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
1.
묘한 긴장감 속 시우는 자기 자신을 소개했다.
“아멜리아 님과는 1년 조금 넘게 교제하고 있는 신시우입니다. 원래는 게헨나의 공노예 출신이었는데 우연찮은 계기로 마녀가 되었습니다. 아, 현세에 있을 적에는 유명 공대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습니다.”
장모님을 처음으로 뵙는 자리.
사실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 감이 오지 않지만….
가장 우선시하고 싶은 건 아멜리아의 스승인 말리카 메리골드에게 능력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학벌, 연봉, 능력 사위로서 장모님께 능력을 먼저 인정받는다.
이처럼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맞아요, 스승님. 시우는 정말 굉장해요. 몇 년 만에 대마녀의 격에 걸맞은 힘을 얻었는걸요.”
“그래? 듣던 대로 남자 마녀인 거구나?”
“네, 그렇습니다.”
특히 남성의 몸으로서는 유일하게 대마녀의 지위를 구축했다는 것.
그건 이제까지는 족쇄 혹은 시우를 온갖 위험에 처하게 했던 페널티였으나, 지금만큼은 어떤 남자에게도 찾을 수 없는 메리트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었다.
여지껏 스승님을 제외한 모든 마녀는 시우가 남자 마녀란 사실을 듣고 매우 놀랐다.
노골적이냐 아니냐의 차이는 있었지만 희귀한 연구소재를 발견한 듯 묘한 눈길로 바라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말이니? 참 대단한걸?”
그러나 그런 시우의 기대와 달리 말리카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뜻밖에 그 웃음엔 경악도, 마녀 특유의 탐구심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니?”
대신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인 채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시우가 얼마나 능력있는 사람인지는 그렇게 큰 관심이 없고, 연애 얘기를 듣고 싶어하는 기색만이 가득했다.
평소 겸손한 편이지만 오늘만큼은 잔뜩 미국식 자기 어필을 하고자 마음먹었던 시우로선 조금 당황스러웠다.
원래 이런 건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아닙니다. 실례일 리가요.”
그리고 시우가 당황한 만큼 아멜리아도 당황한 듯하다.
두 사람의 처음은 달달하지도, 그다지 이상적이지도 않은 만남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와선 두 사람에겐 옛날 이야기지만 제삼자가 그것을 어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잠시 고민하던 시우는 운을 떼었다.
“사실 처음에는 그렇게 좋은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
“그때 아멜리아 님은 부교수셨는데…. 노예인 저를 굉장히 못살게 구셨거든요. 그렇죠?”
“너무해요 시우….”
대뜸 밤시중을 들라 해놓고 거절하자마자 달달달달 볶아댔었지.
아멜리아와 시우의 서툶에 권력차이가 더해지며 발생한 환장의 콜라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관계로 발전할지 몰랐었다.
“우리 딸이 영 서툰 면이 많긴 하지.”
의도한대로 명랑한 분위기다.
울상이 된 아멜리아와 달리 말리카는 쾌활한 웃음을 터뜨리며 입가를 가렸다.
시우는 그 뒤로도 아멜리아 부교수의 기발한 부조리들을 와다다다 털어놓았다.
맨손으로 사슴 잡기 챌린지를 했던 일, 단둘이 있고 싶다고 잡무로 연구동 청소를 맡긴 일.
대딸 수업…은 좀 겸연쩍어서 뺐다.
아멜리아의 표정을 울상에서 울먹거리는 지경으로 변했다.
그래도 참 이 관계가 많이 발전했음을 느낀다.
서로의 잘못을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이해했기에 놀리듯 입에 담을 수 있는 주제다.
처음 재회했을 때였다면 벌써 아멜리아는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오두막을 뛰쳐나갔을지도 모르지.
“아멜리아도 아멜리아지만, 시우도 둔감한 면이 있구나?”
“맞아요!”
모처럼 편을 들어주는 스승님의 목소리에 퍼득 고개를 든 아멜리아.
“그래도 네가 나빴어 아멜리아. 좋아한다면서 그렇게 괴롭히면 어쩌니?”
