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2
1.
눈을 뜨자 보이는 건 낯선 천장이었다.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눈에 들어온 건 막 꿈에서 깨어난 듯 무겁게 눈을 끔뻑이는 스승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연인들과 영혼의 마녀였다.
엘로아가 시우를 덥썩 끌어안고 주위에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뜨거운 키스를 날리는 해프닝 이후.
일동은 영혼의 마녀와 함께 공방 옆 응접실에 둘러앉았다.
엉뚱한 사건으로 이런 일 저런 일이 있었지만 예빈에게 소개장을 받아 이 먼 곳까지 발걸음을 옮긴 이유는 왼팔의 검사를 위해서였다.
이제야 본론에 들어선 것이다.
“좋아, 검사에 앞서서 한 명씩 면담이 필요해.”
“면담?”
어수선한 가운데 영혼의 마녀는 손뼉을 쳐 주의를 끌었다.
굳이 한명씩 불러내는 이유가 미심쩍긴 하지만 어차피 이곳에 있는 이 중 그레텔보다 일신의 무력이 약한 이는 없다.
“그럼~ 내가 먼저 갈까? 수상한 마녀님이 묘한 수작을 부릴지도 모르니까.”
“뭐라는 거야? 그런 거 안 해.”
가장 먼저 나선 건 도로시였다.
또한 눈치 빠른 도로시라면 그레텔이 면담을 핑계로 일대일 대면을 하려는 이유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엘로아와 시우가 누워있던 공방으로 다시 발을 옮긴 그레텔은 붙박이 책장으로 다가갔다.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두꺼운 서책 중 세 개를 가볍게 당기자 중후한 마찰음과 함께 책장이 빙그르르 회전했다.
책장 너머엔 어두컴컴한 동굴 같은 것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른바 비밀 통로라는 것이다.
“호오~ 꽤 구닥다린데? 전혀 눈치 못 챘어.”
“그러라고 기계장치로 만든 거니까. 들어와.”
그레텔은 촛대를 들고 허리를 숙이고 머리가 부딪치지 않게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다.
밖에서 보기엔 동굴이었는데 조금 안으로 들어서자 벽과 천장이 훌륭하게 마감되어 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걸을 수 있을 만큼 높이도 높아졌고 말이다.
“여기.”
그레텔이 복도 왼쪽에 붙은 문을 열었다.
꼭 귀족의 저택에 하나씩은 마련된 비밀의 방 같은 느낌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도로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예상했다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실감은 또 다른 법이다.
“와~ 이건 정말 악취미인데?”
스무평 남짓한 비밀의 방은 이름 그대로 고양이 눈처럼 빛나는 묘안석으로 가득했다.
고가의 금록석을 가공한 것은 아니고 저렴한 준 보석류에 해당하는 문스톤으로 된 묘안석이다.
대체로 이런 묘안석은 아직 과학적인 영상저장 기술이 존재하지 않던 당시 마녀들의 USB로 활용되곤 했다.
그리고 아마 이것들도 같은 목적으로 사용되는 물건이겠지.
“나도 먹고살아야지.”
그레텔은 도로시의 지적을 심심한 말투로 받아내곤 선반을 뒤적여 묘안석 하나를 꺼내왔다.
아무렇게나 방치되어있던 물건과 달리 방금까지 마법식이 그려진 받침대에 끼워져있던 물건이다.
“어차피 예상하고 있는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여기엔 오늘 네가 꿀꿀이를 만나 꾼 꿈이 저장되어 있어. 무슨 꿈을 꿨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거짓말할 필요 없어. 다 엿봤을 거면서.”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엿보지 않았을 리가 있나.
어떤 목적을 품고 왔을지 모르는 손님의 ‘이상향’을 엿봄으로써 인간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레텔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무튼, 무슨 꿈을 꿨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왕 이렇게 멀리까지 여행을 온 거잖아? 기념품으로 사도록 해. 꿈을 저장해 둔 영상은 이거 딱 하나밖에 없어.”
사람마다 꾸는 꿈은 다르겠지만 원래 망상이란 남에게 보여주기엔 부끄러운 것이다.
게다가 마녀 대다수는 엄격, 근엄, 진지하다.
