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1
1.
사실 예빈에게 처음 진료를 받으러 올 때까지만 해도 시우는 낙관하고 있었다.
고작해야 감각이 조금 느껴지지 않는 것일 뿐 아무런 통증도 이상도 없다.
또 무술의 달인인 시우인 만큼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자잘한 실수를 하는 일도 없었다.
신체의 중심부터 말단까지 눈으로 보지 않아도, 느끼지 않아도.
말단까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마력을 강한 영체 강화의 첫걸음이었으니 말이다.
이미 감각이 사라진 손으로 몇 번이나 되는 위험한 전장을 넘어왔다.
의수를 달아준 코하브 백작도 별다른 이상을 찾지 못했는데 뭐 그리 심각한 일이나 될까?
“이상하네요….”
따라서 시우가 믿고 있던 치유 전문 마녀 예빈, 그녀조차도 난색을 보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헥센나흐트에 있었을 당시도 제대로 된 검사 기구만 갖춰진다면 원인을 밝혀낼 수 있으리라 말했으니 말이다.
“또 인가요?”
“신경망에도, 영체 조율도, 마력 회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수치상으로는 모두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어요.”
벌써 5번의 재검사.
다양한 검사 기구를 활용해 여러 방면에서 살폈다.
코하브 백작의 의수는 결함 없이 시우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예빈이 뭔가 더 할 건덕지는 없어 보인다.
“이상이 있지만, 이상이 없다….”
그럼에도 나오는 건 모순된 결과뿐.
“…마지막으로 영체 전체 투사 검사를 해볼게요.”
“그건 뭔가요?”
“음…. MRI를 생각하시면 편해요. 검사지가 나올 때까지는 사흘 정도 걸리니까 그때 한 번 더 판독해 볼게요.”
전문가인 예빈이 당장 뾰족한 수가 없다는데 시우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우선은 현세로 합류하기로 한 몸.
결과가 판독되는 대로 연락을 약속받고 저택으로 돌아섰다.
문의 점검도 끝났으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2.
“조수님이 안 와.”
“샤론 언니 조수님이 안 와요.”
“어휴, 몇 번이나 말했잖니. 문이 점검 중이라 시간이 걸린대.”
“초록 머리, 네가 어서 데려오도록 하거라.”
“점검 중이라고 했잖아….”
“여왕의 명령이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해봐라!”
“안 된다니까!”
침대에 축 늘어진 쌍둥이는 온종일 칭얼거렸다.
사실 그것만이라면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샤론이지만 르뤼에까지 거드는 통에 결국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나마 일전엔 서울 구경이라도 시켜주면서 관심을 돌렸는데 시우가 없는 기간이 길어지니 좀처럼 먹히질 않는다.
모처럼 백화점을 가도 금방 조수님은 어딨어요, 조수님 보고 싶다, 빨리 데려와라, 연락 좀 해봐라 온갖 채근에 시달리는 통에 샤론은 노이로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거기에 가장 억울한 점 하나.
쌍둥이와 르뤼에가 칭얼거리는 대상은 오직 샤론이다.
부엌 테이블에서 책을 읽으며 여유롭게 커피를 홀짝이는 아멜리아에게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이게 아마도 ‘먹힌다’라는 거겠지.
하긴 아멜리아 양은 뭔가 말을 붙이기 어려운 무서운 구석이 있으니 말이다.
“…….”
한편 아멜리아는 힐끗 샤론과 세쌍둥이를 훔쳐 본 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린다.
뭔가 부럽다.
허물없이 어울려 지내는 저 네 사람이.
서점에서 책을 찾은 이후 틈틈히 읽고 익혔지만 평생 동안 몸에 습득한 습관이나 능력이 고작 책 몇 줄 읽는다고 바뀌는 건 아닌 모양이다.
‘자신은 언제쯤 저렇게 가까워질 수 있을까?’ 작은 낙담을 품고 북커버로 표지를 가린 책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샤론이 다가왔다.