“스승님까지….”
“제가 둔감한 것도 둔감한 거지만 눈치를 챌 수가 없었습니다.”
편을 잃어버린 아멜리아의 손을 테이블 밑으로 은근히 잡았다.
안심시켜주는 깍지손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녀님이 절 좋아한다고 상상이나 했을까요? 어휴 못 하죠.”
시우의 너스레에 활짝 피는 아멜리아와 ‘나보다 더 주책없구나 주책’ 깔깔 큰 소리로 웃는 말리카.
“미워요, 시우.”
다시 스승님의 폭소에 어쩔 줄 몰라하던 아멜리아는 이내 쑥스러운지 몸을 배배꼬며 시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뭐, 지금이 어떠냐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하긴 그러네.”
그 뒤의 이야기는 은근슬쩍 점프했다.
아마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처럼 만날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좋은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닐 것 같고 아마 아멜리아도 원치 않겠지.
“그러면…. 아! 이걸 깜빡했네? 시우 군은 몇 살이야?”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끝맺음이었지만 다행히 눈치채지 못했…을리는 없구나.
알면서도 넘어가 주는 게 아멜리아의 기억 속에서 보던 지혜롭고 현명한 스승님의 모습이다.
“만 나이로 스물 여덟 되었습니다.”
“아멜리아, 너 정말 잘해야겠구나! 내 딸이 도둑이었네 도둑.”
장모님.
엄청 즐거워하신다.
반면 은근히 자기주장이 강한 아멜리아가 저렇게 쩔쩔매며 아무 말도 못하는 것도 처음 본다.
그만큼 믿고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커피잔이 바닥을 들어내고 다시 찰 때마다 많은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서로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느냐는 풋풋한 내용이 위주로 곤란한 질문은 딱히 없었지만 올 것이 왔다.
“두 사람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니?”
“콜록…!”
“자, 잘 못 들었습니다?”
아멜리아는 그림같이 사레에 들리고, 시우도 굉장히 당황했다.
근데 원래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게 맞나?
“의뭉 떠는 거 봐. 잘 들었으면서.”
농담을 빙자한 진담 같기도 하고, 또 그렇다기엔 어딘가 허술한 대꾸.
그렇게는 안보였는데 은근히 장난기가 많은 분이었다.
“노코멘트로 하겠습니다.”
시우가 점잖게 대답을 회피하려던 때.
아멜리아는 ‘숙제 안 가지고 온 사람 손들어’라는 말을 들은 모범생처럼 급발진을 해버리고 말았다.
“…다 했어요, 스승님.”
“아멜리아 님?”
“하지만 시우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제가, 제가 먼저 유혹했어요…. 그리고 결혼도 전제로 만나고 있는 거라….”
“아멜리아 님…!”
제 장난이 이렇게까지 번질 줄 몰랐던 말리카조차 눈이 화등잔만 해져서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시우는 벌떡 일어선 아멜리아를 앉히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런데 아멜리아는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브레이크 없는 고속질주를 이어나갔다.
“스승님은 관계는 결혼 이후 3년까지 신중하게 보라고 하셨지만, 제가 현세에서 나가보니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요. 수백 년 전에나 그렇게 했죠. 오히려 긴밀하고 진중한 사랑을 위해서는….”
“…아멜리아 님, 아멜리아 님…! 제발!”
제발 멈춰주세요!
흥분하신 건 알겠지만 장모님 앞에서 혼전성관계의 중요함을 역설하지 말아 주세요!
이제는 제법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비통하게도 시우의 텔레파시는 아멜리아에게 닿지 않았다.
“뒤로 덮어놓기보다 올바른 관계를 지향하는 게 중요해요!”
“아….”
“아무튼 절대로 부끄럽거나 불경한 일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치고는 얼굴이 너무 붉으시다.
시우는 참담한 심정으로 말리카를 보았다.
그리고 조금 마음을 놓았다.
말리카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두 뺨은 공기를 가득 채워놓은 발리볼처럼 빵빵하다.
즉, 폭소를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후으으읍….”
