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3
1.
시선을 미끄러뜨려 악수를 권하는 그레텔 네프티스의 손을 보았다.
길쭉하고 가느다란 실로 마녀다운 섬섬옥수.
손톱 끝까지 새카만 매니큐어로 칠해져 있다.
새삼 예빈이 소개장을 써주며 영혼의 마녀가 대단한 괴짜라는 말을 덧붙였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아마 이 복식은 기호에서 비롯한 건 아닐 테다.
아마 나름의 ‘상징’을 구축하고 있는 걸 테지.
“악수 안 해? 여태 날 찾으면서 돌아다녔잖아.”
이걸 악수해 말아.
예빈이 큰 걱정 없이 소개해 줄 정도라면 적어도 대놓고 악성향의 추방자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스승님께 일어난 정체불명의 현상이 마음에 걸리고, 이쪽이 남자마녀라는 사실이 한 번 더 마음에 걸린다.
남자 마녀란 언감생심을 견물생심으로 바꿔놓는 존재니 말이다.
인사 차원에서 건네는 듯한 악수에도 피해망상이 생긴다.
“꿀꿀아, 돌아와.”
“꾸익! 꾸익!”
고민을 끝낸 시우가 악수를 하려 할 때.
그레텔은 무안할 만큼 단호히 손을 빼냈다.
마치 멍하니 기다리게 했던 만큼 갚아주겠다는 듯하다.
날개와 뿔이 달린 돼지가 짧은 다리로 열심히 달려와 그레텔의 품에 안긴다.
그레텔은 돼지를 안은 채 말했다.
“노파심에 말하건대, 난 너희 쪽에 아무런 적의도 없어. 스미르나의 소개로 왔다길래 나온 거야.”
“그런 것치고는 문제가 발생해 버렸는데요.”
방심하지 않고 날카로운 시선을 그녀에게 던졌다.
다른 문제라면 몰라도 스승님의 안위와 직관된 문제이다.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기색이 풍긴다면 치료고 나발이고 때려치우고 여기서 한판 벌일 생각이다.
“이 녀석은 보다시피 내 사역마 해피피그, 이름은 꿀꿀이야. 암컷이고.”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지 않을 리 없다.
시우뿐 아니라 대마녀급 다섯이 은은한 경계심을 내뿜고 있었으니.
그러나 영혼의 마녀는 조금도 주눅이 든 기색 없이 돼지를 앞으로 들어 보였다.
“겪어 봤으니 알겠지만 영특한 꿀꿀이는 사람을 참 좋아해서 ‘해피타임’이라는 마법으로 그 사람이 원하는 이상향을 보여줘. 다들 좋은 꿈 꿨지?”
“죄송하지만 잡설을 됐으니 본론부….”
“인간이라면 영원한 백일몽에 젖어 굶어 죽을 수도 있겠지만, 마녀라면 그럴 일 없어. 다소 긴 기간 갇혀 있을 순 있어도 대부분은 알아서 일어나.
아무리 완벽하다 해도 어차피 꿈. 시간이 길어질수록 위화감은 느끼기 마련이거든.
위화감을 느낀 순간부터는 의지대로 각성할 수 있으니까.”
그레텔은 낙엽 위에 누워있는 스승님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티페레트 공작은 몰입을 조금 깊게 한 것 같네.”
“몰입? 그보다 티페….”
“티페레트 공작인 걸 모르는 게 이상하지. 추방자 중에서 그녈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이봐, 자꾸 말 끊지 말아 줄래?”
“…계속하시죠.”
딱히 말을 끊은 것 같지도 않은데 단골 진상 고객을 쏘아보듯 짜증을 낸다.
생긴 것 이상으로 히스테릭할지도 모르겠다.
“간혹 있어 저런 사람. 해피타임이 발동되는 순간 피술자와 결합해 분리된 기생 형태의 마법이 된다는 건 눈치챘지?”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그 꿈이 너무도 달콤하게 느껴져.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나오고 싶지 않을 만큼. 어떻게든 추억과 상상력을 쥐어짜서 설계하고, 사소한 위화감 따위는 눈을 돌려 무시하고 싶을 만큼.”
그레텔의 손이 점점 잦아드는 스승님의 자율방어를 가리킨다.