제 꼴사나운 꿈이 타인의 수중에 있는 걸 용납할 리 없다.
그걸 약점으로 잡아 돈을 주고 파는 것이다.
양아치도 이런 양아치가 따로 없었다.
“흐음~ 좋아. 얼만데?”
딱히 부끄러운 꿈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가끔 기분 전환으로 보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20만 달러. 현물로도 받아. 사용법은 알지?”
대상이 마녀임을 고려했을 때 딱 ‘귀찮고 찜찜한데 돈으로 해결하자’라는 말이 나올 합리적인 금액이다.
기념품이라는 뻔한 말을 앞세워 ‘약점’을 잡았다는 인상도 남기지 않는다.
게다가 도로시는 불청객이 아닌가?
이 정도 장난은 애교로 넘어가 줌 직하다.
“수표로 써줄게.”
“말이 잘 통해서 좋네. 예쁘게 포장도 해줄게.”
지푸라기로 된 둥지가 완충재로 담긴 상자 안에 묘안석을 포장하는 그레텔.
도로시는 기꺼이 상자를 받아들였다.
“아, 그런데 말이야.”
“응?”
“혹시 다른 사람의 기념품까지 사려면 얼마가 필요해? ‘그 사람이 모르게’라는 조건으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잠깐 고민하던 그레텔.
엿보았던 꿈을 종합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이들은 놀랍게도 전원 남자 마녀의 연인인 것이다.
이건 다시 말하자면 연적을 견제, 혹은 염탐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
처음으로 그레텔의 입가에 미소가 새겨졌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후후.”
도로시와 그레텔은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2.
다음 차례는 아멜리아였다.
“저장되어 있다고요?”
아멜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레텔을 바라보았다.
“그래, 모처럼의 기념품이니까 사 줘.”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건가요?”
“그런 거지.”
“좋아요, 살게요.”
아멜리아는 가격도 묻지 않고 지갑을 풀었다.
비록 꿈이라고는 하나 스승님과의 추억이 담긴 꿈이다.
거기다가 시우를 스승님께 보여 드리며 자랑도 했고 다 함께 단란한 집 청소도 했다.
나중에 가끔씩 본다면 의미 깊은 추모가 될 수 있을 듯했다.
“정말 고마워요.”
그레텔이 포장한 묘안석을 받아든 아멜리아는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본래 의도가 순전한 선의는 아님을 짐작하고 있다 해도 고마운 것이다.
“천만에.”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기에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그레텔.
그래도 용돈 벌이 겸 좋은 일을 한 것 같아 마음이 좋았다.
다음 고객은 샤론이었다.
“네…? 제 꿈이요…?”
“그렇다니까.”
“혹시, 혹시 보신 건 아니죠?”
“안 봤어. 물론, 내가 계속 가지고 있으면 호기심에 볼지도 모르지. 어쩌면 실수로 잃어버릴 수도 있고.”
확실히 주변에 보니 구매하지 않은 듯 보이는 묘안석이 많다.
이렇게 둔다면 심심해서라도 언젠가 한번은 구경하지 않을까?
샤론은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딱히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샤론 슈퍼리치 에버그린이니 뭐니 하는 주접이란 주접은 죄다 떨었다.
그걸 누군가 보게 된다고?
어쩌면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사실상 구매하라는 반협박이나 다름이 없다.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받아내려는 호객꾼보다 질이 나쁘다.
“뭐가 걱정이야? 어차피 사 줄 거잖아.”
“가격이 얼마인데요?”
“40만 달러. 현물도 받아.”
“사, 사, 사십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이거 제 꿈이잖아요! 가지려면 저작권료 내요! 내가 돈을 받아야지!”
40만 달러라니.
게헨나 금화로 환산해도 600파운드 가까이 된다.
그 돈이면 한 달은 아무 걱정 없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다.
바가지도 이런 바가지가 없다.
“그러면 반값에 해줄게. 20만 달러.”
그레텔은 바가지를 씌우려던 상인처럼 가격도 팍팍 깎아주었다.
“크흑…. 진짜, 이게 뭐야…. 저 진짜 돈 없어요….”
“그래서 반이나 깎아주잖아.”
