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0
1.
린네와 도로시는 뇌옥에서 나온 즉시 귀빈으로 모셔졌다.
추후 게헨나에서 쫓겨날 입장이라 한들 일단은 고위계 마녀.
비록 저택부지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지만 손님용 객실 하나를 배정받고 전속 시녀까지 붙어 지내는데 불편함 없도록 배려를 받은 것이다.
“에효….”
그중 요 이틀간 린네의 전속 시녀 역할을 맡게 된 페챠는 한숨을 푹푹 쉬며 홍차 다기 세트가 담긴 트레이를 밀었다.
갈리나 시녀장에게는 귀한 손님이니 잘 대접하라는 말만 들은 페챠.
정치적으로 민감한 인사인 만큼 린네의 정체는 저택 내에서도 불문에 부쳐졌다.
입이 무거워야 하는 건 사용인의 기본 소양 중 소양.
그러나 저택 내 사정에 누구보다 활발하게 떠들고 정보가 오가는 장소 역시 사용인의 입이다.
페챠가 동양 전통 의복을 입은 손님의 정체를 알게 되는 데까진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글쎄, 무려 공적이란다.
공적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확히 알지 못했지만, 가뜩이나 무서운 마녀 중에서도 유달리 무서운 마녀라고 페챠는 기억하고 있다.
‘페챠, 너 이제 큰일 난 거 아니야?’
‘베라, 공적은 사람 목숨 정도는 파리로 본데.’
제비뽑기의 결과를 두고 옆에서 이죽이는 동료 메이드 레나와 마샤.
페챠와 함께 가슴 큰 마녀의 시녀로 배정받아 얼굴이 하얗게 질린 베라.
설마하니 위세 높은 제머나이 백작가의 사용인에게 해코지할까 싶지만 두려운 마음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딸랑딸랑
“손님, 취침 전 차를 내왔습니다.”
“들어와라.”
한차례 종을 울린 페챠는 최대한 몸가짐에 신경 쓰며 트레이를 끌고 들어섰다.
그리고 곧장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만약 방심했더라면 삐에엑 비명을 지르고 말았을 것이다.
객실 내 응접실 한가운데 검을 뽑아든 손님이 무표정하게 서 있었으니 말이다.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은 페챠.
죽는다.
페챠, 향년 20세, 제머나이 저택 손님방에서 아직 사랑을 알지 못한 채 덧없이 지다.
이런 묘비의 문구까지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간다.
“…….”
손님은 무심히 페챠를 살피고 다시 제 손을 살피더니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다행히 단숨에 썰어 죽이려던 참은 아니었나 보다.
“실례했다. 놀라게 해 미안하다.”
“아, 아닙니다.”
프로 메이드로서 자부심을 지닌 페챠는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고 물을 끓이며 간단한 홍차 소개를 시작했다.
“게헨나 최대 차원 ‘디그닝 가든’, 오텀널(Autumnal) 플러시입니다. 발효도가 낮아 신선한 향을 지니는 게 특징이며 스트레이트로 내리면 옅은 샴페인 향을 음미하시기 좋습니다.”
“알겠다.”
그 말을 끝으로 손님은 입을 열지 않았다.
상당히 과묵한 성격인 모양.
-보글보글
-달그락, 달그락
그래도 평소의 루틴대로 차를 우리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 진정된다.
보아하니 딱히 나쁜 마음을 품은 것 같지도 않고, 칼을 보고 놀라는 페챠를 보며 사과도 했다.
어쩌면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손님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첫인상은 너무 무뚝뚝해 보여 무서웠지만, 오딜 오데트 님과 백작님처럼 지독히도 아름답다.
사람의 마음은 단순해서 아름다운 인물에게는 저절로 경계심을 내려놓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달그락!
힐끗힐끗 시선을 돌려 다시 그 단아한 외모를 훔쳐보려던 페챠는 티포트의 덮개를 떨어뜨렸다.
손님의 곧은 시선이 빤히 페챠를 향하고 있던 와중 눈이 마주쳐 버린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얼굴을 힐끔힐끔 엿보는 건 당연히 실례다.
