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9
1.
쇠뿔도 단김에 빼버리라는 말이 있다.
시우는 이른 아침부터 여행 준비를 서둘렀다.
짐을 챙기고 서울 공항으로 이동.
엘로아가 준비한 보잉 사의 비지니스 제트에 탑승한 뒤 곧장 목적지로 향했다.
목적지라 함은 시우를 치료해 줄 ‘영혼의 마녀’의 공방,
예빈이 전해 준 GPS 좌표에 의하면 몽골의 알타이 산맥,
더 정확히는 몽골의 서쪽 끝에 위치해 중국,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알타이 바왕 보그드 국립 공원’ 인근의 고원지대였다.
사실 전용기를 타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게헨나의 문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빠른 이동 방법이었다.
알타이 산맥은 분명 해발고도가 높은 고지대이나 만년설의 빙하가 녹아내린 강 흐르고, 지각변동으로 생겨난 호수도 많으니 포탈을 이용하면 손쉽게 도달할 수 있는 오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건 공적 신분인 린네와 도로시.
그녀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라도 항공편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숨만 쉬어도 트러블을 일으키는 시우인 만큼 호위 인력은 가능한 많으면 좋고 말이다.
“이야, 출세한 기분인데요?”
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전용기는 탈것이라기보다는 호화로운 파티를 위해 준비된 연회실 같았다.
나름 심포지엄이니 학술회니 하며 비행기를 자주 타고 다녔던 시우조차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스무 명 정도가 편하게 앉아갈 수 있는 라운지의 좌석하며, 샤워실, 심지어 푹신한 침대가 준비된 침실은 보통 퍼스트 클래스에서도 기대하기 힘든 모습이니 말이다.
그렇게 이륙한 지 1시간이 되었을 무렵.
연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먼저 비행이 익숙한 엘로아, 린네, 도로시.
현세에서 돌아다니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문명의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하는 린네와 도로시는 태연하기 짝이 없다.
언제나 비슷한 수준의 시설을 이용해왔다는 좌석에 편안히 몸을 기댄 채 독서를 하거나 명상을 하거나 한다.
애주가인 스승님도 자연스레 칠링되어 있던 샴페인을 개봉해 홀짝이고 계셨고 말이다.
“…….”
다음은 비행이 처음인 르뤼에, 샤론, 아멜리아.
“호오오…. 오오오….”
특히 르뤼에는 이륙부터 지금까지 창밖에 얼굴을 바싹 파묻은 채 하늘을 내려보고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보고 있는지 옆에서 보고 있어도 눈을 거의 깜빡이지 않을 정도다.
“바다만 넓은 줄 알았건만 하늘 또한 이토록 드넓구나. 실로 장관이도다.”
르뤼에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눈을 반짝였다.
실제로 인생 대부분을 심해에서 보내온 르뤼에이다.
최근 시우를 따라 이런저런 경험을 하긴 했으나 하늘에서 강처럼 흐르는 구름의 모습은 르뤼에의 가슴을 웅장하게 하기 충분했다.
“그렇게 신기하세요?”
“물론이다. 커다란 철 덩어리를 하늘에 띄우는 것도 그렇고…. 인간들의 능력도 썩 쓸모가 있구나. 오딜과 오데트도 이 장면을 보았어야 하는데….”
어느새 절친해진 둘을 떠올리며 못내 아쉬운 소리를 하는 르뤼에.
“걱정 마세요. 안 그래도 조금 전에 문자 왔습니다. 이거 보실래요?”
[조수님!]
[우리도 비행기 탔어!]
[사진]
전용기는 비행 중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르뤼에에게 쌍둥이에게서 온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무렇게나 찍어도 빛나는 쌍둥이의 미모 뒤로는 마찬가지로 전용기의 풍경이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장모님께 여쭤보니 자신들도 비행기를 타고 싶다며 떼를 쓴 통에 하늘 위에서 빙빙 도는 중이라고 한다.
곧 일정에 맞춰 다시 서울공항으로 착륙할 예정이라고.
그 다음은 샤론.
