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821화 (821/917)

#821

1.

거대한 힘의 와류를 정면 돌파해 끝끝내 ‘벤다’라는 계약을 달성한 엘로아.

특이점을 생성하여 투척한 시우.

어느 쪽이 승리해도 이상하지 않은 대격돌이었다.

-파직

정교한 금속 장치가 조각나는 소리가 울린다.

격돌이 끝나고 시우의 머리 위 맹렬히 회전하던 천사의 고리가 뒤늦게 잘려나가는 소리였다.

실로 무시무시한 일격이었다.

과정을 도외시해 결과만을 도출하는 참격.

엘로아는 검의 궤적에 놓인 모든 것을 일도양단했다.

미증유의 마력이 응축되어 인력을 발하던 특이점도.

그에 못지않은 마력을 화수분처럼 뿜어내던 천사의 고리도.

저 드높은 창공에서 둥글게 소용돌이를 일으키던 적란운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위치한 공간마저도.

찢어진 장막처럼 기이하게 일렁이던 공간이 수복되는 장면을 보며 시우는 귓가에 오소소 선 솜털을 느꼈다.

방금 일격은 명백히 이상했다.

비단 위력뿐만이 아니다.

격투게임으로 치자면 모션 전체에 무적판정을 받은 베기 공격.

최고의 출력으로 저지하려 들었음에도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그토록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그녀를 인지했을 땐 ‘베는 동작’이 끝난 이후였다.

-슈우우우우웅!

천사의 고리가 끊어지자 격렬하게 끓어올랐던 마력의 출력이 바닥까지 떨어진다.

다시 마력을 증폭할 여력은 없었다.

하긴 아무리 꿈속이라도 그만한 마법을 부렸는데 남는 힘이 있다면 이상한 일이리라.

하지만 그건 방금 일격에 마지막 계약 하나까지 할애한 스승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즉.

시우의 승리다.

“시우, 잘했네.”

엘로아는 목울대 바로 앞에서 멈춰선 붉은가지를 보며 싱긋 웃었다.

흙먼지가 잔뜩 묻고 머리카락은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졌지만, 그럼에도 역시 스승님.

웃을 때의 미모는 여전하시다.

“아닙니다, 이건…. 말하자면 치트를 쓴 거죠.”

“그렇겠지. 이젠 알겠네.”

씁쓸한 웃음을 짓는 스승님을 보며 시우는 창을 치웠다.

첨탑에서 마주했을 때의 편집증적인 집착은 엿볼 수 없었다.

언제나 보았던 스승님이다.

“그나저나, 더 강해지신 거 아닌가요?”

“사랑하는 제자가 위험만 몰고 다니는데 어찌 스승이 되어서 앉아만 있을 수 있겠는가?”

애정 가득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시우는 전투를 곱씹고 있었다.

전투 중 핏속을 짙은 농도로 채웠던 아드레날린의 여운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스승님이 방금 전 일격에서 천사의 고리가 아니라 목을 노렸다면.

과연 그때도 시간에 맞았을까?

새로 떠올린 힘에 익숙지 않았다지만 이만한 사기를 쳐도 싸움이 비벼지는 걸 보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강함을 얻게 된 연유까지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자 재차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번에는 그대가 나를 구해주었군.”

“사랑하는 스승님이 절 구하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한 번쯤은 저도 노력해야죠.”

“말은 청산유수구나.”

엘로아는 조심조심 시우에게 다가가 이마를 가슴에 툭 기댔다.

시우는 어깨를 꽉 안아주었다.

“면목이 없네.”

스승님의 어깨와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잠시만 이대로 있어주게나….”

정말 이것이 꿈이라면, 부정하고만 싶었던 진실을 다시 받아들여야 했으니까 말이다.

두 사람은 발을 맞춰 저택까지 느릿느릿 걸었다.

지평선 끝까지 펼쳐졌던 라벤더 숲이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조금씩.

아름답게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2.

이면결계를 걷어내고 공작 가로 돌아왔을 때.

정원 밖까지 나온 라피가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따뜻한 물수건을 들고 말이다.

“어휴, 하여튼 두 분 때문에 내가 진짜 못살아.”

“라피.”

“야밤이 이게 뭐예요. 잠도 못 자고 기다렸다고요.”

라피는 툴툴거리면서도 물수건으로 엘로아와 시우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이건 꿈이다.

미련과 어리석음이 응축된 꿈.

바깥에서의 기억도 돌아왔다.

엘로아는 이제 현실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제자,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게 된 라피의 손길이 섬세히 뺨을 어루만지자 뱃속에 무언가 치솟는 느낌이 들었다.

배에서 시작된 끈적대는 열기가 목구멍을 뜨겁게 스치는 걸 느꼈을 때.

라피가 닦아내어 준 보람도 없이 또 눈물로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제 헤어져야 한다.

느릿하게 부서지는 이 세계가 사라진다면 이 목소리도, 손길도, 사랑스러운 눈동자도 다시 볼 수 없게 된다.

언제나 원하지 않았던가?

딱 한 번만 더 라피를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다시 그녀를 안고 사랑한다는 말을 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날 저질렀던 실언에 대해, 마녀의 오만함에 대해 사과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바램은 이루어졌다.

비록 상상에 불과할지라도 어떤 상상보다 정교하게 구현된 마법의 꿈속에서 엘로아는 다시 라피를 만났다.

하지만 이렇게 만나게 되니 더욱 커다란 욕심이 생긴다.

조금 더 있고 싶다고.

이대로 영원히 꿈속에 파묻히고 싶다고.

한없이 바라게 된다.