“아멜리아 님, 무슨 책을 읽으시나요?”
샤론은 세쌍둥이의 어그로를 조금이라도 아멜리아에게 옮겨두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먼저 말을 걸어준 샤론이 반가웠다.
본래는 꽁꽁 숨겨둔 채 혼자 읽으려던 아멜리아만의 비장의 무기였지만….
‘사랑받는 연인이 되는 법’.
이 한 권 정도라면 공유해도 괜찮지 않을까?
“이거에요. 전에 대형 서점에 갔을 때 샀어요.”
북커버를 벗기고 조금은 유행이 지난, 요란스러운 표지를 보여주는 아멜리아.
“우와…. 잘도 이런 책을 찾으셨네요….”
나름 현세살이에 잔뼈가 굵은 샤론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아멜리아가 들고 있는 책이 유행이 최소 10년은 넘게 지난,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건만 연애의 고수를 자칭하는 사기꾼이 부지런히 찍어낸 불쏘시개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멜리아가 이 책을 발견한 건 서점의 구석탱이.
원래 찾기도 힘들 만큼 구석에 처박혀있는 책은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죠? 원래는 혼자만 보려고 했지만…. 다 읽고 나면 샤론 양에게도 보여 드릴게요.”
하지만 샤론은 차마 소중한 보물지도를 보여주듯 수줍게 말하는 아멜리아의 앞에서 ‘그거 버릴 땐 종이류로 분류해주세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음…. 네. 고마워요.”
“천만에요.”
샤론이 아멜리아에게 접근하자 쌍둥이도 슬금슬금 가까워졌다.
저번에는 불발로 돌아갔지만, 언제든 아멜리아와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쌍둥이다.
물론 그 이유는 ‘샤론 언니 때처럼 마음 놓고 다투기 위해서’라는 불순한 의도이지만 어찌 됐건 말을 붙일 절호의 찬스.
“부교수님! 저희도 그 책 관심 있어요!”
“무슨 내용인가요?”
“아, 이건….”
양 옆으로 고개를 들이민 오딜과 오데트는 아멜리아가 펼쳤던 페이지의 챕터를 곁눈질했다.
“남녀의 나이 차에 따른 연애?”
“어디 보자, 짐도 한 번 보자꾸나.”
쌍둥이가 이동하자 평소 아멜리아를 무서워하는 르뤼에도 슬금슬금 다가온다.
해당 챕터가 설명하는 건 커플 간 이상적인 나이 차이와 그에 따른 선호도에 관한 내용이었다.
샤론에게라면 몰라도 쌍둥이와 르뤼에에게 해당 서적의 전문성을 판별할 지식은 없다.
단숨에 흥미를 보이며 책을 읽는 세 쌍둥이.
“후후후.”
“하하하.”
고개를 나란히 모으고 팔랑팔랑 페이지를 넘기던 쌍둥이가 별안간 우쭐한 웃음을 내뱉었다.
“이건 이미 정해진 게임이었네요.”
“뭐, 더 읽을 필요도 없네.”
“그건 또 무슨 말이더냐?”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묻는 르뤼에에게 쌍둥이는 하늘까지 콧대를 치켜세우며 우쭐댔다.
“샤론 언니 몇 살이에요?”
“나? 32살.”
“르뤼에 넌?”
“짐의 나이라…. 아마 서른 근처쯤 됐을 것이다. 마녀가 그런 걸 뭣 하러 세겠느냐?”
“우하하하!”
폭소를 터뜨리는 쌍둥이.
손가락으로 방금 넘겼던 페이지의 어떤 줄을 가리키며 읊는다.
“남성은 연하를 선호하는 경향이 크다!”
“미혼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남성의 60%가 연하를 선호한다고 밝혔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제야 어렴풋이 깨달은 나머지 연인들에게 쌍둥이는 쐐기를 박았다.
“저희는 유일하게 조수님보다 연하! 꽃 같은 나이 만 21세!”
“즉, 가장 우월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다 이 말씀…!”
