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6
1.
“드럽게 어렵네.”
그림을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다.
소년 시절로 회귀했을 무렵 보호자 역할을 해주었던 아멜리아에게 조금 가르침 받은 것이 전부.
그래서인지 당장 갤러리에 걸어놔도 문제없을 라피의 풍경화와 달리 시우의 그림은 여러모로 어색했다.
특히 저 라벤더 꽃잎이 문제다.
엄청 조그마해서 한 땀씩 붓끝으로 꽃잎을 찍어 바르는 게 어마어마한 인내심을 요구했다.
“후우….”
괜스레 몰려오는 한숨.
실은 알고 있다.
오갈 곳 없는 짜증과 초조함은 단순히 라벤더 꽃잎이 극도로 정밀한 소근육 운동을 요구하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걸.
이 일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멜리아의 꿈에 들어갔을 때 걱정의 연장이었으며, 그보다 더욱 무거웠다.
가슴에 납덩어리가 내려앉은 것 같다.
어느샌가 다가온 엘로아가 시우의 손을 감싸 쥐었다.
“위에서 아래로 거슬러 쳐야 하네. 붓끝의 탄력을 이용하게나.”
“아, 스승님. 감사합니다.”
“그래도 많이 늘었구나.”
스승님의 도움이 보태진 꽃잎은 시우가 그리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뒤를 돌아보자 환히 웃고 있는 스승님이 보인다.
“라피는 어디 갔나요?”
“시우, 라피가 눈치채버린 모양일세.”
“네?”
“그대와 내가 연인 관계라는 것 말일세.”
“아.”
“정말 눈치가 빠르지 않나? 영특한 아이야.”
“그렇죠, 사매가 좀…. 안 그래도 못 숨기겠다 싶더라고요.”
그녀는 부끄러운 듯 몸일 배배 꼬더니 시우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시우도 일단은 입을 맞췄다.
“응원하겠다며 귀여운 말을 늘어놓고 자리를 비워주더군.”
“참…. 고맙긴 한데 뭔가 부끄럽네요.”
“나도 그러하네.”
역시 스승님은 스승님이다.
겉모습이 변하고, 분위기가 조금 바뀌어도 쫑알쫑알 이런 저런 얘기를 늘어놓는 그녀의 옆모습은 시우가 아는 스승님이었다.
“항상 돌봐주는 입장이었는데 스승 생각도 할 줄 알고 언제 저렇게 훌쩍 커버렸는지….”
“…….”
엘로아의 흐뭇한 미소와 별개로 시우의 마음은 무거워져 간다.
아멜리아 때처럼 그저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훗날 괴로워할 때 위로해주는 게 좋을까?
아니면 라피가 없는 지금 진실을 밝혀야 할까?
시우는 강해졌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마법적으로도.
적어도 힘이 없어 서러워하던 시절은 옛말이다.
하지만 힘이 강해졌다 해도 명쾌하게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시우.”
그때 스승님의 손이 뻗어왔다.
시우의 뺨을 쓰다듬더니 고개를 고정한다.
입술 위로 포근하게 포개지는 입술.
말캉한 혀가 문을 열어달라는 듯 입술 사이를 두들긴다.
키스를 할 심적 여유는 없었지만 이 고민은 시우만의 것이니 어쩔 수 없다.
“츄우….”
쌉싸름한 홍차의 잔향이 남은 달콤한 타액이 입안으로 넘어온다.
얄상한 혀가 매듭을 짓듯 시우의 입안에서 꼬물꼬물 움직였다.
긴 키스가 끝나자 스승님은 달콤한 한숨을 뱉었다.
그리곤 변명하듯 말을 덧붙인다.
“하아…. 라, 라피가 이런 식으로 입술 도장을 찍으라고 했네.”
사랑하는 연인과의 키스에는 위대한 진정 효과가 있다.
시우도 조금은 웃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욕심쟁이인 것 같네.”
“그렇긴 하죠.”
우물쭈물하는 손끝과 살짝 가라앉은 눈꼬리.
언뜻 알 수 없겠지만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는 스승님의 어필이다.
