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0
1.
나른한 눈꺼풀 위로 내리쬐는 햇살.
한가로이 울리는 새소리.
오늘따라 유달리 푹신푹신한 이불.
이상은 늦잠의 전조이다.
꼬박 하루 24시간을 조금 넘게 침대 위에서 사랑을 나눈 린네와 엘로아는 몽롱한 와중에도 자신들이 늦잠을 잤다는 걸 깨달았다.
“후음….”
“으음….”
하지만 엘로아도 린네도 딱히 직장인은 아니다.
비몽사몽 중에 늦잠잤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겁지겁 일어날 필요는 없다.
시우의 양옆에 각기 한 자리씩을 차지했던 둘은 눈이 보이지 않아도 젖을 찾는 새끼처럼 꾸물꾸물 손을 뻗었다.
“흐으음….”
“하음….”
부드러운 살결과 뽀송한 맨살이 맞닿는 기분 좋은 감촉.
뺨이 만져진다.
뺨이 만져진다는 의미는 시우가(낭군이) 이쪽을 보고 자고 있다는 의미다.
“시우, 잘 잤는가?”
“낭군, 좋은 아침이다.”
거기에 소소한 만족감을 느끼며 눈을 뜬 두 사람은 각기 눈앞의 인물을 보았다.
그리고 찬물을 뒤집어쓴 듯 잠에서 깨어난다.
“아….”
“어….”
왜냐하면 두 사람은 서로의 다리를 꼬은 채, 서로의 뺨에 손을 얹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흡사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레즈비언 연인이 꽁냥꽁냥을 시전하는 구도이자 포즈.
어쩐지 시우의 다리치고는 너무 가느다랬으며,
어쩐지 낭군의 뺨치고는 너무 말랑말랑하다 싶었다.
사소한 계기였지만 일전이었으면 거친 말다툼과 감정싸움으로 이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실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
“…….”
하지만 엘로아와 린네의 반발은 격렬하지 않았다.
그저 휙 서로에게 떨어져 몸을 일으킨 이후 각기 이불로 알몸을 가리며 서로 등졌다.
술김에 모텔을 빌렸다가 아침에 제정신을 찾은 소꿉친구 커플처럼 말이다.
“어어….”
“으음….”
각기 긴 침음을 내뱉으며 어젯밤까지 있던 일을 떠올린 두 사람.
허겁지겁 시우가 놔두고 갔을 것이 분명한 가운을 챙겨 입는다.
지금 시우가 어디 갔는지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광란의 쓰리썸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두 사람에게는 맨정신으로 어제의 만행을 되짚어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어젯밤부터….
정확히 뭘 했더라?
새록새록 스쳐 지나가는 건 온통 살색 뿐인 음탕한 장면들.
어처구니 없는 대립 방식으로 경쟁하듯 애무 대결을 했던 것.
상대에게 미처 보이지 못할, 온갖 수치스러운 절정을 공개하게 된 것.
나중에는 아예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몸을 섞었던 것까지.
“내가 왜 그런 짓을….”
왜그랬을까?
연적과 승부를 낸다는 취지까지는 괜찮았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본다면 스승 된 입장에서 제자를 난교에 끌어들인 셈이다.
연적에게 은밀한 곳을 빨리고, 쑤셔지면서 앙앙거려 버렸다.
“…….”
왜 그랬던 걸까?
분명 티페레트를 멋들어지게 쓰러뜨리고 그녀보다 높은 배분의 신부임을 인정받아 무릎 꿇릴 생각이었는데.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길래 낭군의 체액만큼이나 많은 티페레트의 체액을 삼키게 되었는가.
뒤늦게 감당하게 된 민망함과 흑역사의 재생, 또 짙게 피어오르는 후회는 서로를 향한 적개심조차 잠시 접게 하였다.
어제는 뭔가 마가 꼈던 것이 분명하다.
엘로아는 눈물을 글썽였고, 린네는 머리를 마구마구 헝클어뜨렸다.