샤론은 눈물을 글썽거렸지만 결국 포기했다.
힘으로 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곧 시우의 검사를 맡게 될 마녀다.
괜히 비위를 거슬렀다가 대강대강 하면 어쩌겠는가?
아마 그레텔은 그것까지 계산해 굳이 진료 전에 이런 거래를 주선했을 것이다.
“금화 하나, 그 이상은 못 줘요.”
“얼마를 후려치는 거야? 그거론 이 묘안석도 못 사.”
“거짓말 말아요! 이거 문스톤 재질이잖아요!”
제물로 자주 사용하는 만큼 보석에 빠삭한 샤론은 아득바득 우기며 흥정을 시도하자 그레텔은 한숨을 푹 쉬었다.
어차피 남의 꿈 영상을 손에 쥐고 있어서 그레텔에게 떨어지는 건 없다.
예상했던 가격에 한참 미치지 않아도 팔아치우는 게 이득이다.
“금화 백 개로 하자. 나도 그 이상은 양보 못 해.”
“좋아요. 이거면 될 거에요.”
샤론은 손톱만 한 빨간 루비를 테이블에 올렸고 그레텔은 그것을 꼼꼼히 살펴보고 품에 넣었다.
마지못한 거래였다.
“짐의 꿈을 짐더러 사란 이야기냐?”
다음 손님은 르뤼에였다.
그리고 그녀를 비밀의 방에 들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텔은 후회했다.
그 동안 베일에 감싸여있던 옛 마녀 중 하나 ‘심해의 마녀’.
다른 이라면 몰라도 르뤼에 누켈라비에게 만큼은 괜한 흥정을 하지 않은 편이 좋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들은 불청객이다.
귀족 예법에 뿌리를 둔 마녀 사회의 생리로 보았을 때 호스트는 불청객일지라도 기꺼이 손님으로 대접하고, 대신 손님은 호스트에 억지에 다소간 발맞춰주는 것이 정상이다.
앞선 세 사람이 별말 없이 ‘기념품’이라는 뻔한 말에 어울려 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눈앞에 검푸른 장발을 치렁이는 마녀에겐 그런 상식이 없는 듯했다.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까는 것이 오만불손과 안하무인이라는 단어를 의인화한 듯한 태도다.
“잔꾀를 부리는 꼴이 우습도다. 안 그래도 헛물을 잔뜩 켠 느낌이라 실로 부아가 치밀커늘. 좋다. 결정했느니라. 짐의 심기를 거슬렀으니 네가 위자료를 내놓아라.”
“아니….”
“이 보잘것없는 저택이 짐의 파도에 쓸려가는 데 몇 초가 걸릴 것 같으냐? 3초다. 내기해도 좋으니라.”
“잠깐….”
“위자료는 100억 달러다.”
르뤼에의 눈동자에서 희푸름한 빛이 번지기 직전.
그레텔은 손을 들었다.
“대신 사은품도 줄게!”
“사은품?”
“당신이 좋아라하는 남자의 꿈이야. 그 정도면 되겠어?”
솔깃한 듯 마력을 가라앉히는 르뤼에.
“호오, 들어나 보겠도다.”
그레텔은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연인의 이상향을 알게 된다면 유익할 것이라는 헛소리까지 늘어놓으며 말이다.
“뭐 저런 망아지 같은 여자가 다 있어?”
결국 르뤼에는 원가에 한참 밑도는 푼돈을 던져주고 남자 마녀와 제 꿈이 담긴 묘안석을 사갔다.
이제 과몰입으로 꿈을 추출하지 못한 티페레트 공작을 제외하면 검의 마녀 린네만 남았는데….
“관두자.”
그레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로시는 공적이긴해도 그나마 말이 잘 통하는 마녀였다.
‘검의 마녀’는 그레텔이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인물이다.
게다가 꿈 내용이 꿈 내용이다보니 괜한 장난을 치려다가 정말 죽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용돈벌이는 정리하고 이제 진료를 위해 나서려는 그때.
“영혼의 마녀.”
초청하지도 않은 린네가 비밀의 방에 발을 들였다.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채로.
새파랗게 날이 빛나는 검을 뽑아든 채 말이다.
“내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