샤론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멜리아는 새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정확히 나이를 세 본 적이 없지만 아멜리아는 얼추 170년 가까이 살아왔다.
아직 20대 후반인 시우와 비교하자면 최소 100살이 넘는 연상이라는 말.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이 책에서는 100살 연상에 대해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멜리아와 시우의 나이 차는 아예 노카운트라는 이야기 아닌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패닉에 빠진 아멜리아는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고 드물게 큰 소리를 내었다.
“이 책은 인간들의 연애를 기술한 책이잖아요!”
마녀 사회는 애초에 나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평생을 인생 전성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나이가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따라서 단 한 번도 연상이니 연하니 하는 관점에서 접근해 본 적이 없었다.
“부교수님 이해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현실이 이렇잖아요?”
발끈한 아멜리아는 반박했다.
“무슨 현실이 그렇다는 거죠? 그리고 마녀의 나이는 그렇게 세는 거 아니에요!”
우쭐해진 쌍둥이는 두려움조차 잊어버린다.
팔짱을 낀 채 여유롭고 능글거리는 태도로 아멜리아를 대했다.
“흐음?”
“그럼 어떻게 세야 하는데요?”
“그깟 나이가 뭐가 중요하겠느냐? 원래 여왕은 수십 살 어린 남자도 거느리는 법이다.”
의외로 별 관심 없는 르뤼에와 달리 아멜리아의 지원사격에 나선 샤론.
“당연히…. 마녀는 계승 이후로 나이가 멈추는 걸로 쳐야죠!”
“맞아! 우리가 늙는 것도 아니고!”
샤론 역시 시우와의 나이 차를 크게 신경쓰지 않아 왔다.
그러나 이제껏 크게 신경 쓴 적 없는 나이차를 현실적으로 언급하자 별로 좋지 않게 들린다.
그렇게 치자면 샤론은 벌써 30대 아닌가?
“쯧쯧쯧”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연상들의 단말마가 딱할 뿐이에요.”
쌍둥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태껏 견습마녀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패널티를 안고 가야 했던가?
다른 연인들 다하는 것도 못하고, 밀회도 스승님들의 눈을 피해 몰래몰래 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견습마녀이기에 지닐 수 있는 어드밴티지’를 쉽게 넘겨 흘릴 리 없다.
“시우는 연상 취향일 거예요!”
“맞아, 연하는 너희밖에 없잖아!”
“어른스럽지 못하도다. 별 시답잖은 일로 핏대를 세우는구나.”
그때 들려오는 도어락 버튼음.
-삑삑삑삑
사이 안 좋은 강아지처럼 깽깽꺵 시끄럽던 일동의 움직임이 일제히 멎는다.
“조수님이다! 언니! 조수님한테도 이 책 보여주자!”
“조수님 왜 이렇게 늦었어!”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나간 쌍둥이가 문을 벌컥 연 순간.
숨을 멈추고 말았다.
“…….”
외견만 놓고 보자면 아멜리아 부교수님보다도 싸늘해 보이는,
잘 벼려진 칼날 같은 기도를 내뿜는 마녀가 문앞에 등장했으니까.
“히익…!”
“르뤼에! 습격! 습격!”
어찌나 살벌한지 조수님이 게헨나에 갇혀있던 두 공적을 데려올 예정이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별안간 등장한 무서워 보이는 마녀에게서 도망쳐 역돌격하는 쌍둥이.
“여왕님~ 저 왔어요~”
“도로시!”
그런 무서운 마녀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푹 누르며 이번엔 유들유들한 인상의 마녀가 들어섰다.
이번에는 르뤼에가 반색이 되어 호다닥 달려나가고.
“린네 표정 좀 풀어. 스마일~ 스마일~ 애기들이 겁먹잖아.”
“손 치워라. 자르기 전에.”
“다녀왔어요.”
“시간이 지체되었네. 면목이 없군.”
린네와 도로시의 정다운 대화 너머로 엘로아와 시우가 들어섰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모든 연인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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