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2
1.
“낭군, 오늘 일은 잊어라. 무조건이다.”
방에 쪼그려 앉은 린네는 벌게진 눈을 비볐다.
불현듯 그녀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등 뒤로 흑과 백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양손에 검을 든 검귀.
마주한 것만으로 피부에 오소소 소름이 돋던 흉포한 존재감.
‘아, 이대로 죽는구나!’ 싶어서 진짜 개무서웠는데.
“…….”
“대답해라.”
입술을 삐쭉삐쭉 내밀면서 시우를 채근하는 린네는 그때와는 이미 다른 사람이었다.
5년 간의 악연이었다가 연인이 된 아멜리아를 포함해도 전후 갭이 가장 큰 사람 아닐까?
“네, 설명은 충분히 들었습니다.”
“꿈의 설정 상 낭군은 친부가 아니었다. 정말이다.”
“네, 그것도 말씀하셨어요.”
“나는 그저….”
구차한 변명임을 뻔히 알면서도 이어가려던 린네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이미 판도라의 상자를 들켰다 한들 근친상간을 원한 게 아니다.
마음껏 어리광을 부릴 상대가 필요했다.
연인도 연인이지만 부성애와 모성애를 동시에 채워줄 관계를 원한다.
지금 눈앞에 그대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라고 맨정신으로 말하기에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냥 오늘 하루를 없던 일로 하고 싶었다.
“…낭군.”
“네?”
“아까 때렸던 곳은…. 아프지 않은가?”
침묵을 지키던 린네가 시우의 배를 보며 화재를 돌렸다.
시우가 놀릴 때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반사적으로 주먹이 나갔던 그곳이다.
“에이, 뭘 그 정도로요.”
“아무리 그래도…. 낭군에게 손찌검하다니. 아내로서 자격이 없다.”
“그럼 딸로서는요?”
“낭군!!!”
시우의 장난에 이번에도 주먹이 나갈 뻔한 린네.
예상은 했지만 이 일은 두고두고 약점이 잡힐 성 싶었다.
낭군은 평소 물에 물 탄 것처럼 맹한 사람이지만 은근히 장난기가 많았으니 말이다.
“린네 님.”
시우는 린네를 부드럽게 안아 들었다.
언제 발끈했느냐는 듯 얌전한 고양이처럼 품에 안겨드는 린네.
결이 좋은 린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다.
아까는 린네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 장난을 친 거지만, 이번엔 그런 단순한 심정으로 입에 담은 게 아니었다.
“저는 린네 님 편입니다. 남 보여주기 부끄러운 욕심이면 어떤가요? 우리가 남은 아니잖아요.”
“…….”
이대로 묻어봤자 두고두고 린네가 마음쓸 건 자명한 사실.
아예 이 자리에서 풀고 가게 해주고 싶다.
“저한테는 변명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낭군.”
어떤 추태도 부끄러운 모습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다.
서로에게 완벽한 신뢰가 있을 때야 가능한 관계.
시우는 지금 린네와의 관계가 그런 것임을 말하고 있었다.
진의를 깨달은 린네가 퍼득 시우를 올려본다.
그 눈동자는 진한 감동의 물결로 일렁이고 있었다.
“파파라고 해도 괜찮은데요.”
밉살맞다는 듯 팔뚝을 꼬집으면서도 키스를 조르는 린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는 처지에 이 정도는 해주어야 않겠는가?
파파 호칭을 하는 어리광쟁이 린네.
딱 한 번만 보고 말기에는 너무 귀엽고 말이다.
2.
완전히 진정한 린네를 데리고 꿈을 찢었다.
영락없이 재차 꿈으로 빨려 들어갈 줄 알았건만 이번에는 이변이 없었다.
아무리 호문쿨루스라도 몇 번이나 마법이 깨진 이상 시우를 더 붙잡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아멜리아는 진작에 일어나 있었는지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고, 옆에서 린네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꿈속에서는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지나간 시간은 1분 남짓.
