펴보고 싶네. 남자 마녀의 몸은 처음이니까.”

그레텔은 옷을 벗고 뻘쭘하게 서 있는 시우의 주위를 기웃거리며 손으로 이곳저곳을 만져댔다.

직업의식 뿐 아니라 마녀 의식도 투철한 것 같다.

“그동안 증상을 말해줘. 듣고 있을게.”

“알겠습니다. 옆구리는 피해 주세요. 간지럽네요. 다만 하나는 지켜주셔야겠습니다.”

“뭐?”

어디까지 말해도 좋은지는 의문이었다.

다만 도로시가 가르쳐주었지, 앞으로 마녀 사회를 살아가려면 지금까지 물렁한 모습으로는 힘들다고, 때로는 비정한 면모를 연출해 보일 필요가 있다 말했다.

“만약 제 상태가 외부에 새어나간다면 그때는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반드시 비밀을 준수해주세요.”

“…….”

“물론 의사로서의 소명감이 넘치시는 그레텔 님이 환자의 정보를 유출하리라 생각하진 않지만요. 만에 하나입니다. 만에 하나.”

처음해보는 협박 아닌 협박과 회유 아닌 회유.

영 입에 달라붙지 않는 느낌이다.

잘 먹혔으려나?

“무서운 남자 마녀님이었네.”

그레텔은 소리 높여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고, 씨알도 안 먹힌 엄포 같다.

“…그렇게 어색합니까?”

“귀엽네. 왜 인기가 많은지 알 것 같아.”

“아무튼 약속은 지켜주세요. 저는 안 무섭지만 밖에는 무서운 분이 많습니다.”

“걱정할 거 없어. 비밀은 마녀 명을 걸고 지켜. 더불어 난 명예를 아는 마녀라고.”

확답을 받은 시우는 많은 걸 말해주었다.

성교 시 마력 복사 능력, 그의 좌안이 케테르에게 받은 것이라는 것, 왼팔이 이상해진 계기까지.

그레텔은 웃음을 갈무리하곤 시우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흥미로운 기색을 내비치던 그레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말까지 들은 이후 시우를 오망성 한가운데 세웠다.

“좋아. 검사해볼게.”

반짝반짝 빛나는 오망성의 마법식.

검은 마력 무리가 시우의 몸을 두르며 은은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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