그런 실례를 저지른 것도 모자라 차를 따르는 데 있어 실수까지 저질렀으니 어떻게 될지 모르는 노릇.
“괜찮다. 너도 마셔라.”
“네…?”
“너도 앉아서 마셔라.”
“감사합니닷…!”
하지만 무신경하지만 괘념치 않는다는 관대함을 선보이며 동석까지 제안하는 손님의 모습에 페챠는 감격하며 동시에 반성했다.
역시 주변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이렇게 관대한 마녀님을 누가 나쁜 마녀라고 욕했단 말인가?
그러나 몰래몰래 빼먹기 쉽지 않은 고급 홍차의 향을 합법적으로 음미하던 페챠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불안해졌다.
“…….”
옆에서 엄청 뚫어지라 쳐다본다.
후끈후끈 관심 어린 시선에 볼이 따끔해 질 정도.
불현듯 손님이 차를 베푼 것이 순수한 호의가 아닐 가능성이 떠올랐다.
야심한 시각에 단둘, 상대는 위험하면서도 고귀한 손님, 페챠는 일개 메이드, 마녀의 높은 동성애 비율.
이건 설마하니 마녀의 밤시중 요구?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페챠에게 다가오는 인기척이 그 가설에 확신을 더한다.
턱 하니 페챠의 옆에 자리 잡은 손님은 덜덜 떨리는 페챠의 허리로 손을 옮긴다.
그리고 찬찬히 감상하듯 이곳저곳을 살폈다.
“저, 저, 저기…. 손님…?”
“가만히 있어라.”
허리를 더듬거나 가슴을 가볍게 움켜쥐거나 하는 손길.
페챠는 뱀 앞에선 주머니쥐처럼 꽁꽁 굳은 채 터질 듯한 심장박동을 느껴야만 했다.
눈물이 글썽글썽 맺힌다.
거부하고 싶고, 거부해야 하지만, 거부해도 될지의 여부를 전혀 알 수 없다.
“일어나라.”
“웃….”
거역할 수 없는 위엄 서린 음색에 저도 모르게 기립한 페챠.
한층 대담해진 손님의 손이 페챠의 스커트를 들추는 바람에 속옷까지 훤히 드러나 버렸다.
분명 일면식도 없던 마녀에게 일방적으로 범해지는 상황이다.
그러나 내심 싫지 않다는 야설 속 히로인 식 비정상적인 사고가 흐른다.
마녀의 미모는 이성애자인 페챠마저 순간 매혹할 만큼이나 압도적인 까닭이다.
어머니, 죄송해요.
말괄량이 페챠는 오늘밤 마녀님에 의해 숙녀가 됩니다.
“손님, 최소한 목욕… 먼저….”
그러한 각오로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연 페챠.
“치수가 좋군.”
그러나 손님은 관심을 잃었다는 양 페챠에게 멀어져 도로 자리에 앉았다.
예상밖에 상황에 당황한 페챠에게 손님은 요구했다.
“네가 입고 있는 치수의 의복을 사고 싶다.”
“네?”
“그 하얀 스타킹도.”
“네?”
2.
“이랬다니까?”
늦은 밤 사용인 숙소.
페챠는 룸메이트인 베라에게 자신이 겪은 기이한 일을 털어놓으며 툴툴거렸다.
“그랬어?”
“웃돈을 주길래 팔기는 팔았는데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
“그랬구나?”
하지만 깔깔 웃으며 페챠를 놀려댈 줄 알았던 베라는 반쯤 멍한 목소리로 답한다.
“그래서 네 쪽은 어땠어?”
“정말?”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한 상태인 베라의 코앞에 짝 손뼉을 치는 페챠.
“얘! 베라! 정신 차려! 많이 졸려?”
“응? 응. 응.”
“네 손님은 어땠냐니까?”
“아, 도로시 님?”
질문을 받은 베라는 얼굴을 붉게 붉히며 제 뺨을 쓰다듬었다.
“정말이지…. 다정하고 매력 넘치는 분이었어. 이렇게 멋진 손님은 처음이야.”