“일어나셨어요? 타이밍이 별로네요. 식사 좀 챙겨오던 차였는데.”
때마침 시우가 트레이에 간단한 식사를 가득 담아 들어섰다.
2.
즐거운 점심 식사시간.
시우는 두 스승님을 보았다.
예상대로 침대 위 대화합 작전은 어떤 면에서는 성공적이었다.
적어도 두 사람이 서로를 날이 선 태도로 대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성공적이었다는 말은, 어떤 면에서는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말과도 같다.
“…….”
“…….”
한마디 말도 없이 깨작깨작 토스트를 먹는 스승님과 마찬가지로 어두운 표정으로 차만 홀짝이는 린네.
거기에 끼어들어 몇 번인가 바람을 잡아 보았지만, 침묵으로 응수 당해 덩달아 입을 다물게 된 시우.
어색함의 폭풍이 휘몰아친다.
정신을 차린 지금 와서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에게는 비단 스승이라는 공통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각기 진중함을 고봉밥처럼 꾹꾹 눌러담은 사람이라는 점도 동일하다.
즉, 아침에 깨었을 때 전날 보였던 추태를 가장 부끄러워하는 두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1, 2 순위를 다투는 두 분이다.
“낭군.”
더 이상의 침묵이 버거웠던 건지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린네.
언제나 반듯이 눈을 마주쳐오던 린네지만 오늘은 엄한 허공을 쳐다보며 말한다.
“그래서, 승자는 누구지?”
아, 맞다.
원래는 그런 설정이었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그….”
“정신이 들자마자 헛소리군.”
언제 어색했느냐는 듯 칼날같이 말 허리를 자르는 스승님.
이번 화해가 무색하게 둘의 시선이 날카롭게 부딪…치지는 않았고, 각기 다른 곳을 보고 있긴 하다.
“공정한 판정을 받는 게 두렵나?”
“린네, 너는 네 입으로 항복 선언을 했네. 이제와서 번복할 셈인가?”
그렇다.
린네가 엘로아를 공격했고, 뒤이어 엘로아가 린네를 공격했다.
엘로아는 항복 혹은 패배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린네는 괴롭히기를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듯 항복하고 말았다.
엘로아는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흥, 궤변이다.”
“그대야말로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겠으나 궤변을 주워섬기겠군.”
“그 뒤로도 여러 번 겨루었다. 다전제에서 한판 승리를 따낸 것으로 모든 승리를 받아가려 하는군.”
즉, 엘로아는 린네가 탭을 쳤으니 끝났다고 말하는 것.
린네는 그건 많은 라운드 중 한 번의 판정을 따낸 것뿐이라는 논리다.
“잠시만요.”
어수선한 공기 속 시우가 주의를 끌었다.
“어느 쪽이 우세했느냐 말씀드리는 건 쉽지 않습니다.”
“낭군의 우유부단함은 알고 있다.”
“아주 미세하게나마 더 나았던 쪽이 누구였는지 듣고 싶은 걸세.”
시우는 고민 끝에 답했다.
비록 질문의 취지 자체는 잊고 있을지언정 항상 생각해왔던 내용이었다.
“엘로아 님도, 린네 님도. 두 분 모두 제게는 과분할 만큼 좋은 분이에요.”
결과가 발표되는 듯하자 티격태격을 멈추고 조용히 경청하는 두 사람.
“그런데 어떻게 순서를 나누겠어요. 앞으로 두 분을 동시에 품어도 부끄럽지 않게 더 괜찮은 남자가 되겠습니다. 두 분이 굳이 싸우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을 만큼 그릇이 큰 사람이요.”
얼렁뚱땅 넘어가는 듯한 발언이었으나 시우의 진심은 충분히 전달된 모양.
쌍심지를 치켜세우던 스승님도, 못마땅한 듯 노려보던 린네도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대는 이미 좋은 사람이라네. 처음부터 좋은 사람이었고.”
