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814화 (814/917)

#814

1.

도로시와 그레텔은 협상을 끝냈다.

“알겠어, 너무 오래된 연구기록이라 찾아봐야 해.”

“그래, 잘 부탁할게.”

도로시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그레텔의 손에 수표를 쥐여주었다.

손바닥을 뒤집는 듯 사근사근한 태도를 곁들여서 말이다.

시종일관 짜증만 가득하던 그레텔이 표정이 수표를 보고 살짝 밝아진 것을 보아 적잖은 액수일 것으로 추정된다.

“린네.”

“명령하지 마라.”

“명령은 무슨~ 부탁하는 거지.”

그레텔이 응접실을 나가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따라붙는 린네.

시우는 그 모습을 눈으로 좇다 도로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여러모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도로시답게 주위에서 엿들을 수 없는 통신마법 ‘계시’를 사용한다.

이곳은 그레텔의 공방이고, 분명 내부를 감시하는 장치가 있을테니 말이다.

[왜 달링?]

[어떻게 아셨나요?]

[뭐가?]

[본체이니 뭐니 했던 거요]

시우는 도로시의 협상 아닌 협상 장면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그 중 도로시가 했던 ‘나는 네 본체를 반~드시 찾아낼 거야’라는 말.

이 말을 듣자마자 그레텔은 꼬리를 내렸다.

본체가 있다는 말은 지금 여기 있는 그레텔이 ‘의사 대행 인형’ 혹은 분신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안대를 벗은 시우의 눈으로도 그런 낌새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도로시는 배시시 웃으며 답을 주었다.

[몰랐는데? 그냥 너~무 목이 뻣뻣하다 싶어서 대충 찔러봤어]

[네? 그럼 정말 분신인지 본체인지는 모르는 거고요?]

[애초에 추방자고 얼추 비슷한 안전장치를 사용하나 봐~ 의미만 전달되면 된 거 아니겠어?]

애초에 블러핑이었다는 거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만약 도로시가 없었다면 코가 꿰어서 온갖 귀찮은 요구를 들어줘야 했을 수도 있다.

제삼자의 시점에서 봐도 눈치챌 수 없던 블러핑으로 단숨에 협상의 주도권을 쥔 것이다.

[왜 새삼 반할 것 같아?]

[멋졌습니다]

[그럼~ 그럼~]

도로시는 키득키득 웃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이런 짓을 벌인 걸까요?]

[그렇게 보기는 어려워. 아마도 우연히 발생한 사고겠지. 제정신이라면 이만한 인원을 상대로 농간을 부리진 않을 테니까]

[그럴 깜냥이 못 된다는 말이죠?]

[응. 상황이 맞아떨어졌으니 욕심이 난 거지 계획한 일은 아닐 거야]

도로시는 제법 뚜렷이 단정 지으며 덧붙였다.

추방자라면 은밀한 곳에 공방을 두는 것이 기본이듯, 공방을 방문한 손님의 질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꽃을 들고 온 손님일지, 칼을 들고 온 자객일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해피피그는 그런 면에서는 최고의 사역마다.

이상향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본질을 제법 직관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그레텔은 아마 모종의 장비로 꿈을 들여다보았을 거야. 내기해도 좋아]

고작 몇 마디 대화만으로 거기까지 파악하다니.

그녀가 한층 대단해 보였다.

명쾌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이번에는 도로시 쪽에서 옆구리를 쿡 찔러왔다.

[그보다, 전부터 해왔던 생각인데…. 쓴소리 괜찮을까?]

[네?]

[우리 달링은 너~무 순해. 말랑말랑해서 탈이야. 그러면 못 쓴다고?]

[갑자기요?]

[너, 그레텔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했지?]

그랬다.

다른 것도 아니고 스승님의 안전이 걸린 문제다.

그레텔이 수작을 부린 것인지는 나중에 짚고 넘어가더라도 무조건 스승님의 각성에 도움을 받을 예정이었다.

다소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다.

[그러면 절~대 안 돼]

[네, 확실히 도로시 님을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렇게 단순하게 대답할 문제가 아니야]

살짝 쓴웃음을 머금은 도로시는 손을 올려 시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다정함과 부드러움은 확실히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 나만 해도 그렇지, 달링의 무해한 매력에 푹 빠져버렸으니까]

쓴소리라더니 멋쩍은 말을 한다.

[하지만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이 될 순 없어]

가슴팍을 콕 찌르며 단호하게 말하는 도로시.

[너도 자각을 해야 해. 너는 마녀이고, 특별한 존재야. 인간 시절의 감수성은 버려야 해]

언젠가 들어본 말이긴 하다.

타카쇼를 구하러 갔을 당시 비앙카가 충고랍시고 ‘인간을 초월했다면 굴레도 벗어던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당연히 어처구니가 없는 조언이었고, 사실상 항복하라는 말이나 다름 없었기에 무시했다.

[ 지금까지 네 주변에는 좋은 사람만 모여서 모르는 모양인데, 모든 마녀는 태생적으로 끝없이 탐구하고 욕망하게 되어 있어.

그 욕망의 크기를 일반적인 인간과 동일시해서는 안 돼. 약한 모습을 보이면 골수까지 빼먹으려 드는 게 마녀야]

하지만 도로시의 조언은 결이 다를 것이다.

본인은 아닌 척하지만 다정하고 상냥한 누님 아니던가?

[네 힘과 권력, 그리고 인맥을 협상 수단으로 마음껏 활용해.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으면 찍어누른 다음에 살살 달래줘. 어머? 말하고 보니 침대에서는 잘하잖니?]