나름 최대한 티를 내는 것이리라.
“매일 하루 3시간. 약속하지 않았는가? 꼭 내 입으로 말하게 하니 그대는 짓궂은 구석이 있네.”
매일 하루 세 시간?
모르는 약속이다.
하지만 시우가 알기로 스승님은 육체 관계에 매진하는 편이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은근슬쩍 요구하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이 세계관에서는 다른 걸까?
꾸물거리던 스승님의 손길이 시우의 셔츠 깃에 닿는다.
단추를 풀겠다는 동작이다.
“여기서요?”
“날이 좋지 않은가? 라피도 한동안 제 방에 있을 테니….”
그렇게 시우의 옷을 벗겨나가던 엘로아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가슴팍에 매달린 검은 브로치였다.
그 순간 시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한기를 느꼈다.
두 사람 사이에 살랑이던 봄바람이 냉랭하게 변한다.
“시우, 이게 무엇인가?”
간질간질했던 스승님의 분위기가 돌변한다.
핏발이 선 눈은 혼란에 젖어 있었고 정제된 흉포함이 뚝뚝 떨어졌다.
“아….”
시우는 당황했다.
이 브로치는 시우가 꿈속에 휘말릴 경우를 대비해 그레텔이 건네준 안전장치였다.
아직 꿈 속에서의 행보를 명확히 하지 못한 이상 아직 말해줄 예정은 없었다.
또한 스승님 역시 별도의 설명이 없는 한 이 브로치를 알아볼 리 없다.
“대답해주게. 이걸 어디에서 구한 거지?”
그러나 매섭게 시우를 채근하는 엘로아의 두 눈엔 기이할 정도의 집착과 거부감이 엿보였다.
아무말이나 주워섬기는 시우의 말에도 엘로아의 눈동자가 투명한 유리알처럼 브로치의 형상을 비춘다.
“아, 이거요?”
“…….”
입안이 말랐다.
자세한 사정을 알 순 없었지만 본능에 따라 알 수 있다.
엘로아의 몰입, 즉 이상향을 향한 염원은 시우의 손길조차 위협으로 인지하고 자율방어를 발동할 수준이었다.
시우의 존재는 그녀의 이상향 속에 빼놓을 수 없을 만큼 귀중하다.
그런 시우를 꿈에서 빠져나가게 하는 장치에 무의식 레벨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리라.
이 정도일 줄 알았다면 진작에 숨겼어야 하는 건데….
“우연히 구했습니다. 그, 나중에 샤론에게 선물로 주려고요.”
“…….”
한참 멍하니 있던 그녀는 느릿하게 되물었다.
어딘가 서글퍼 보였다.
“샤론 양에게?”
“네.”
둘 사이의 긴장이 이완되었다.
우뚝 멈춰 섰던 봄바람도 다시금 귓가를 간질인다.
“그렇군, 내가 또 욕심을 부렸네. 언젠가 줄 수 있겠지.”
엘로아는 쓴웃음을 내비치며 다시 시우에게 안겼다.
2.
엘로아는 간만에 솜씨를 발휘했다.
소풍을 끝내고 곧장 저녁 준비에 돌입해 근사한 만찬을 내왔다.
궁전처럼 화려한 저택에서의 식사였으나 식탁 위로는 일반적인 가정집의 화목한 웃음이 떠나가질 않았다.
시우도 라피도 엘로아도 웃고 떠들며 음식을 먹었고 술도 잔뜩 마셨다.
식사가 끝냈을 때쯤은 너무 웃은 통에 양 볼이 뻐근할 정도였다.
엘로아는 서고에 발을 들였다.
창 밖으론 따스한 봄과 어울리지 않는 진눈깨비가 내렸다.
벽난로의 온기는 차고 습한 한기를 밀어냈다.
라피는 하늘이 내린 검의 천재였지만 독서 역시 좋아했다.
자연스레 사제는 서고에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촛대가 일궈낸 빛의 장막.
그 그림자 속 창밖을 내다보는 라피의 뒷모습이 보였다.
