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7
1.
“그럴 리 없네.”
도로시의 진단을 들은 엘로아는 선을 긋듯 말했다.
술에 취해 청승을 떨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반듯한 무인의 기세가 방 안에 휘몰아친다.
엘로아는 고결한 성격이었다.
또한 선대와 수아 선생의 영향으로 정숙한 남녀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엘로아에게 성욕이란 터부시 되는 요소.
“그럴 리 없네.”
갑자기 ‘당신은 듀얼자궁 토끼만큼이나 성욕이 왕성하고, 욕구불만에 차면 관음 페티시가 발생하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듣는다 하여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네….”
그러나 연거푸 부정하는 엘로아의 말끝에 갑작스레 힘이 빠진다.
현실부정을 무척이나 하고 싶은 본심과는 달리, 그녀의 이성은 도로시의 말을 토대로 과거의 일을 돌이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도로시의 말과 아귀가 딱딱 떨어지는 부분을 발견했다.
시우는 제머나이 저택에서 머물며 많은 연인과 관계를 맺는다.
엘로아가 작정하고 엿보길 마음먹는다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러나 통상 상태 엘로아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러한 도덕관념을 넘어설 정도의 충동에 휩싸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따금 도덕관념을 페티시의 충동이 넘어서는 순간.
그건 언제나 시우와 아주 오랜 시간 못하게 되었을 때였다.
부정하려 해도 모든 상황 증거가 도로시의 발언이 참임을 증빙한 것이다.
“…….”
엘로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갑자기 얼굴에 불이 나는 것 같다.
주신의 힘으로도 밀어낼 수 없는 수치심이었다.
“그럼….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가능한 자주, 듬~뿍해야지. 사실 공작님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한 달에 한 두 번이라고? 도대체 어떻게 참는 거야?”
다시 말하지만, 색상은 타고난 성욕의 그릇이며, 빨간색은 태생적으로 자주 관계를 해줘야 하는 몸이다.
“아니, 애시당초 왜 참는 건데? 공작님이랑 시우는 연인이잖아.”
도로시는 여러모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그의 스승 된 몸이 아니겠는가…? 나에겐 건실한 모범을 보여야 할 의무가 있네.”
“으음~ 거짓말이고, 진짜 이유가 뭔데?”
“…….”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엘로아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부끄럽고, 경망스러워서…이네.”
도로시는 감이 왔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이건 성교육을 잘못 받은 거다.
아주 옛날에 유행하던 케케묵은 성관념이 자리 박혀 있는 거다.
“흐음~”
일이 이 지경까지 되는데 가장 크게 일조한 건 시우가 아닌 티페레트 공작 본인이었다.
성욕이 많다는 사실을 자기부정 수준으로 감춘데다가, 적극 어필 하지도 않는다.
도로시조차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눈치가 은근 없는 시우가 알아차릴 리가 만무.
그의 성격이라면 엘로아와 하고 싶어도 ‘오늘은 딱히 말이 없으시네? 별로 안 내키시는가 보다’하고 넘어갈 테고.
그 주기가 엘로아가 참다 참다 못 참을 때마다이니 자연스레 ‘스승님은 성욕이 별로 없으시네’라고 판단할 법하다.
“공작님,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전~혀 부끄러운 게 아니야. 듣자하니 토끼 흉내도 냈다면서? 그건 부끄러워서 어떻게 했어?”
“그 입 다물게!”
그야말로 포식자에게 들킨 토끼처럼 화들짝 놀란 엘로아가 허겁지겁 도로시의 입을 막으려 든다.
“그때는! 분위기를 타서 그런 것일세! 또 시우가 기뻐하니 해주었을 뿐! 난 그렇게 음탕한 여자가 아니네! 그 테스트도 분명 조작된 것일 테지!”
도로시는 격렬히 날뛰는 엘로아의 손목을 잡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교태 어린 목소리로 달싹인다.
“그래에에? 토끼 흉내를 어떻게 냈길래 음탕하다는 말이 나올까아? 나는 그냥 토끼 흉내 냈다는 말밖에 못 들었는데.”
“그, 그만하게!”
능숙한 유도심문에 넘어가버린 엘로아가 질겁하고.
“그리고 테스트가 조작됐다기엔…. 지금 공작님 상태가 어떤지 알아? 내 눈에는 보여. 아주아주 원하고 있지? 기분 좋은 거 하고 싶은 거지?”