[…잘 해보겠습니다]

[나는 지금의 어수룩한 달링도 좋지만~ 가끔가다 보면 불안 불안하단 말이지]

[아직은 경험이 부족해서요]

[아냐, 그 정도로는 부족해 이대로라면 언젠가 네 유약함은 발목을 잡을 거야]

혼란한 세상이다.

앞으로 더욱 큰 혼란이 찾아올 건 명확하다.

시우도 언제까지고 연인들에게 기댈 수 없을 것이며, 머지않아 제 발로 일어나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지금까지는 선한 성품과 운에 기대어 다양한 사고를 넘겨왔을 테지만….

도로시는 끝까지 살아남는 건 자비로운 성자가 아닌 약삭빠른 악당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언제나 그랬다.

[그러니까 만~약에 네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도저히 마음을 모질게 먹지 못하는 상황이 왔을 때. 네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을 땐….]

그렇기에 도로시는 시우가 변하길 원했다.

동시에 변하지 않기를 원했다.

따라서 고한다.

[그때가 오면 날 불러. 내가 너의 비수가 되어 줄테야]

그림자 속 뒷일은 이미 손을 더럽힌 자가 하면 된다.

그가 새로이 바로잡아야 할 건 손에 쥔 도로시를 휘두르기 위한 마음가짐과 각오뿐이다.

“도로시 님.”

멋대로 계시를 끊어버린 시우가 도로시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좋은 조언이에요. 새겨듣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뭐, 제가 변변찮은 놈이니까 걱정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만….”

그리고는 대담하게도 뺨을 꼬집는다.

쭈욱쭈욱 늘어나는 도로시의 볼살.

“아파하….”

“스승님이 제게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세상 모두를 적으로 돌려서라도 저의 편이 되어 주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거든요.”

“…….”

“저도 스승님과 같은 마음입니다. 만약 도로시 님께 뭔가 부탁할 일이 생긴다 해도 그땐 저도 옆에 있을 겁니다. 도로시 님 혼자 짊어지게는 하지 않아요.”

가슴이 뭉클하다.

시우라면 도로시의 말이 공수표가 아니라는 걸 안다.

활용하기에 따라서 도로시는 마신의 램프가 되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걸 이용하려 하지 않는다.

공적이라는 낙인을 짊어진 도로시를 사람 대 사람으로 바라봐준다.

이만한 감동이 어디 있을까?

무심코 조금 전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공적도.

마녀조차도 아니게 된 채 그와 단란한 신혼 생활을 하는 헛웃음 나오는 꿈.

찰나의 꿈에 불과했지만 정말 행복했다.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면 손에 쥔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말이다.

그래서 묻고 싶어진다.

대답은 당연히 답이 정해져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입으로 확인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난, 공적인데?”

그러니까 이 질문은 그를 향해 던지는 유치한 어리광이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상관없어요. 그 전에 내 사람이에요.”

드라마에서도 나오지 않을, 손발이 간지러워지는 풋풋한 대사.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마녀의 모범 답안 아닌가?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도로시는 실소를 금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귓가에 펑펑 터지는 폭죽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도무지 감출 수 없는 환희와 기쁨이 가슴을 뛰게 한다.

“달링.”

“네, 근데 제 호칭 달링으로 고정된 건가요?”

“응, 내 마음이야.”

“좀 오글거리는데…. 다른 거 어때요?”

히죽대느라 엉망일 게 분명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그의 가슴에 뺨을 기댄다.

“넌, 진~짜 나쁜 남자야.”

이렇게 다 주는데 고작 말 몇 마디로 더 주고 싶게 만든다.

본전까지 탈탈 털어서 빼앗아 가야 만족할 성 싶다.

“다음 밤에 기대해.”

도로시가 그렇게 말하고 떨어졌을 때 그레텔과 린네가 돌아왔다.

“장치 준비는 끝냈어. 따라와.”

만에 하나라도 도로시의 강압적인 태도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지 걱정했지만, 예상외로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오히려 그레텔의 표정은 처음 성가신 손님을 떠맡을 때보다 풀려 있었다.

확실히 추방자의 사고방식은 게헨나의 것과는 조금 다른 면모가 있나 보다.

“누군가 꿈에 들어가서 꿈의 종류를 자각몽으로 바꿔야 해. 현실을 인정하고 돌아오게 하는 동아줄 역할이 되는 거지.”

“제가 가죠.”

기왕할거면 엘로아와 가장 가까운, 또한 이미 비슷한 경험을 두 번 거친 시우가 가는 게 옳다.

그레텔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장소를 옮겼다.

각종 실험장비가 즐비하게 늘어선 공방의 연구동.

시술대 위에 스승님의 몸을 눕힌다.

그레텔의 지시에 시우도 나란히 옆에 누웠다.

“쉽지 않을 거야. 이 정도 몰입이라면 각성에 격렬하게 저항할 거거든.”

“만약 각성에 실패하면 어떻게 되죠?”

아멜리아가 불안한 듯 물었다.

“저 남자는 아무 문제 없어. 게스트로 들어가는 거니까. 현실로 쫓겨나고 끝이지.”

그렇게 말한 그레텔은 시우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검은 리본과 보석으로 짜인 브로치였다.

“만약 너조차도 꿈에 너무 강하게 영향을 받는 것 같으면 이 브로치의 보석을 깨뜨려. 그럼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시작한다.”

그 말을 끝으로 무겁게 의식이 가라앉는다.

마치 유사처럼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시계.

눈을 떴을 땐 보랏빛의 물결을 자아내는 라벤더 군락이 시우를 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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