“라피 무얼 보고 있니?”
라피가 엘로아를 돌아보는 순간 엘로아는 심장이 떨어지듯 놀랐다.
핏기가 가신 창백한 안색.
두 손목 위로 도드라진 보랏빛 정맥.
하얀 드레스의 허리께가 검붉게 물들어 있었으니까.
“스승님!”
하지만 그건 찰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라피가 춤을 추듯 뒤를 돌아보자 덧씌워진 허상이 환영처럼 사라졌다.
팔랑팔랑 옷자락을 휘날리며 달려온 라피는 엘로아에게 안겼다.
엘로아는 그런 라피를 부서질 듯 안았다.
“삐야아앗! 스, 스승님…. 라피 팔 부숴져욧…!”
“미안하구나.”
엘로아는 무심코 웃음을 지으며 라피를 놓아주었고 라피는 두 팔을 쓰다듬으며 투덜거렸다.
“스승님도 참. 옛날 일이잖아요. 이제는 괜찮아요. 저는 지금 여기에 있다구요.”
끝나지 않는 악몽처럼 엘로아의 머릿속에 진득이 옮겨붙는다.
오만함과 안일함에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고 말았던 그때의 기억이.
“미안하구나 라피, 네겐 정말…. 몹쓸 짓을 했다.”
“스승님, 괜찮아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라피는 엘로아의 등을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엘로아는 비겁의 마녀로부터 연꽃을 강탈했다.
수만 명의 생명을 머금은 연꽃은 다시금 무고한 인간의 영혼을 빨아먹고 붉은 꽃을 피워내었다.
그것은 업.
흔들리지 않는 죄과.
라피를 살려내기 위해 게헨나를 등진 엘로아와 그런 엘로아를 따라 함께 나서준 시우.
이 평온한 일상은 모두 엘로아의 변절로 다져진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다시는 절대 너를 잃지 않을 게야.”
해피피그는 그 사람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세상으로 안내해준다.
그러나.
세상에는 백일몽으로도 덮을 수 없는 상처가 존재하는 법이다.
엘로아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아니.
단 한 번도 용서한 적 없었다.
3.
시우는 조용히 저택 복도를 떠돌았다.
아무래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우는 엘로아를 꺼내기 위해 이곳에 왔다.
스승님이 브로치를 경계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샤론의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어진 말.
“언젠가 줄 수 있겠지라….”
꼭 지금은 줄 수 없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 않던가?
그로부터 추론을 연장했을 때, 이 저택 어디에서도 다른 연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샤론을 기억하는 스승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다른 연인의 존재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극중 중요인물만 다루었던 아멜리아의 꿈처럼 일시적으로 배제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뒤틀림이 있다.
시우는 그걸 감지하고 확신하고 있었다.
여긴 단순한 꿈속이 아니다.
말리카를 떠나보내고 시우와 함께 남기로 했던 아멜리아의 오두막이 하나의 상징을 지녔듯 이 저택 역시 모종의 상징.
현 상황이나 세계관에 관한 힌트를 남기고 있을 것이다.
복도를 거닐던 시우는 위로, 위로 올라갔다.
저택에 발을 들이는 건 처음이지만 기이하게도 저택 내부의 구조가 지도처럼 머리에 담겨 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가장 꼭대기에 스승님의 연구 공방이 있다.
직접 들은 적은 없어도 ‘거긴 위험한 물건이 많으니 들어가지 말아 주게’라는 스승님의 당부도 머리에 남아있다.
-끼익
살짝 거칠게 돌아가는 나무문.
연구동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새빨간 피를 머금은 듯한 크리스탈 연꽃.
과거 ‘비겁의 마녀’가 제자를 되살리기 위해 피워낸 사악한 예장이다.
시우는 헛바람을 삼키며 교교한 월광이 쏟아지는 창밖의 풍경을 보았다.
무척 높은 곳이었기에 훤한 부감이었다.
“여긴….”
게헨나가 아니다.
진눈깨비에 톡톡 흔들리는 보랏빛 라벤더 군락이 저 지평선까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