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817화 (817/917)

#817

1.

오한이 스몄다.

라벤더 군락을 뒤덮는 진눈깨비.

보랏빛 물결이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거친 숨소리가 되어 귀를 때리는 듯했다.

선반 위에 다소곳이 놓인 붉은 연꽃은 이 세계관을 파악하게 해주는 두 가지 단서를 시사한다.

하나, 라피는 한번 죽었다.

둘, 라피는 붉은 연꽃으로 되살아났다.

여기에 주변 풍경과 오늘 엘로아가 보여준 모습에 추론을 더하면 추가적인 가설을 세울 수 있다.

하나, 엘로아 티페레트는 라피의 부활을 위해 제물을 바쳤다.

둘, 그로서 공적이 되었으며 게헨나를 등졌다.

아마도 시우는 그런 엘로아를 따라 게헨나를 뛰쳐나온 상태일 테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스승님은 라피를 살릴 수 있던 기회를 당신의 손으로 끊어내셨다.

만약 그 시점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아무리 올곧은 그녀라도 수만 번에 한 번쯤 이런 선택을 했을 법하다.

이 세계관은 허무맹랑한 망상이 아니라 충분한 개연성을 토대로 구축되어 있는 것이다.

“…대체 왜?”

그렇기에 설명이 되질 않는다.

그레텔의 설명에 따르면 해피피그가 그려내는 꿈은 유토피아다.

존재 자체로 완벽하고, 이상적이며, 현실에선 존재할 수 없는 공간.

인간은 완전한 소망을 꿈꾼다.

그것이 비현실적이기에 더더욱.

라피는 죽은 적이 없었어요.

엘로아도 붉은 연꽃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죠.

시우와 엘로아와 라피 세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정도면 충분히 이상적이다.

낙인을 넘겨주고 죽은 말리카가 아멜리아의 꿈속에선 돌아올 수 없는 먼 여행에 떠났던 것으로 치환된 것처럼 말이다.

차라리 개연성을 포기하면 포기했지 이런 일그러짐 따윈 필요 없다.

원인은 모르겠으나 결론은 단순하다.

여긴 유토피아가 아니다.

적어도 시우, 린네, 아멜리아와는 경우가 다르다.

-우우우웅!

별안간 붉은 연꽃이 부르르 떨렸다.

자신이야말로 이 일그러짐의 중추라고 말하는 듯하다.

새빨간 진홍으로 치장된 연꽃은 요사스럽고도 오묘하다.

“시우.”

너무 골몰히 생각에 잠겼었나 보다.

등 뒤에서 바짝 들려오는 소리조차 눈치채지 못한 걸 보면.

“스승님.”

거기엔 하얀 잠옷 차림의 엘로아가 서 있었다.

어쩐지 가슴이 서늘해졌다.

시우의 얼굴과 붉은 연꽃을 번갈아 보는 그녀의 눈빛은 읽을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

깊은 수심에 잠긴 것 같기도 하고,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가볍지 않은 각오와 단념이 서려 있다.

“떨어지겠나?”

“아, 네.”

우선 붉은 연꽃에서 물러났다.

창밖에는 더더욱 강한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유리창이 덜컹거리며 라벤더 군락의 숨소리가 한층 커졌다.

“…….”

엘로아는 침묵을 지키다가 시우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매달릴 곳을 찾는 듯한 손끝이 팔뚝을 꽉 잡는다.

“그대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네.”

“아닙니다.”

“알고 있네. 그대는 상냥한 사람이라는 걸. 날 용서해도 내 결정을 용서할 수 없겠지.”

“…….”

만약 이것이 현실이라면 시우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엘로아의 말대로다.

그녀가 저지른 짓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스승님을 미워하는 건 더더욱 힘들 것이다.

설령 잘못된 길을 바로 잡으려 해도 더 없이 행복해 보이는 엘로아를 볼 때마다 주저하겠지.

죄를 덮고, 과거를 덮고, 후회를 덮는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문제에 눈을 돌리고, 눈앞의 평화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렇게 엉성한 허위로 도금된 안식이 완성된다.

세 사람은 모두 같은 마음일 것이다.

“나가세.”

“알겠습니다.”

시우와 엘로아는 마땅한 대화를 나누지 않고 공방에서 내려왔다.

“…….”

시우의 역할은 지나치게 몰입해 유착이 일어난 엘로아의 꿈을 자각몽으로 전환하는 것.

사실을 전달하길 망설였던 이유는 그녀의 소망을 무참히 짓밟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어둠이 도사린 꿈이라면.

행복한 동화가 아니라 이상향을 그럴듯하게 그려낸 악몽일 뿐이라면.

차라리 진실을 전달하는 게 옳다.

“스승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들릴 거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이건 꿈입니다. 현실이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인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는 엘로아의 표정.

예상대로 오늘 낮 시우와의 접촉에도 그녀는 조금의 자각도 지니지 못했다.

아마 지나치게 몰입했기 때문이겠지.

“저희는 영혼의 마녀를 찾고 있었습니다. 국립공원 낙엽송림에 들어섰을 때 해피피그라는 호문쿨루스를 만났죠. 행복한 꿈을 꾸게 해주는 호문쿨루스입니다.”

시한부 환자에게 사실을 통보하는 의사의 심정이 이럴까?

아니.

이건 그보다 훨씬 책임이 무겁다.

시우가 사랑하는 엘로아에게 직접 비극을 전해야 하는 일이니까.

“…….”

“스승님도 어렴풋이 눈치채지 않으셨나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꿈 속의 당사자는 위화감을 눈치채기 어렵다.