“그런 부류는 이상향을 ‘이상적’이라고 판단하면 꿈에 간섭하려는 모든 요소를 ‘위협’으로 인지해. 자신만의 요람에 갇혀서 영원히 잠이 들길 택하는 거야.”
스승님의 상황과 정황을 고려해보면 거짓 같지는 않다.
아무리 시우가 스승님을 사랑해도 과거의 상처까지 없던 일로 해줄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건 너무 아프게 흉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일뿐.
가슴이 아팠지만 침을 삼키고 물었다.
“자율방어를 무시하고 억지로 깨운다면요?”
“내가 말했잖아. 그만두는 게 좋을 거라고.”
그레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자를 벗고 머리를 벅벅 긁더니 한숨을 쉰다.
“힘으로? 아무리 티페레트라도 너희라면 못할 것 없겠지. 그런데 저렇게 결합이 단단하다면 적합한 절차를 거쳐서 분리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현실과 이상향이 엉켜버려. 꿈은 깨면 금방 꿈이라는 걸 깨닫고 털어버리지? 근데 그게 안 되는 거야. 인셉션 봤어?”
안 봤을 리가 없다.
덕분에 애매한 비유가 훨씬 직관적으로 와 닿으며 소름이 돋았다.
같이 영화를 봤던 샤론도 숨을 집어삼켰다.
현실을 꿈이라고 착각하게 되고, 꿈을 현실이라 착각하게 된 주인공 아내의 말로.
그 끔찍함이 어땠는지 너무 잘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영혼의 마녀.”
대화에 가장 먼저 끼어든 건 린네였다.
어느샌가 뽑아든 검을 움켜쥔 채 날카롭게 묻는다.
“결국 네 사역마 탓이군.”
그녀와 적이었던 시우는 알고 있다.
린네가 흉흉한 살기를 품기 시작하면 얼마나 큰 압박감을 선사하는지.
“아니지, 사유지에 무단침입한 건 당신네야.”
“깨우는 방법도 알아야 할 거다.”
“린네 님, 지금은 네프티스 님 말을 더 들어보죠.”
린네가 채찍 역할을 한번 해줬으니 시우가 당근을 흔들 차례다.
이게 강압적으로 나선다고 해결될 일은 아닐 테니까.
애초에 조금도 위축된 모습은 없었지만 말이다.
“원하는 게 뭡니까?”
“스미르나의 소개장을 손에 쥔 남자 마녀. 너는 내게 뭘 원하니?”
“두 가지입니다. 스승님이 무탈하게 깨어나는 것, 그리고 간단한 건강검진이요.”
“일단은 자리를 옮길까? 그리고 이대로는 꿈속에서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적당히 조절을 해줘야겠어.”
네프티스가 무방비한 스승님의 머리맡에 주저앉았을 때 저도 모르게 창을 움켜쥐었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문제가 생긴다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이래 봬도 의사야. 진료비만 제대로 내면 환자에게 해코지하지 않지. 너희는 돈이 많아 보이거든.”
네프티스의 손끝이 스승님의 이마로 향하자 자율방어의 전조가 일었다.
그러나 그녀가 부드럽게 이마를 두드리는 순간 곧장 잦아들었다.
스승님이 한결 고르게 숨을 내쉬는 걸 보고 안심했다.
“내 공방으로 안내할게.”
2.
그레텔 네프티스의 공방은 낙엽송림의 정중앙 공터에 우뚝 서 있었다.
육지 속 섬이나 다름없는 열악한 환경에 있기에 시설도 함께 열악할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일행을 반겨주는 공방은 대저택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북유럽 느낌 물씬 풍기는 석조 건물이었다.
우중충한 날씨와 볼맛 안 나는 침엽수림 탓에 조경은 영 꽝이지만, 찐부자 제머나이 저택의 생활에 익숙해진 시우가 봐도 호사스럽다.
여전히 잠든 엘로아를 품에 안은 시우는 그레텔의 뒤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하얀 대리석과 검은 커튼이 대비를 이루고 있는 실내장식을 얼추 구경하고 있자니 영혼의 마녀가 차를 내왔다.
“마셔, 이상한 건 안 탔어.”
“…….”
유유자적하게까지 보이는 모습에 조바심이 치밀었다.
