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815화 (815/917)

#815

1.

산뜻하고 부드러운 봄바람이 뺨을 스쳤다.

어디를 둘러봐도 보랏빛 꽃망울이 구름처럼 넘실거린다.

벨벳처럼 관능적인 라벤더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형형색색의 나비가 산들바람에 날갯짓을 퍼덕이자 살랑살랑 떨어진 꽃잎 하나가 수면 위에서 핑그르르 돌았다.

멀거니 서 있던 시우는 곧장 깨달았다.

이곳은 아르스 마그나 타운에 있는 티페레트 공작의 저택이다.

시우가 직접 와 본 적은 없었다.

스승님이 위치포인트를 설립하기 위해 처분한 바람에 지금은 아도나이 백작의 소유가 되었으니 말이다.

“예쁘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예쁘다.

게헨나에 살면서 어지간한 건축물을 봐도 덤덤한 감상을 품게 되었는데.

이국적이고 몽환적인 정원의 자태는 귀부인의 봄나들이 드레스처럼 화사했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이 저택만큼은 되사들여 스승님께 선물하고 싶을 만큼 말이다.

“꼭 그렇게 해야지.”

그건 나중의 일이고 지금은 스승님을 이 꿈에서 꺼내오는 게 급선무다.

예쁜 풍경을 봐도 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다.

아멜리아가 선대를 잃었을 때의 절망과 스승님이 라피를 잃었을 때의 절망은 정량으로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슬픔에 경중이 따로 있을까.

그러나 그 아픔을 떨쳐내는 데 있어 ‘어떤 연유로 잃게 되었는가?’가 중요한 요인이라는 걸 안다.

아멜리아는 이별을 받아들였다.

어쩔 수 없는 이별 속에서 말리카의 사랑을 느꼈고 앞으로 나아가길 택했다.

조금 냉정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아멜리아가 견습마녀이고, 말리카가 선대라는 점이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일어났을 일이라는 것이다.

스승님은 경우가 조금 다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은 참척이라 칭한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처참한 슬픔이라는 의미다.

스승님께선 그 처참한 슬픔에 관한 책임이 당신께 있다고 믿으신다.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비극을 막을 수 있었으리란 통한을 창자가 끊어질 때까지 곱씹으며.

100년이 넘는 세월을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런 스승님에게 시우의 존재는 분명 많은 위안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아픔을 씻어내리진 못했다.

설령 만악의 근원인 에아의 목을 라피의 묘비에 바친다 해도 변함없을 것이다.

끝맺음을 찍지 못한 비극을 마음에 묻은 채 나아가길 결심했던 그녀는 결국 사로잡히고 말았다.

달콤한 라벤더 향을 풍기는 보랏빛 이상향에.

“시우 오빠!”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저 멀리 달려오는 소녀가 있었다.

생명력 넘치는 활기와 생기 넘치는 두 뺨.

날다람쥐보다 나랜 몸놀림으로 연못 위로 놓인 경간을 따라 달려온다.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되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묘비 한편에 오도카니 놓여있던 액자에 그녀의 흑백 사진이 걸려 있었으니까.

“안아줘요!”

전력질주로 달려오던 라피는 경간의 석조 난간을 밟고 박차더니 훌쩍 날아왔다.

깃털처럼 가볍게 안긴 라피는 살가운 웃음을 흘리며 양 뺨 옆에 뻐끔뻐끔 뽀뽀하는 시늉을 했다.

인사 대신 나누는 볼키스이다.

굉장히 프렌들리했다.

“나, 나도….”

“에이, 반응이 왜 그래요? 귀여운 사매가 안겨 있는데.”

마음이 아릿했다.

이 라피 역시 말리카처럼 허상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일단은 맞춰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설정상 어떻게 된 일인진 몰라도 스승님을 깨우기 전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함께 어울려주고 싶었다.

그편이 스승님께도 더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라피.”

그때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스승님이다.

다만 기억 속 스승님의 모습은 시우가 아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먼저 움직이기 편안한 복장이 아니다.

실크드레스와 작은 보석 장식이 촘촘히 박힌 숄.

거기에 대충 질끈 묶어두는 헤어스타일을 선호하던 그녀가 몹시 공을 들인 듯한 머리 장식을 얹고 있다.

쉽게 말해 게헨나의 ‘귀족’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차림새였다.

그녀의 주위를 감싸는 분위기도 사뭇 달랐다.

대마녀의 오만함과 자신감, 그것을 어색하지 않게 포장하는 권위와 관록이 흐른다.

당신이 말씀하시길 라피를 잃기 전까지 그녀는 여타 정통파 귀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현세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호문쿨루스와 공적에 의해 죽어나가는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에렐림 공작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는 의미다.

이를 통해 세계관 유추가 가능했다.

스승님은 아직 라피를 잃은 적이 없다.

그렇다면 시우는 어떤 식으로 그녀의 제자가 되었을까?

“시우를 너무 곤란하게 하지 말거라.”

“제가 곤란하게 하고 싶은 건 스승님인 걸요? 시우 오빠, 그거 아세요? 스승님은 제가 오빠를 꽉 껴안으면 엄청 안절부절못하세요.”

“정말?”

“그럼요, 이거 보실래요?”

“라피!”

하지만 낯선 스승님이라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라피가 꽉 시우를 껴안자마자 권위고 관록이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발을 동동 구르셨으니.

“스승님 그나저나 어디 외출이라도 가시나요?”