한차례의 심호흡으로 마음을 간신히 가다듬은 말리카가 입을 열었다.
“잘했구나.”
“네, 스승님 말씀대로. 있는 힘껏, 후회가 남지 않게 사랑하고 있어요.”
쫓기듯이 말을 이어가던 아멜리아지만 마지막 한마디만큼은 또박또박했다.
2.
말리카와의 면담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
물론 예상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의 싱거움이지 보람 없는 시간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티타임을 끝낸 이후엔 오두막 대청소에 돌입했다.
“마법은 분명 편리하지.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도 보람찬 일이야.”
이러한 말리카의 주장에 의해 세 사람 모두 소매를 걷고 말이다.
구석구석 조금씩 쌓인 먼지를 닦고, 베이킹에 사용된 식기를 설거지했다.
침대 시트와 이불을 교환하고 깃털 베개에도 손수 깃털을 채워 넣었다.
전에도 했던 생각이지만 ‘집안일’을 공유하는 건 정말 그 가족의 일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그렇게 잘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아멜리아도 오늘만큼은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스승님과 소소한 잡담을 하며 키득거리고, 이따금 장난을 치는 모습은 두 사람이 단순히 사제, 모녀 관계가 아니라 자매 같은 사이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시우도 웃었다.
가끔은 대화에 끼어들기도 했다.
분주히 움직여 청소를 끝냈을 무렵엔 어느덧 밤이 되었다.
시우와 아멜리아는 각기 잠옷으로 갈아입었고 말리카는….
어느덧 떠날 채비를 끝내고 있었다.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큼직한 숄을 두른 것이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예기치 못한 돌발사고로 막을 내리려는 연극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말리카 님? 어디 가시나요?”
말리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아멜리아가 시우의 손을 꼭 붙잡고 섰다.
그 손끝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아멜리아.”
“네, 스승님.”
“알고 있었니?”
“네. 스승님은 또, 먼 여행을 떠나시겠죠.”
“응, 아쉬워. 나도 너와 함께 있고 싶은데…. 아멜리아.”
“사과하시면 화낼 거에요. 걱정하실 필요도 없어요.”
호문쿨루스가 만들어낸 꿈은 이상향을 그려낸다.
모처럼 돌아온 스승님이 다시 먼 여행을 떠나는 이 상황은, 결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아멜리아의 이상향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자 아멜리아의 옆 얼굴이 보였다.
의연한 의태를 한껏 내세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아기 같은 표정이.
“이 오두막에는 이제 시우가 있으니까요.”
아멜리아가 가장 행복한 시절의 기억이 담긴 오두막에서, 시우의 손을 잡은 채 배웅을 준비한다.
“그렇겠지? 그래, 그거면 됐네.”
말리카는 그런 아멜리아를 바라보며 후련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저는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이거보다 더 행복해 질 거에요. 세상 누구보다 더요.”
아멜리아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꿋꿋이 입꼬리를 당기며 미소를 만들었다.
“그래, 엄마는 내 딸 믿어.”
말리카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공간이 출렁인다.
무대의 조명이 꺼지듯 창밖으로 달빛이 어슴푸레 비치던 장면이 어두컴컴하게 변해간다.
“이제 가봐야 할 시간이네.”
“엄마.”
“응?”
“사랑해요.”
“왜 이러니, 부끄럽게. 나도 많이 사랑한단다.”
마지막으로 진한 포옹을 하고 아멜리아의 이마에 키스한 말리카는 등을 돌렸다.
무대 밖으로 퇴장하는 배우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고 멀어져갔다.
점으로 변한 말리카의 뒷모습이 마침내 사라졌을 때.
호흡조차 멈춘 채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시우는 걱정스레 물었다.
“처음부터 알고 계셨나요…?”
아멜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우의 손을 잡았을 때 알게 되었어요.”
발그스르한 뺨엔 방울방울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녀의 대답을 듣고 괜찮으냐는 위로는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선 그 어느 때보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느껴졌으니까.
“고마워요, 시우.”
아멜리아의 조막만한 머리가 툭 시우의 어깨에 얹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