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
1.
꿈에서 깨고, 아멜리아의 꿈에 편입되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얼핏 시야에 스친 현실의 낙엽송림.
다른 점이 있다면 곤히 누워있던 아멜리아가 눈을 뜨는 걸 보았고, 다시 꿈속으로 빨려 들어왔다는 것 정도.
무거워진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아멜리아는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었으니, 어쩌면 시우만이 꿈으로 들어온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호문쿨루스가 유독 시우를 꿈에 가두는 데 집착하고 있는 것일 수도….
같은 잡다한 생각은 금방 잊혔다.
아니 사실 잡다한 생각이라 치부하긴 어려운 중대한 문제지만 지금은 잊혔다.
“린네는요. 아랫입으로도 파파의 우유 마시고 싶어요.”
왜냐하면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광경과 대사가 린네의 입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반쯤 헐벗은 유카타를 허리에 걸친 채 다리를 활짝 벌리고 몰랑몰랑한 모찌 두 쪽 사이 달콤한 속살을 어필하는 린네.
아직 몇 번 안 본지라 볼 때마다 쭙쭙 빨고 싶은 민둥산이다.
시우는 눈을 끔뻑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장소는 향월루, 날이 상당히 덥고 습하다.
아멜리아 때와는 달리 이곳은 여름인 모양이다.
그리고 시우도 알몸이다.
모든 것이 비단벌레 색처럼 모호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건 린네의 꿈이다.
그리니까….
린네는 아마도 시우와의 뜨밤을 굉장히 이상적인 상황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
그럴 수 있다.
이해할 수 있다.
그녀의 기억을 엿보고 결핍의 저주가 어떤 족쇄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는 시우다.
린네가 침대에서 유달리 민감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고,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성교가 텅 빈 그녀의 정서적 교감을 충족시켜주니 말이다.
거기까지 이해하면서도 시우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는 이유는 하나.
근데 방금 린네가 뭐라고 불렀더라?
“…….”
시우는 재차 눈을 끔뻑이고 린네를 보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린네의 몸은 관능적이다.
외모와 분위기가 주는 고귀함과 사내의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나신의 조화.
거기에 서늘한 칼날 같은 위압감을 풍기는 린네의 눈이 욕정으로 달콤하게 녹아내릴 때면 소름 돋는 매혹마저 느끼니 말이다.
“파파. 린네의 첫 입, 안 드실 거에요?”
린네의 매끈한 다리가 시우의 허리를 감싼다.
당장에라도 넣어달라는 듯 교태 어린 몸짓.
각도만 맞추고 입구에만 걸쳐준다면 스스로 시우의 허리를 끌어당겨 삽입하겠다는 모양새이다.
“뜨겁고 기분 좋을 거에요. 린네의 입보다 훨씬 더요.”
그제야 시우는 그녀의 아랫입술에 찰싹 달라붙은 물건이 한참을 빨아낸 듯이 축축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린네의 호칭이 ‘파파’라는 사실까지도 재차 확인한다.
“파파….”
멍하니 얼어있는 시우의 모습에 린네의 눈가가 서글픈 듯 일그러진다.
그녀가 저렇게 풍부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시우는 여태 몰랐다.
그 무뚝뚝한 린네가 어떤 어리광이든 받아주고 싶은.
설화 속 구미호가 저랬을까 싶은 유혹을 연출할 수 있다니.
“죄책감 느끼실 필요 없어요. 린네가 파파를 먼저 유혹한 거잖아요.”
불현듯 한겨울에 등목이라도 한 양 등줄기가 섬짓했다.
중대한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지금 이것저것 딴 생각할 때가 아니다.
이 세계관 속 둘의 관계가 정말 찐 부녀인지, 아니면 단순한 상황극인지는 차치하자.
일단은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할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은밀한 성벽을 지닌다.
시우도 있고, 그렇기에 이해한다.
그러나 설령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그걸 타인에게 보여준다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다.
시우는 지금 린네가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판도라 상자를 열고 만 것이다.
뭔가 더 보기 전에 상자를 닫아야 한다.
수습해야 한다.
“파파.”
“저기….”
“린네가 동생 낳을게요.”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시우의 입이 꾹 닫혔다.
뭘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분기점을 넘어버렸다.
진상을 밝히고 뒤늦게나마 린네의 브레이크를 잡아주기엔 이미 늦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뿐 아니라 그 안의 내용물까지 샅샅이 봐 버렸다.
“파파의 아기씨 소중하게 품어서 꼭 귀여운 동생 낳을게요. 그러니까 빨리이….”
유혹하기 위해 노력하는 기색은 없다.
머리를 쥐어짜 내는 기색도 없다.
어떤 말을 하면 시우가 배덕적인 정복감을 느낄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한 암컷 무빙.
시우는 결단을 내렸다.
절대로 이게 자신의 이상향을 그린 꿈이라는 걸 린네가 알아선 안 된다.
그리고 여기 있는 시우가 린네의 상상 속 존재가 아닌 ‘진짜’ 신시우라는 걸 알아서도 안 된다.
모든 계획은 린네의 존엄을 위하여.
그렇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일단은 린네의 꿈에 어울려주는 것이다.
솔직히 칭호를 파파로 고정해 애교 부리는 린네의 꼴림력은 자지 전용 TNT에 필적하다.
어렵지 않게 어울려 줄 수 있다.
그 다음 어떻게든 그녀와 거리를 벌리고 붉은가지를 소환하여 꿈을 찢는다.
현실로 돌아온 린네는 부끄러운 꿈을 ‘홀로’ 간직하게 되고 시우는 아무것도 모른 척 시치미를 뗄 예정이다.
“큼, 그럼. 어쩔 수 없네. 나중에 딴소리하면 안된다?”
