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8
1.
연구대 위에 올라 손을 잡은 채 작은 숨을 내쉬는 두 사람, 시우와 엘로아.
마법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모르면 아주 깊은 잠에 빠졌다고 해도 좋을 만큼 편안한 표정이었다.
“왜 나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데? 어차피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니까?”
연인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서성이는 가운데.
그레텔 혼자 홍차를 홀짝이며 투덜거렸다.
이것저것 귀찮기에 변명 삼는 거짓말이 아니다.
자율방어가 발동할 만큼 몰입해버렸다면 꿈을 엿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꿈은 전부 염탐했지만 티페레트 공작의 꿈만은 볼 수 없지 않았던가?
한 명이 총대 메고 다이브를 해 꺼내오던가.
안에서 흐르는 시간 비율을 조작하는 게 고작이다.
“별일 없을 거라니까 그러네.”
전투용 사살 마법도 아니고, 흉악한 정신 조작이나 저주 계열도 아니다.
그런데도 꼭 옆에서 지켜보고 있어야 한단다.
비상시 응급처치를 해달라는 명목하에 그레텔까지 떠날 수 없게 한다.
그레텔은 연인들의 과민 반응이 귀찮기 짝이 없었다.
“혼자서만 들어가야 하는 게냐?”
“둘 이상은 불가능해.”
“흐음, 아쉽도다. 분홍 공작의 꿈은 짐도 많은 관심이 있었거…. 흡….”
함께 따분해하며 하품을 흘리던 르뤼에의 입을 도로시가 조용히 막았다.
다소 주의가 부족한 르뤼에가 의도치 않은 탈룰라를 하지 않게 방지한 것이다.
“여왕님, 티페레트 공작님은요. 아마도….”
“헛….”
자세한 사정을 듣고 숙연해지는 르뤼에.
“그거 정말 안타까운 일이니라….”
어릴 때부터 잠수함에서만 살다가 얼마 전에 나온 그녀로선 몰랐던 사실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상 더욱 그랬다.
하지만 듣고보니 슬픈 내용이었다.
르뤼에는 나중에 날을 잡아 혼쭐을 내주려던 분홍 공작을 봐주기로 했다.
마음이 아픈 사람을 괴롭히는 건 여왕의 위신을 깎아내는 짓이다.
“아무튼 귀신의 마녀, 짐의 국서와 분홍 공작에게 아주 작은 문제라도 생긴다면 짐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시던가.”
“그러시던가? 지금 짐에게 그러시던가라고 말한 것이냐?”
실로 예의를 모르는 말버릇에 르뤼에가 분개하려던 그 찰나.
-덜컹!
별안간 두 사람이 누워있는 연구대가 흔들렸다.
-우우우웅!!!
붉은가지를 겨누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엘로아의 주위로 자율방어가 생성된다.
그때와 차이점이 있다면 이번엔 손을 잡고 나란히 누운 시우까지 그 범위에 포함했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죠?”
갑작스러운 현상에 깜짝 놀라 묻는 아멜리아.
“뭐, 뭐야?”
그러나 대답을 해줘야 할 그레텔이 제일 놀라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연구 자료에서도 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너무 놀란 나머지 찻잔을 떨어뜨린 그레텔의 목에 서늘한 감촉이 맞닿았다.
직접 닿지 않았는데도 피부가 잘려나갈 것 같은 예기가 묻어나오는 일본도가 그레텔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당장 멈춰라.”
“나는! 나는 몰라! 내가 한 게 아니라고!”
“그 헛소리를 믿으라고? 우습게 보였나 보군.”
“난 의사야! 목에 칼이 들어와도 환자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아! 그리고 내가 미쳤어? 너희가 눈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는데 용의자가 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딴 짓을 왜 해?”
그레텔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꿈속에선 워낙 터무니없는 모습을 보이기에 방심하고 있었지만 상대는 ‘검의 마녀’다.
정말로 똑 하고 목을 쳐낼지도 모른다.
“린네, 진정해. 그레텔, 네 결백을 증명하고 싶거든 방법을 찾아.”
도로시는 그레텔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녀란 그 무엇보다 제 목숨을 소중히 하는 족속이다.
둘 중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그레텔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도로시가 행여 말을 바꾸는 게 두렵다는 듯 그레텔은 뭐라도 하는 시늉을 하기 위해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2.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진실을 밝혀도 듣질 않고, 들으려는 시도조차 없다.
차라리 완고하기만 한 스승님의 모습을 보았다면 모를까.
처연하게 어깨를 들썩이는 엘로아의 눈물에 시우가 할 수 있는 건 달리 없었다.
이 시점에서 시우가 떠올릴 수 있는 해결책은 한 가지.
붉은가지로 비틀림의 근원이 연꽃을 파괴하는 것뿐이다.
사실 악몽의 근원이 연꽃이라고 확신할 만한 명확한 단서는 없었다.
그저 직감이다.
그러나 꿈은 무의식의 통로.
꿈을 구성하는 소재는 무의식을 재료 삼아 만든 것이다.
이렇게 추측하자면 당사자로서 낯부끄럽긴 한데….
아멜리아의 꿈은 오두막에서 이루어졌다.
그녀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과 가장 괴로웠던 시절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 오두막에서 아멜리아는 스승님을 배웅했고 시우와 둘이 남았다.