돼지가 발현한 것처럼 보이는 보호장 안에 아직 깨어나지 못한 연인들이 보였다.
“으히히히, 으하하하….”
히죽히죽 웃으며 잠꼬대하던 르뤼에.
“흐으음…. 내 꺼야…. 화성가즈아….”
입맛을 쩝쩝 다시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샤론.
“어휴…. 간지럽다니깐~”
마찬가지로 느슨해진 입꼬리로 히죽거리는 도로시.
“…….”
그리고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푹 주무시는 스승님까지.
“꿀꿀꿀.”
돼지 형태의 호문쿨루스는 시우가 일어나자마자 반갑다는 듯이 총총총 다가와 얼굴을 핥으려 들었다.
“뭐야 시발 저리 가.”
“꿀꿀꿀꿀.”
손짓을 하며 쫓아도 엄청 방긋방긋 웃으면서 친한 척 군다.
시우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 얼굴을 밀어냈다.
“린네 님, 아멜리아 님. 모두 이상 없으시죠?”
“네.”
“이상 없다.”
두 사람 다 꿈의 여운에 젖어있는 듯했지만, 몸에 이상은 달리 없는 것 같다.
“다른 분들도 깨워야겠네요.”
붉은가지를 들고 르뤼에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이대로 여기에 눕혀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꿈 속에서 손가락만 빨며 돌아다녔던 건 아니다.
시우, 아멜리아, 린네에 거쳐 유랑하는 동안 마법적 분석도 얼추 완료된 상태.
저 돼지가 발휘하는 자성마법은 일종의 정신계 기생 마법이다.
돼지가 마법을 발현하는 건 딱 한 번.
이후로는 피술자의 마력을 이용해 술식이 유지된다.
시우는 그 사이에 간섭해 디스펠핀으로 마력의 흐름을 한번만 끊어주면 된다.
돼지의 보호장 따위 힘으로 찍어누르면 그만이고 말이다.
“음?”
히죽히죽 웃던 르뤼에의 눈이 띠용 떠졌다.
어리둥절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르뤼에.
“깨어나셨어요?”
곧 사태를 파악한 르뤼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짐의 항모전단은 어디 있느냐?”
“아직 없죠.”
“세계를 정복한 누켈라비 왕조는?”
“…….”
시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떤 꿈을 꿨는지 짐작할만하다.
“허흐흐흐흑 다, 꿈이란 말이더냐…. 이럴 순 없느니라…. 천년왕조의 재건이…. 이래서는 안 되니라….”
르뤼에는 크게 낙심한 표정으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꽤 꿈에 과몰입했던 듯하다.
다음으로 깨워야 할 사람은 곧장 정해졌다.
르뤼에를 달래는 데는 시우보다 도가 튼 도로시니 말이다.
“흐으음…. 여보? 벌써 출근 시간이야?”
“네, 출근 시간이에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새근새근 잠이 들었던 도로시는 일어나자마자 사태를 파악한 듯했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허탈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으으읏챠…! 재밌는 경험이었어.”
기지개를 쭈욱 펴며 하품을 하는 도로시.
다른 사람과 달리 가장 여운이 적어 보인다.
호기심에 물었다.
“무슨 꿈 꾸셨나요?”
“말 안 해 줄 거야~ 여자는 신비로운 비밀이 있어야 더 매력적인 법이잖아?”
의미를 알 수 없는 씁쓸한 웃음을 지은 그녀는 대성통곡 중인 르뤼에를 발견하고 달래러 갔다.
르뤼에도 도로시를 발견하자마자 품에 안겨든다.
“도로시…. 도로시이이….”
“아이고아이고, 우리 여왕님~ 이리 오세요.”
“훌쩍…. 이건 너무 잔혹한 일이니라…. 짐의 꿈, 짐의 왕국, 짐의 전단이….”