“낭군은 내게도 과분한 사람이다.”
솔직담백한 시우의 말에 잠깐이나마 휴전을 택하는 두 사람은 역시나 제자를 너무 사랑하는 스승님의 모습이었다.
3.
이렇게 스승님 간의 대결은 훈훈한 분위기 속에 무승부로 마무리 지어졌다.
남은 시간 동안 시우는 예빈이 머무는 타로 타운의 치료소를 찾았다.
빈손으로 들고 오기엔 뭐해 먼저 보더 타운에서 집들이 선물들을 챙겨왔다.
라면 한 박스와 과일바구니 따위 말이다.
“에반데.”
이거 아무래도 타이밍을 잘못 맞춘 것 같다.
예빈이 돌아온 타로 타운의 치료소는 사람들 발길로 북적였다.
게헨나 시청에서 예산을 받아 무상으로 시민에게 공급하는 만큼, 그동안 순번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치료소 밖까지 길게 늘어선 줄.
예빈을 성녀님이라 부르며 칭송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양해를 구하고 나아갔다.
이미 시우의 얼굴을 모르는 시민은 없다시피 했기에 다들 고개를 조아리며 길을 비켜준다.
게헨나 최초의 남자 마녀는 어지간한 마녀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거물이었으니 말이다.
“할아버지, 약 지어드릴 테니 이틀 뒤에 오시겠어요? 한창 나아가는 과정이라 조금 간지러울 수 있는데 절대 긁지 마시고, 이틀에 한 번 정도는 꼭 씻어주셔야 해요?”
“아이고오, 성녀님. 항상 감사합니다, 언제나 항상 감사합니다.”
“에이, 성녀님 아니라니까요. 제가 무슨 성녀님이에요. 어? 시우 씨!”
노인의 칭찬에 쑥스러워하던 예빈은 시우의 얼굴을 보자마자 화색이 되었다.
“너무 바쁠 때 찾아뵙게 되었네요.”
“언제 오시더라도 환영해야죠!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네네, 저도 거들게요.”
유명인사라고해서 특별대우를 받을 마음은 없다.
아무래도 이 인파를 전부 소화하기 전까지 진료를 받기 힘들 것 같으니 소매를 걷어붙이고 예빈을 도왔다.
그로부터 3시간 뒤.
그 많던 인원을 순식간에 진료한 예빈은 상쾌한 얼굴로 차를 권했다.
“헥센나흐트 때부터 시우 씨 덕을 참 많이 보네요.”
“오자마자 일하시네요. 힘들진 않으신가요?”
“힘들긴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보람차죠.”
“대단하시네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정말로 뿌듯함으로 가득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품고 스스로 힘으로 세상에 이바지하며 땀을 흘린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
여러 생각이 들었다.
마녀가 된 이후 시우는 여태껏 경제적인 궁핍함을 느낀 적이 없이 호화로운 환경 속에 지내왔다.
하지만 그건 시우 본인의 능력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제머나이 백작가의 재력에 기대어 온 것에 불과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
각종 사건에 휘말려 살아남기 바쁜 나머지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을 하기는커녕 언제나 은근히 기대며 도움만을 받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자각하게 된 것이다.
시우에게 딸린 연인만 과분할 정도로 많다.
그렇게 분에 넘치는 행복을 받는 남자 놈이 언제까지고 치마폭 안에서 꿀 빨고 있을 순 없다.
예빈의 자선활동을 보며 확실하게 다짐하건대 모두를 책임질 수 있을 만한.
누가 봐도 ‘저 새낀 뭔데 저렇게 많이 데리고 다니지?’라는 뒷소리를 듣지 않을 만한.
존나게 멋진 놈이 되어야 한다는 것.
“검사하러 오신 거 맞죠? 마침 기기 정비도 끝내 놨어요.”
“네, 부탁합니다.”
시우는 예빈이 준비해온 보드 위에 의수로 갈아 끼운 이후에도 감각연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왼팔을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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