스승님께 지녔던 미안한 마음과 원망을 승화했으며 그 빈자리를 채운 게 신시우라는 것.
이게 해몽이다.
그렇다면 막대한 희생을 대가로 라피를 되살린 연꽃은 어떨까?
이 세계관의 핵심 재료에 아무런 역할이 부여되지 않았을 리 없다.
조사할 가치는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시우의 시도는 즉각 제지당했다.
분명 다른 감시 장치는 없었는데 지금쯤 잠자리에 들었어야 할 엘로아가 시우의 뒤를 쫓은 것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도 확신이 선다.
브로치에 편집증적인 거부감을 느꼈던 이유가 ‘신시우를 꿈에서 빼내는 장치’이기 때문이라면.
그녀가 연꽃에 묘한 집착을 보이는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시우, 그 브로치를 내놓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 엘로아는 손을 내밀었다.
몹시 단호한 표정과 말투였다.
이 브로치는 지나친 몰입에 휘말렸을 경우를 위한 탈출장치다.
그녀에겐 줄 수 없는 물건이다.
“스승님, 말씀드렸지만 이건 샤론에게 주려고 한 물건이어서요. 스승님께는 다른 걸 드릴게요.”
“내가 간곡히 부탁해도 어렵겠나?”
“…네,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번쯤 생각해봐야 했다.
지금 자신이 일을 너무 쉽게 보는 건 아닌지에 대한 여부를.
엘로아는 담담히 말했다.
“내 예상대로군. 그대는 지금 속삭임의 마녀에게 홀려 있네.”
그리고 스승님을 보는 순간 깨닫는다.
뭔가 단단히, 정말 단단히 잘못됐다.
“스승님 그게 무슨 말….”
-부웅!
서슬퍼렇게 휘둘러진 검의 정체는 티페레트의 예장 ‘계약검’.
반사적으로 몸을 빼내지 않았더라면 가슴팍에 달아두었던 브로치가 깨져버렸을 것이다.
등골이 오싹해진다.
이 브로치는 탈출 장치다.
만약 브로치가 깨진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엘로아가 그렇듯 이 꿈에 휘말려 버리는 게 아닐까?
“스승님!”
어느덧 그녀의 눈에는 불똥 같은 분홍색 빛무리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두 눈동자에도 의지와 투지가 깃든다.
“기생충 중에는 숙주의 행동을 조작하는 것들이 있네. 숙주를 익사하게 하거나, 일부러 잡아먹히게 하는 것들이지. 비겁의 마녀가 하는 짓도 비슷하네. 조종당하고 있다는 인식조차 없이 파멸로 달음박질하게 하는 게야.”
왜 단정 짓고 있었을까?
이 세계관의 스승님이 실제 스승님과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꿈은 욕망뿐 아니라 억압이 해방되는 공간이 아니던가?
이곳의 스승님은 스승님이지만, 시우가 언제나 보아오던 스승님과는 다른 존재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속삭임의 마녀랑은 접점도 없었습니다!”
“그대는 연꽃을 파괴하려 했네. 그게 정말 그대의 의지라 확신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조사 차원에서….”
“그렇다면 왜 나와 싸우려 드는 겐가?”
시우는 흠칫 자신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어느샌가 몸을 그림자의 갑주가 감싸고 있다.
건틀렛에 붉은가지가 쥐여 있다.
의지와 상관없이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변화다.
“그대가 속삭임의 마녀에게 홀려있다면 정상적인 판단은 어려울 걸세.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을 테지.”
“스승님….”
“이곳은 결단코 꿈이 아니라네 시우.”
그렇다면 이 변화를 불러온 건 엘로아의 확증편향.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이끌기 위해 현실 자체를 조작한 것이다.
만약 두 사람이 힘으로 이 갈등을 해결하려 든다면 시우는 결코 엘로아를 이길 수 없을 것이고, 엘로아는 의지를 관철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계약한다.”
엘로아의 영창과 함께 이면결계가 뻗어 나간다.
나선 계단의 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서서히 일그러진다.
그녀가 검을 다잡는 것이 보였다.
“창을 들게.”
이제야 알았다.
너무나 한심해 제대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언제나 고결하고 정의로우며 긍지 높았던 스승님.
시우는 엘로아의 눈에 보이는 면모만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뒤늦게 알게 된 엘로아의 속내는 여전히 곪아 있었다.
“크게 다치지 않게 힘 조절할 걸세.”
사랑하는 제자에게 검을 겨눌 만큼이나.
그렇게 해서라도 제 자신을 애써 속이며 진실을 외면할 만큼이나.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꿈속에서 자신이 가장 괴로운 역할을 떠맡을 만큼이나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정도 일 줄 몰랐다는 말은 변명에 불과하다.
연인을 자처하면서도 강한 척하는 스승님의 허세를 간파하지 못한 건 명백히 자신의 한심함 탓이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사랑하는 것만이 연인의 역할이 아니다.
울분을, 비탄을, 슬픔을, 받아내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나누는 것 역시 시우가 져야 할 책임이다.
“검사는 검으로 말하는 거라고 하셨죠?”
또한 연인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려 할 때 그 손을 붙잡아주는 것 역시 시우의 역할이다.
“피어라.”
시우는 창을 들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