“스승님.”

뿌옇게 흩어진 시야를 소매로 훔치며 앞을 보았다.

“라피는요. 정말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어요.”

꿈의 주인이 꿈을 자각한 순간 그 안의 다른 인물 역시 허위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

시우의 아버지와 말리카 메리골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곳의 라피는 엘로아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한없이 진짜에 가까운 가짜이니 당연한 일이다.

“저 때문에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으신 거잖아요.”

라피는 웃고 있었다.

현실에서 붉은 연꽃은 부서졌다.

라피는 죄악의 대가로 되살아난 게 아니다.

그 어떤 것보다 그것이 안심된다는 양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스승님이라면 언제나 올바른 길을 선택하실 거라고 믿었어요.”

올곧은 라피의 말을 듣는 순간 엘로아는 가슴 속에서 헝클어지는 불협화음을 느꼈다.

미안함, 고마움, 후회, 안도, 안타까움, 부끄러움, 수치심이 일제히 뒤엉킨다.

저 자신이 어떤 얼굴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숨고 싶고, 도망치고 싶었다.

허나 이제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제자와의 마지막을 그런 식으로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엘로아는 짓씹듯 제 본심을 고했다.

“나는, 올바르지 않네…. 후회에 잠기고 복수에 미쳐 배회했을 뿐이야. 그 어디가 올바른 길이란 말인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기에 그 분노를 공적에게로 돌렸다.

라피의 유언이 ‘인간을 지키고 싶다’였기에 위치포인트를 설립하고 호문쿨루스를 토벌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땐 삶의 모든 순간이 고문 같았지만, 정의를 부르짖으며 검을 휘두를 때만큼은 회한과 괴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어떨 때는 새까만 환희마저 느꼈다.

그러므로 거기에 정의는 없었다.

그럴듯한 껍데기에 포장된 볼품없는 자기만족이 놓여있을 뿐이다.

“스승님.”

라피는 엘로아를 껴안았다.

“아니에요, 제가 아는 스승님은 그런 분이 아니에요. 그렇죠?”

갑자기 시우에게 날아온 질문.

하지만 시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가 지켜봐 온 엘로아는 누구보다 올곧으며 고결한 인물이었다.

아픔을 겪은 사람이 언제나 같은 선택을 하는 건 아니다.

엘로아에겐 무수한 선택지가 있었다.

개중에는 이 꿈처럼 공적이 되는 길도, 자포자기하며 다음 계승을 준비하는 길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길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엘로아는 수많은 갈림길 앞에서 힘들고 괴로운 과거를 짊어지고 나아가길 택했다.

무수한 생명을 구했고, 무수한 악을 제거했다.

그건 누가 뭐래도 ‘올바른 길’임이 틀림없다.

다만 그녀가 자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결과’에만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에만 체류하는 인간은 현재를 바라볼 수 없는 일이니.

“스승님, 저는 스승님이 괴로워하시는 것보다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

“그래서 시우 오빠를 봤을 땐 기뻤어요.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시려는 것 같아서요. 그게 왜, 추모하는 거랑 영원히 괴로워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요.”

요령없는 스승님을 달래듯 라피의 목소리는 조곤조곤했다.

“멋진 남자 친구도 생겼잖아요?”

“…….”

엘로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웠던 라피의 체취 속에서 그녀의 가슴께가 방울방울 젖어간다.

“그렇다면…. 이제 나를….”

목구멍에 걸린 것 같은, 입에 담기에는 염치가 없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웠기에 영영 묻어두려 했던 그 말이.

간신히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용서해 줄 수… 있겠나?”

이 말은 라피를 향해 구하는 용서일까?

아니면 엘로아 자신을 향한 공허한 읊조림일까?

이것이 꿈이라면 이조차도 허망한 자기만족에 그치는 게 아닐까?

바스러지던 세계는 어느덧 저택 근처까지 범위를 조여왔다.

결별의 순간이 다가온다.

“어휴, 갑갑이 스승님. 아시잖아요.”

라피는 엘로아를 잠시 품에서 빼내었다.

그리고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저는 한 번도 원망한 적 없는걸요.”

엘로아의 입이 살짝 벌어지고, 다 물렸다.

꽉 깨문 입술 사이로 웃음도 울음도 아닌 기묘한 꿈틀거림이 흘렀다.

실은 알고 있었다.

라피라면 분명 그럴 것이라고.

원망이나 사과를 바라기는커녕 엘로아의 행복만을 기원했을 아이라고.

백년의 세월 동안 자신을 벌하던 엘로아가 마주한 진실은 특별히 놀랍거나 기발하지 않았다.

당연히 떠올릴 수 있던 대답을 뒤늦게 들춰내는 것에 불과했다.

그저 이제야 받아들일 수 있었을 뿐이다.

엘로아는 쓱쓱 눈물을 닦았다.

“라피, 네게 약속하마. 나는 앞으로도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 정의를 위해 싸울 것이야.”

그것은 다짐이되, 꿈에서나마 미혹에 흔들렸던 자신에게 들려주는 각오였다.

손에 쥔 계약검이 빛난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계약한다.

이 검은 앞으로도 약자와 선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휘둘러질 것임을.

“어차피 말려도 듣지 않으실 거면서.”

라피는 툴툴 거리면서도 쓰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키스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

라피의 이마에 입을 맞춤과 동시에 아직 형태를 유지하던 꿈의 자투리가 허물어졌다.

“많이 사랑해요, 어머니.”

“나도 그렇단다. 라피.”

새끼를 잃은 어미는 기나긴 방황 끝에 스스로를 용서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