“흐음~ 흐으음~”
처음의 호들갑은 어디 갔는지 다리를 꼬고 편히 앉은 샤론은 우아한 동작으로 술을 마셨다.
르뤼에 이상으로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렇게 좋아?”
“응, 뭔가 부르주아가 된 기분이야.”
샤론도 비행기는 처음이지만 르뤼에만큼 경탄하지는 않았다.
현세 생활이 길었던 만큼 각종 영화나 매체 따위로 간접경험을 해왔으니 말이다.
대신 본디 상위 소수 부자들만 즐길 수 있는 서비스를 마음껏 만끽하길 택했다.
돈 많은 사모님처럼 ‘이런 거 일상이잖아?’라는 표정을 한껏 지어 보이며 우아하게 와인을 마시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샤론이 보여주는 소소한 주접은 무척 귀엽다.
“아아, 아니야. 옷도 조금 더 이쁜 걸로 챙겨입을 걸…. 내릴 때도 영화배우처럼 멋지게 내리고 싶은데…. 안 되겠어, 일단 샤워도 해봐야지. 이런 때 아니면 언제 해 보겠어.”
그런 의미에서 무려 구름 위에서 샤워도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 샤론.
벌떡 일어난 샤론은 은근한 눈짓을 시우에게 보냈다.
“시우도 같이 할래…?”
별일 아닌 양 자연스럽게 말하지만 수줍음이 묻어나오는 떠보기.
몹시 혹하는 제안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힘들다.
“다음에 해야 할 것 같네.”
“응, 그러네.”
시우가 쓴웃음을 흘리자 샤론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시선은 시우 옆구리에 악세서리처럼 매달려 있는 아멜리아에게 향해 있었다.
단 둘이 있을 때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시우를 대하는 아멜리아지만 다른 연인과 있을 땐 그다지 살갑게 굴지 않는다.
옆에서 본다면 ‘두 사람 정말 사귀어?’라는 질문이 날아올 만큼 말이다.
아마도 쑥스러워하는 탓일 터이다.
하지만 지금의 아멜리아는 달랐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부터 조금 전 르뤼에와 대화할 때마저 인형 키링처럼 시우의 허리를 끌어안고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거의 한 번 보호자를 잃어버렸던 미아 같았다.
“아멜리아 님, 괜찮으세요?”
“시우…. 어지러워요….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네다섯 시간 정도 더 걸릴 것 같은데….”
다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전용기를 즐기는 와중 오직 아멜리아만 얼굴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지난번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를 탄 직후와 상태가 흡사하다.
몹시 불안해하고 무서워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기체 자체가 조금 작은 만큼 난기류에 쉽게 영향을 받는데 한번 비행기가 덜컥일 때마다 시우의 허리를 조이는 팔심이 강해졌다.
비행기 추락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는 건 물론, 이런 비행기가 수십 척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해도 사고 없이 수습할 수 있을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무서워하는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아마 멀미 때문이려니 짐작 중이다.
그래도 최대한 케어에 나섰다.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아멜리아를 보는 게 진귀한 경험이기도 했고 말이다.
“시우…. 저는 게헨나를 통해서 갈게요. 여기에 비행기 세워주세요.”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속이 너무 울렁거려요….”
참고로 이번 여행의 목적은 스승님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로 했다.
공연히 걱정을 시키고 싶지도 않고, 특히 아멜리아는 이 일에 민감해 할 테니 말이다.
만약 정밀 검사를 위해 영혼의 마녀를 찾아간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지금 아멜리아는 힘든 와중에도 눈물을 글썽이며 시우에게 미안해할 것이 뻔했다.
따라서 이번에 국립공원을 향하는 이유는 묵시의 마녀에게 ‘예언의 꿈’을 해독하기 위해 예언기관을 찾겠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마침 예언 기관으로 향하는 ‘회랑’ 중 하나가 근처에 있기 때문에 적절한 핑곗거리가 되어주었다.
“우으, 우으으으….”
“웃차.”