린네의 발목을 잡았다.
유연한 각도로 벌어진 린네의 다리.
그 결과 더욱 노골적으로 그녀의 비소가 벌어진다.
일단 마구마구 가게 해서 기절시키자.
그런 마음을 품고 린네의 얼굴을 보았을 때.
“…….”
시우는 일이 예상처럼 순조롭게 풀리지 않았다는 걸 눈치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끈적끈적 교태 어린 시선으로 시우를 올려보던 린네다.
하지만 지금은 연신 눈을 깜빡이며 멍한 눈빛이다.
최면어플에 걸렸다가 깨어난다면 대충 이런 반응이 아닐까?
그간 다채로운 곤란과 곤경, 그리고 당혹스러운 상황에 휩싸여 온 시우는 그것만으로 상황을 읽어냈다.
이런 이벤트와 연관되기만 하면 으레 그렇듯 이번에도 망한 것 같다.
“…아.”
린네는 빠른 격류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을 더듬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꿈속에서 그럴듯했던 개연성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느껴지듯.
린네의 이상향 설정이 와장창창 깨져나간다.
덩달아 린네의 안색도 삐걱삐걱 금이 갔다.
영혼의 마녀, 낙엽송림, 마지막으로 보았던 호문쿨루스, 그 호문쿨루스가 발한 기이한 광채.
여름 축제, 은어 낚기, 신사에서의 불꽃놀이와 키스, 쩔쩔매는 파파를 유혹하는 린네.
과거 린네가 납치했던 시우, 지금 눈앞에 있는 시우.
린네를 거두어 준 파파, 린네를 여자로 보지 않던 파파.
정신없이 머리에서 뒤섞인 정보가 참과 거짓으로 분류된다.
린네의 냉철한 정신력은 작금의 혼돈으로부터 진실을 도출해냈다.
조금 전까지의 상황은 모종의 마법이 일으킨 달콤한 꿈에 불과했다.
린네는 숨겨진 욕망에 이끌려 상상으로 그려낸 파파에게 잔뜩 어리광을 부렸다.
하지만 지금의 시우는 상상 속의 파파가 아닌 린네의 낭군 즉, 진짜 신시우이다.
조금만 더 린네가 제정신이었다면 즉각 알아차렸을 테지만 워낙에 몸이 달아있던지라 위화감을 감지하는 게 느렸다.
떠돌이 낭인 파파와 조금 어설픈 구석이 있는 낭군은 표정만 봐도 구별이 가능할 텐데 말이다.
그렇다면 위화감이 느껴졌던 시점은 어디인가?
‘린네는요. 아랫입으로도 파파의 우유 마시고 싶어요.’
라는 파렴치한 대사를 쳤을 때부터이다.
그 뒤로는….
‘뜨겁고 기분 좋을 거에요. 린네의 입보다 훨씬 더요.’
‘죄책감 느끼실 필요 없어요. 린네가 파파를 먼저 유혹한 거잖아요.’
‘린네가 동생 낳을게요.’
‘파파의 아기씨 소중하게 품어서 꼭 귀여운 동생 낳을게요. 그러니까 빨리이….’
같은 주옥같은 대사를 다연장 로켓처럼 줄줄이 발사했다.
여기서 한 가지 자문해보자.
Q.낭군은 위 대사를 읊는 린네를 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A.근친상간을 통해 동생을 뱃속에 품길 희망하는 탕녀.
“…….”
숨이 턱턱 막히는 지독한 침묵 속.
린네가 먼저 움직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유카타 자락을 여미며 날카로운 안색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린네.
“낭군, 정신이 들었나?”
그 모습은 흡사 털을 삐쭉 세우고 주위를 경계하는 들짐승 같다.
“우린 호문쿨루스의 자성마법에 휘말린 모양이다.”
“그, 그렇군요.”
“욕정을 자극하는 환술을 거는 개체군.”
무조건 그래야 한다는 양 단언하는 린네.
“기이한 사술을 쓰다니….”
시우에게 보인 모습이 ‘이상향’ 따위가 아니라 사술에 휘말린 결과물이라고 필사적으로 주장하는 듯하다.
“큰일이네요. 빨리 여기서 나가야겠습니다.”
우선은 장단을 맞춰보는 시우지만 고작 한마디 대꾸에 린네의 기세가 와르르 무너지는 게 엿보였다.
애드립은 특기가 아닌 시우다.
게다가 예전부터 증명했듯 린네의 촉은 아주아주 날카롭다.
린네는 낭군의 애매한 반응으로부터 이 꿈이 자신이 그리던 망상임을.
그리고 그것이 들통 나버렸음을 눈치챘다.
“…….”
금붕어처럼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린네.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두 귀가 증기가 차오른 것처럼 점점 빨개진다.
“나는 변태가 아니다.”
“네, 압니다.”
“낭군이야말로 변태적인 취향을 지니고 있다. 나는 정상이다.”
“그 말씀 대롭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시우의 유카타 자락을 붙잡는 린네.
눈가를 보니 당장 눈물을 쏟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다.
“린네 님.”
분명 위로해야 하는 때임을 알고 있지만, 린네의 반응이 반칙 수준으로 귀엽다.
대놓고 놀려주면 더욱 더욱 귀여워질 것 같다.
딱 한 번만 해보면 안 되나?
이걸 어떻게 참겠는가?
“앞으로 낭군말고 파파라고 부르실래요? 크헉!”
그날 시우는 아무리 현모양처라도 역린을 뽑아버린다면 보디 블로우를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 마라! 하지 마라!”
또한 린네가 정말정말 부끄러우면 가슴팍을 투닥투닥 두들기며 눈물을 펑펑 흘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