“예쁜 얼굴에 주름 생기시겠어요. 자 여기 코 푸세요.”
도로시가 건넨 손수건에 패애앵 소리가 날 때까지 세차게 코를 푸는 르뤼에.
언제봐도 참 사이좋은 이모 조카 지간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은 샤론.
샤론은 일어나자마자 르뤼에 못지않은 눈물을 보여주었다.
샤론은 어마어마한 대기업을 이루고 돈을 펑펑 쓰고 다니는 꿈을 꿨다고 한다.
“그럼 진짜 꿈이야? 미래 예지 같은 것도 아니야?”
“…아니야, 그래도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흑…흐흥…. 그럼 차라리 더 펑펑 쓸 걸…. 으아, 으아아아 억울해…!”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 채 엎드린 자세로 땅을 탕탕 때리는 샤론의 모습은 처량 그 자체였다.
샤론의 등을 토닥토닥하는 것으로 위로를 끝낸 시우.
마지막은 스승님을 깨울 차례다.
다른 연인 때와 달리 마음이 조금 무겁다.
오랜 시간 엘로아와 함께 했던 만큼 그녀가 어떤 꿈을 꾸고 있을지 얼추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멜리아 때처럼 그 안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주는 편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당장 저 돼지와 그 마법이 위험한 종류가 아니라는 건 알아도, 앞으로 계속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으니 말이다.
붉은가지로 디스펠을 시도하려 할 때였다.
-키이이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가는 창끝.
연분홍빛 마력의 스파크가 곧장 시우를 향해 쇄도한다.
“윽!”
아주 빠르지는 않았기에 고개를 돌려 피해냈지만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나갔다.
옆 통수를 스치고 지나간 날카로운 예기가 낙엽송의 가지를 후두둑 베어냈다.
“시우!”
“낭군!”
어수선하던 와중에도 마력의 파장을 느끼고 깜짝 놀라 달려오는 연인들.
엘로아의 몸 주위에는 고대 룬어가 적힌 반투명한 고리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그 정체는 최고 레벨까지 발현된 엘로아의 자율방어다.
이런 식으로 시우에게 발동하는 건 처음 봤지만 말이다.
“자율방어가 왜?”
스승님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고, 자율방어를 여전히 작동 중이다.
다들 안색이 단번에 심각해졌다.
그 중 내막을 더 자세히 유추할 수 있는 시우는 미간이 한층 좁아져 있다.
누군가에게 달콤한 꿈이란 절대 깨어나고 싶지 않은 행복일 것이다.
그리고 겉으로는 완전무결해 보이는 스승님이 얼마나 상처가 많은지.
또 마음이 여린지 알고 있다.
“일단 저 돼지부터 족쳐보죠.”
“꾸익?”
호문쿨루스의 자성마법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 얼추 눈치챘지만 그래도 마법의 근원을 끊으면 스승님이 눈을 뜨실지도 모른다.
운 좋게 그노시스의 알을 얻는다면 더욱 안전하게 꿈에서 꺼낼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위기를 감지한 호문쿨루스의 몸이 빛나기 시작한 그때.
“그러지 않는 게 좋을걸?”
제3자의 목소리가 부러진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와 함께 울렸다.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야.”
어둑한 수풀을 헤치고 나온 것은 누가 봐도 ‘마녀다!’라고 소리칠 만한 복장의 여인이다.
그것도 현대 감성으로 재해석한 게헨나식 마녀가 아니라 완전 구닥다리의 마녀 복장 말이다.
잔뜩 헝클어진 채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곱슬머리.
눈 밑에 문신처럼 새겨진 눈그늘이 한층 더 음침함을 더한다.
조금 실례다만 빼어난 영체의 외모를 저런 식으로 낭비할 수도 있구나 싶은 행색이다.
“누구시죠?”
“너희가 찾던 사람. 반가워, 그레텔 네프티스야.”
‘영혼의 마녀’는 아주 울적한 말투로 답하곤 악수를 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