“그래? 하아, 부럽다…. 아무튼 너무 늦었네. 잘자 베라.”
“잘자, 페챠.”
그렇게 마지막 대화를 끝내고 침대에 누운 페챠는 금방 코를 작게 골며 잠이 들었다.
그러나 베라는 아직도 몽롱한 꿈속을 거니는 듯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베라를 대해주던 멋진 마녀님과, 또 그 마녀님과 보낸 시간이 머리에서 지워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시종이라니. 정~말 기쁜걸?’
‘그래? 많이 피곤하면 조금만 쉬었다 갈래? 침대도 괜찮아.’
‘편하게 쉬는 방법, 알려줄까?’
‘베라는 아기 같구나. 떼 묻지 않은 순수함이 보여.’
‘허리를 조금만 들어볼래?’
‘후후, 작은 새처럼 우는구나?’
‘얼굴 가리지 말아줘~ 주근깨가 어때서? 나는 그냥 조금 더 널 바라보고 싶은걸.’
‘괜찮아 괜찮아~ 울지 마렴. 몸에 나쁜 기운을 빼는 중이니까 당연한 거야.’
‘옳지, 착한 아이구나?’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질 정도로, 허리가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수 시간이 지난 지금조차 포근함이 남아있을 정도로 시원했던 마사지.
“하아….”
정말이지 황홀한 밤이었다.
3.
결국 누구의 승자도 없이 끝나버린 요리 대회.
엘로아는 홀로 방에 틀어박혀 자작을 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딱히 시우를 원망하거나, 헛수고했다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도로시가 언급한 대로 애초에 시우가 판정을 내려주리라 여겼던 게 오산이었는지도 모른다.
엘로아와 린네의 다툼 속에 멋대로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는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엘로아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 이후 린네와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어쩐지 다음 시합의 주제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전을 향하는 기사가 갑옷을 입는 것처럼 그녀의 필살 예장, 바니걸 복장을 챙겨입은 엘로아.
검은 스타킹에 발목이 위태로운 하이힐까지 완비했다.
“역시 부끄럽군….”
거울을 바라보자 언제봐도 주책 맞은 차림새의 자신이 보인다.
누군가 나잇값 못하고 경망 떤다고 말한다면 말대꾸도 못한 채 엉엉 울어버리고 말 것이다.
“…….”
하지만 바니걸 의상은 이미 몇 차례나 사용한 상태.
엘로아의 노력과는 별개로 ‘신선함’ 자체는 현저히 부족하다.
저번 수확제 때 처음 입었으니, 작년 이맘때쯤부터 우려먹은 복장이 아닌가?
‘남자는 말이지. 쉽게 질리는 동물이야.’
어젯밤 도로시도 변화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파격적인 노출의 기존 바니걸 복장이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산쯤으로 보인다.
엘로아에겐 이미 ‘새로운 바니걸 복장’이 손에 있다.
시우가 토끼 의상을 좋아하는 걸 확인했기에 일전에 남몰래 구매해 두었다.
막상 실물을 받아본 뒤에는 감히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옷장에 처박아 두었지만 말이다.
도로시의 충고대로 더는 숨지도 도망치지도 않겠다 다짐한 엘로아는 기존 바니걸 의상을 벗고, 새로운 비장의 의상으로 갈아입었다.
“읏….”
착장을 완료하고 거울을 보니 숨이 턱 막혔다.
거울을 보는 것조차 부끄러운, ‘옷’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음란한 의상.
하지만 참고 이겨내야 한다.
린네도 엘로아와 같은 생각이라면, 분명 비장의 무기를 준비해 올 테니까.
침대 시트를 망토 삼아 수도녀처럼 몸을 감싼 엘로아는 시우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각은 자정.
그 앞에는 예상했던 대로 그의 방문 앞에 막 도착한 인물이 있다.
평소 입던 기모노 대신 웬 메이드 복장을 한 린네다.
“…….”
“…….”
경쟁자를 바라보는 눈빛과 탐색의 시선으로 서로를 훑던 두 사람은 문고리를 비틀어 열었다.
결전의 때가 왔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