비연속적인 사건의 진행도, 앞뒤 맥락이 틀어진 인과도 자연스레 수용하게 된다.

시우는 그 모순점을 에둘러 일깨워주려 했다.

엘로아가 너무 충격받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시간을 들여 위로해주고, 진실을 전달키로 했다.

“가령….”

“시우.”

날카로운 칼날이 심장을 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 단호하고, 막아낼 여지가 없는 날카로운 기백이었다.

“그 입 다물게.”

“스승님….”

“아무리 그대라도 잠자코 들어줄 수 없는 망언이 있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돌변한 분위기.

브로치를 발견했을 때의 모습과 같다.

차분하게 이성적인 사고를 짚어가는 게 아닌, 편집증적인 거부감.

시우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이 불쾌하다기보다는, 듣고 싶지 않다는 공포감이 먼저 엿보인다.

흡사 상처 입은 짐승에게 손을 뻗자 이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시우, 차라리 날 비난하게. 몇 번이고 무릎을 꿇고 그대에게 용서를 구하겠네.”

“…….”

“내 옆에만 있어준다면…. 내게 어떤 짓을 해도 좋네. 그대의 요구라면 뭐든 받아들이겠네. 진심일세.”

조금 전 매섭게 달아올랐던 눈동자는 어디 간 걸까?

어깨를 움츠린 채 흐느끼는 엘로아.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스승님에겐 이 세계가 행복의 한계선이다.

일그러진 이상향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시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2.

엘로아는 벌게진 눈가로 침소로 돌아왔다.

엘로아와 시우가 함께 쓰는 침대가 아닌 라피의 방이다.

몸을 웅크린 라피는 색색 콧소리를 내며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견습마녀는 일찍이 잠이 들 시간인 것이다.

“…….”

엘로아는 그녀의 머리맡에 앉아 라피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정말 곤히도 잔다.

엘로아의 입가에 애달픈 미소가 매달렸다.

비겁의 마녀에게 연꽃을 강탈해 라피를 되살린 직후의 일이 떠올랐다.

부활의 진상을 알게 된 라피는 무슨 짓을 한 줄 아느냐고, 왜 살려냈느냐고 화를 냈다.

울고, 날뛰고, 때리고, 소리를 지르며 엘로아를 원망했다.

당연한 일이다.

라피는 사랑하는 스승님이 자신을 위해 죄악을 저지르는 걸 원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라피는 엘로아를 용서했다.

안아주었고, 뺨에 입을 맞췄다.

엘로아의 독선과 이기심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한들 그 근간엔 사랑이 있음을 이해해주었다.

시우도 그러했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엘로아는 조용히 방문을 나서며 고민에 잠겼다.

왜 시우는 새삼 한 번도 가까이하지 않던 연구동에 발을 들였을까?

무슨 생각을 품고 붉은 연꽃 앞에 오도카니 서 있었을까?

갑자기 이 모든 게 꿈이라는 터무니 없는 망상을 늘어놓았을까?

모든 걸 등 돌리고 손에 넣은 작은 안식이 일장춘몽에 불과하다면 현실은 어떻단 말인가?

엘로아는 뱃속이 얼어붙는 것 같은 한기를 느꼈다.

무의식이 고하고 있다.

더 의식해서는 안 된다고.

진실을 들여다보아선 안 된다고.

그 진실은 엘로아 티페레트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나까지 흔들리는군….”

엘로아는 사고를 멈추었다.

이윽고 그런 발상을 떠올렸다는 사실조차 망각했다.

찌르는 듯한 편두통이 관자놀이를 관통했을 뿐이다.

엘로아는 불현듯 떠올렸다.

오늘 시우가 달고 있던 검은 브로치.

엘로아의 본능적인 위기감을 자극했던 그 물건은 단순한 보석 세공품이 아니라 아티펙트였다.

또한 원래 시우의 물건도 아니다.

시우의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와 브로치의 등장은 공교롭게도 겹친다.

“설마….”

엘로아는 침음을 삼켰다.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한 이명은 ‘속삭임의 마녀’.

마녀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는데 힘쓴 케테르와 정반대로 혼란을 야기하는 흑막.

엘로아도 오랜 기간 그녀의 뒤를 쫓았지만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다.

모든 게 베일에 싸인 릴리스는 흔들리는 인간에게 사이한 유혹을 불어넣는다.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욕망에 잠식되게 만들어 파멸로 이끈다.

영혼의 마녀는 처음 듣는 이명이었다.

릴리스는 언제든 인식을 조작하고 언제든 다른 마녀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다.

만약 번민하고 고뇌하던 시우에게 릴리스가 접근한 것이라면?

그 브로치가 릴리스의 독니라면?

실로 그럴듯하다.

시우는 엘로아를 이해한다고 말했고, 용서해주겠다고 말했다.

피 묻은 손으로 간신히 지켜낸 보랏빛 안식을 눈감아 주겠다고 말했다.

그게 꿈이라니, 현실이 아니라니,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니.

새삼 그렇게 말할 리 없다.

드넓은 저택.

시우가 어디에 있는지 본능적으로 깨달은 엘로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첨탑으로 이어진 나선 계단을 주파하던 엘로아가 우뚝 멈춰 선다.

시우는 놀란 표정으로 엘로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발과 동작은 계단을 올라 붉은 연꽃으로 향하던 모양새다.

예상대로였다.

“시우, 그 브로치를 내놓게.”

지금의 시우는 정상이 아니다.

분명 속삭임에 홀려있다.

엘로아는 확신했다.

두 제자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

이곳에 있는 죄인은 오직 엘로아 티페레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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