시우는 힘들어하는 아멜리아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리광쟁이 모드 아멜리아의 귀여움과는 별개로 이렇게 계속 힘들어하다간 진이 쭉 빠질 게 뻔한 노릇.
조금 진정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조금 주무셔요.”
“싫어요…. 시우랑 함께 있을래요….”
침실 문을 열고 침대 위에 그녀를 눕히자 아멜리아는 조금 더 애교쟁이가 되었다.
라운지에서는 그나마 보는 눈이 있어서 자제한 모양이다.
침대에 누운 채 깍지 손을 꾹 끼고 ‘같이 있어주세요’라고 눈으로 말하는 아멜리아.
한껏 약해진 그 모습이 딱하고 안쓰럽긴 해도….
어딘가 함락시키고 싶어지는 부분이 있다.
더군다나 재회한 이후 아직 한 번도 관계를 맺지 못했지 않은가?
“제가 멀미에 괜찮은 약을 알고 있습니다.”
“멀미… 이게 멀미인가… 웁?”
시우는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뻔한 대사와 함께 입술을 포갰다.
나무둥치에서 졸다가 비를 맞은 새처럼 퍼득 어깨를 떠는 아멜리아.
“츄유….”
그러나 이내 편안하게 몸일 이완한 채 시우에게 모든 걸 맡기고 진득한 프렌치 키스 타임에 돌입했다.
아멜리아의 키스 방법은 꽤 독특했다.
혀를 직접 내미는 경우가 없는 대신 입안에 들어온 혀를 순종적으로 빨아들인다.
마치 애무하듯이 말이다.
눈꺼풀을 파르르 떨면서도 목에 팔을 걸어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아멜리아.
가슴 위로 꾹 움켜쥔 두 주먹은 그녀가 아직도 키스에 익숙지 않다고 말하는 듯했다.
“츄우웁…. 쪽….”
인중을 간질이며 살며시 얽히는 콧김.
단련된 영체의 초월적인 기감은 두근두근 올라가는 심박 수마저 짚어낸다.
아멜리아는 멀미의 기운이 훠이훠이 사라지고, 대신 야릇한 충동이 가쁘게 샘솟는 것을 느꼈다.
고작 문하나 너머에 다른 연인들이 있는데….
아마 소리를 절대로 숨기지 못할 텐데….
그럼에도 이 자리에서 시우와 키스 이상을 하고 싶다는 것.
이번에 교보문고에서 손에 얻은 비급으로 침대 스킬이 레벨업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아멜리아는 이번에야말로 머릿속 지식을 활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아…. 시우….”
관능으로 촉촉하게 녹아들어 간 아멜리아는 키스가 끝나자마자 시우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 책에 의하면 이런 상황 속.
한국에서 자연스럽게 쓰이는 은어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라면이 먹고 싶어요.”
‘라면을 먹고 갈래?’라고 묻는 것.
그 비급에 의하면 호감이 있는 관계에선 결코 거절할 수 없다는 필살기라고 말했으니 분명 시우를 유혹할 수 있겠지.
그렇다고 너무 노골적으로 서적 상의 표현을 인용하기엔 마땅찮았기에 아멜리아 나름의 완곡한 표현을 곁들인 것이었으나….
잠시 뒤.
“…….”
전용기 식당에 오도카니 앉은 아멜리아는 제 앞에 물이 부어진 컵라면을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분명 필살기라고 했는데 이게 왜 이렇게 되는 거죠? 라는 심정이었다.
“확실히 빈속이면 멀미가 심하긴 하죠. 영체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뭘 먹으면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네, 고마워요 시우….”
물론 시우로서는 아멜리아가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표현법을 알 리가 없다 지레짐작하고, 그 말뜻을 곧이곧대로 해석했을 뿐이다.
‘모처럼 분위기 좋았는데’ 라는 아쉬움을 남기며 말이다.
“다른 분들도 드실 건지 여쭙고 올게요. 잠시만요.”
자리를 비운 시우 탓에 컵라면과 단둘이 남게 된 아멜리아는 포크를 들어 면을 한입 먹었다.
“…훌쩍.”
너무 매웠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