“깜빡 했는가? 오늘 함께 정원에 소풍을 가자고 했거늘.”

“잔디 위에 돗자리도 펴고, 티타임도 갖고, 수채화도 그려요! 아, 자수도 챙길 거에요!”

“그거 좋구나.”

익숙지 않은 스승님의 모습이었으나 한가지는 명확했다.

엘로아는 시우가 보았던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2.

엘로아에게 두 제자와 함께하는 피크닉은 언제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특히나 이렇게 날씨가 좋은 봄날이라면 더욱더.

나무 의자에 걸터앉은 엘로아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풍경화 경쟁을 하는 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프랑스자수로 손수건에 꽃과 나비를 뜨며 이따금 홍차로 목을 축였다.

말년에 이런 기쁨을 찾게 될 줄이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견습마녀와 사랑하는 제자를 얻었다.

여기서 제자라 함은 마녀 역사상 최초의 남자 마녀인 신시우이다.

엘로아와 시우는 현세에서 처음 만나 함께 역경을 넘었고, 사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아직 라피에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일반적인 사제 관계를 넘어 연인이 되었다.

“…….”

세간의 눈총을 받을 발칙한 관계일지도 모른다.

마녀 사회에서 사제 관계란 그토록 중요한 것이니.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교수들이 가르치던 제자와 연인 관계만 되어도 온갖 구설수가 붉은 지붕 저택에서 흘러나오지 않던가?

자칫 티페레트 공작 가의 명예에 흠집을 남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로아는 그런 염려보다 시우를 더욱 사랑했다.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라피가 이것을 어찌 받아들이느냐는 것이다.

아리따운 정원의 풍경을 고스란히 화폭에 옮겨 담던 라피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시우는 아직 멀었다.

라피보다 그림이 서투니 어쩔 수 없다.

“스승님.”

라피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엘로아에게 애교를 부렸다.

엘로아는 그녀를 껴안은 채 사랑스러운 제자의 잔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왜 그러느냐?”

“저 깜빡하고 놓고 온 물건이 있어요.”

“놓고 온 물건?”

“네, 그래서 잠깐 방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매사에 꼼꼼하고 똑 부러지는 라피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엘로아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혼자 가기 적적한 게냐?”

“아니요, 한 시간…. 아니 어쩌면 세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무슨 물건을 놓고 왔길래 그렇게 오래 걸리느냐?”

엘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부터 라피의 방까지는 1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헌데 세 시간이라니.

엘로아는 자수를 놓던 원형 수틀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 스승이 도와줘야겠구나. 함께….”

“아이참, 스승님!”

어깨를 콱 눌러 엘로아를 다시 자리에 앉히는 라피.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스승님의 사랑을 응원하는 라피의 기특함을?”

“사, 사, 사랑?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인자하고 자애로운 스승의 모습은 벗겨지고, 짝사랑을 들킨 소녀의 수줍음이 묻어나오는 엘로아.

라피는 허리에 손을 얹고 우쭐해 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미 다 알고 있다고요.”

“혹시…. 시우가 말해주었느냐?”

“어휴, 그걸 비밀이라고…. 사형이랑 스승님 눈 마주칠 때마다 꿀이 뚝뚝 떨어지던걸요? 벌이 붕붕 날아올까 봐 무서울 만큼요.”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엘로아는 어떤 얼굴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스승님, 스승과 제자는 사랑해서는 안 되네…. 라피가 알게 된다면 질투할지도 모르고, 곱지 못한 시선으로 볼 수도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고민을 하던 엘로아다.

라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라피는 스승님이 좋아요. 시우 사형도 좋고요. 제가 자리를 비워 드릴 테니까 두 분은 알콩달콩 로맨스를 하는 거에요.”

“라피, 넌 상관이 없는 게냐?”

“제가 무슨 상관이 있어요? 매일 마법 연구만 하시던 스승님이 좋은 남자를 만난다는데 이보다 기쁜 일이 없죠. 앞으로 제가 팍팍 지원해 드릴게요.”

봉긋한 가슴을 탕탕 두드리는 그 모습은 무심코 깨물고 싶을 만큼 귀여웠고 믿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어쩐지 부끄럽다.

이래서야 꼭 재혼을 부추기는 딸의 성화에 어쩔 줄 몰라하는 어머니 아닌가?

“스승님, 사실 제가 연애 소설을 많이 읽었거든요?”

“그건 몰랐구나.”

실은 알고 있다.

라피가 몰래 베갯머리에 로맨스 소설을 숨겨둔다는 사실을.

밤이 깊어도 느지막이 램프가 꺼지는 이유가 그 책을 힐끔힐끔 보기 위해서라는 것도.

라피는 나이에 걸맞게 의젓했지만, 나이를 속이지 못하는 꿈 많은 소녀였다.

“기습 키스. 그게 중요해요. 남자건 여자건 이렇게 확! 다가가서 입술 도장을 콱! 하면…. 으흐흐흐….”

자신의 연애라도 되는 양 손짓 발짓을 하며 조언을 하던 라피는 엘로아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입술도장을 콱! 이라니….”

그런 노골적인 표현도 연애 소설에 나오는 걸까?

“일단은 알겠네.”

“어휴, 우리 부끄럼쟁이 스승님 만나려면 시우 오빠 고생 많이 하겠네.”

“라, 라피…!”

“스승님. 굿럭. 용기 내야 하는 거 아시죠?”

라피는 엄지를 척 치켜들고는 날아가는 듯한 발걸음으로 총총 사라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