어찌됐건 스승님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
하지만 영혼의 마녀는 자신이 스승님을 깨울 수 있다는 확답도, 하물며 원하는 대가도 제시하지 않는다.
시우도 눈치가 전혀 없지 않다.
이건 제 몸값을 높이기 위한 의도된 침묵이다.
그걸 이 많은 대마녀 앞에서 태연하게 시행하는 건 대담하다 해야 할지, 무모하다 해야 할지….
“차는 언제든지 마실 수 있어요. 본론부터 말하고 싶습니다.”
“차가 먼저야. 시간 배율을 조정해 뒀으니까 급하지 않아. 내가 조율을 해뒀으니 시간은 1대 2 비율로 흐르고 있어.”
시우가 꼬박 반나절을 꿈에서 보냈다고 생각했을 때 현실에서 지난 시간이 초 단위였다.
그레텔의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1 대 2 정도라면 아주 우수한 응급처치라 할 수 있겠다.
“거두절미하고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이겁니다.”
그레텔의 페이스에 더 놀아나고 싶진 않았다.
품속에 잘 품어두었던 협상 재료를 꺼내 들었다.
제머나이 백작의 인장이 찍힌 추천장.
큰 장모님이 떠나기 전 은근슬쩍 찔러넣어 준 것이다.
게헨나가 헥센나흐트를 견제하기 위해 추방자를 대상으로 하는 시민권 복권 사업을 추진 중이다.
아직은 특정 몇몇을 대상으로 진행 중이지만 점차 규모를 확장할 예정.
제마나이 백작가의 위신을 고려할 때 추천장이 곧 시민권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최근 현세는 소란스럽다죠. 안전한 여건에서 연구하시기에 게헨나만한 곳이 없을 겁니다.”
다소 규정이 헐거워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게헨나는 많은 추방자에게 되돌아가고 싶은 장소다.
귀국행 티켓이라면 비싸게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레텔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거로는 부족해. 티페레트 공작을 깨우고, 나한테 진료받고 싶댔지? 원래 목적은 후자였을 것이고, 이 추천장은 후자를 위해 마련한 보상일 테니까. 새로 발생한 진료비에 대해선 추가금을 줘야지.”
유리한 상황이니 아주 본전까지 뽑아 먹겠다는 마인드다.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스승님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여차하면 그녀의 연구에도 협력할 마음이 있다.
“그건 최대한….”
“잠~깐만 나랑 얘기할 수 있을까?”
보다못한 도로시가 앞에 나섰다.
이 자리에 있는 인원 중 가장 많은 협상을 경험한 그녀이다.
시우의 어설픈 협상을 보고 있자니 병풍처럼 뒤에 서 있을 수 없었다.
“당신 말야. 아까부터 이야기를 이상하게 하네. 결국 이 사달이 난 건 당신이 저 돼지를 우리에게 던진 것도 때문인데?”
“그래서? 난 추방자야. 이만한 인원이 우르르 몰려오면 마땅히 대비해야지. 오히려 칼을 빼들지도 모르는 손님에게 응급처치까지 해줬어.”
언제나 유들유들한 도로시의 눈이 더욱 부드러운 호를 그린다.
숨이 막힐 듯한 압력을 쏟아내는 눈웃음이었다.
“똑바로 대답하는 게 좋아. 나는 네가 뭘 믿고 재롱떠는지 알고 있으니까.”
“재롱?”
저게 뭔 소리지?
시우가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전에 대화 중 처음으로 주춤하는 그레텔의 모습이 보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분명했다.
“우리 귀염둥이 공작님과 잘생긴 마녀님. 둘 중 하나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나는 네 본체를 반~드시 찾아낼 거야.”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그래?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끝까지 모르고 싶으면….”
도로시는 상체를 기울여 그레텔의 귓가에 낮게 깐 목소리로 속삭였다.
“처신 잘해.”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펴지 못하는 그레텔.
도로시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활짝 웃었다.
“자~ 다시 제대로 된 대화를 시작해볼까?”
겨우 말 몇 마디로 그레텔의 얼굴을 흙빛으로 만들어버린 도로시.
시우는 언제나 생글생글 미소를 띤 채 애교부리는 도로시가 승냥이떼 사이에서 살아온 고위계 공적이었으며,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액수를 다루는 무기 밀매상이었음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