이 틈을 타 사리사욕을 채우는 도로시.
엘로아의 몸을 뱀처럼 휘감으며 귓불을 깨물거나 귀에 뜨거운 한숨을 불어넣는다.
“뭐, 뭐, 뭐하는 짓인가…?”
그때마다 엘로아의 몸이 뻣뻣이 굳으며 소름이 돋는 모습이 보였다.
티페레트 공작의 약한 모습을 보며 잔뜩 신체접촉도 할 수 있다니 이번 상담료로는 후한 값이다.
“공작님, 이렇게 된 거 나랑 조금만 놀지 않을래?”
“노, 논다니…. 그게 무슨 의미인가?”
“에이~ 알잖아? 어른의 장난. 여자랑 놀아본 적은 있어?”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하던 엘로아는 화들짝 놀랐다.
어느새 옷 뒤를 파고든 도로시의 손이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어냈다.
도대체 언제 했는지도 모를, 시우보다도 능숙한 테크닉.
엘로아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도로시는 휘몰아친다.
“공작님은 괴롭혀지는 쪽이 취향이지?”
“다, 당장 내 옷 안에서 손 빼게…!”
“역시 그렇구나? 잘됐네~ 나 괴롭히는 쪽이라면 아주 능숙해.”
“그럴 순 없네…. 내, 내게는 시우가…. 하읏…!”
사냥감에 독니를 박는 독사처럼 엘로아의 목덜미를 가볍게 깨무는 도로시.
미약한 통증 위로 매끄럽고 뜨거운 혀가 민달팽이처럼 기어가자 엘로아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너무 고지식하네~ 난 공작님을 도와주려는 거라고? 바람을 피우는 게 아니라 자위한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거기서 내가 살짝만 거드는 거지. 이런 느낌으로.”
이번엔 치맛자락을 휙 걷어낸 도로시의 손이 엘로아의 허벅지 안쪽을 관능적으로 쓰다듬는다.
거미처럼 기어간 손가락이 점차 하얀 팬티로 향할 때마다 엘로아의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으, 으읏…!”
“여기서, 게임을 하나 할까? 공작님은 내가 하는 말만 그대로 따라 하면 되는데.”
허벅지와 몸의 경계.
손가락 하나만 들춰도 비부를 들쑤실 수 있는 곳까지 점령한 도로시가 쐐기를 박았다.
“손가락 넣어주세요, 라고 말해 봐.”
“…자, 장난은 그만….”
“공작님이 보기엔, 내가 지금 장난하는 것 같아?”
아아아아! 공작님 귀여워, 귀여워, 너무너무 귀여워.
도로시는 환희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단언컨대 공작님은 괴롭히는 맛이 최고인 초식 동물계 마녀였다.
사실 이렇게까지 끈적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리액션이 미슐랭 5스타 급으로 맛있어서 저도 모르게 진도를 빼고 말았다.
“나는…. 나는…. 나는….”
고장난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엘로아 공작님을 보며 도로시는 입맛을 다셨다.
아쉽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어도 끝까지 가는 건데.
“자, 알겠어. 장난 끝. 봤지?”
능숙하게 브래지어 후크를 다시 채워주고 엘로아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어준 도로시.
갑작스러운 태세 변환에 눈이 화등잔만 하게 변한 엘로아가 안도 반 어리둥절 반의 시선으로 올려본다.
참고로 눈꼬리에 맺힌 눈물이 애처롭다.
도로시는 미혹을 애써 떨치며 손가락을 척 치켜세웠다.
“성욕은 건전한 방법으로 잘 해결해 줘야 해.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민망한 일도 아니야.”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겐가?”
“공작님 내가 조금~만 더 꼬셨으면 홀라당 넘어와 버렸을걸? 억지로 억눌러두고, 모른 척하니까 요상한 수작질에도 걸려들어 버리는 거잖아. 내일 아침에 알몸으로 한 이불 아래서 발견됐을 수도 있다고~”
“넘어가지 않았을 걸세!”
“단박에 거부하지 못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올바른 방법으로 승화를 못 시키니까 이상~한 길로 빠지는 거야.”
“…….”
궤변이라기엔 꽤나 설득력이 있었기에 저도 모르게 수긍한 엘로아.
확실히 조금 전 시우를 상대로 확실히 고삐를 잡고 섹스하는 점도 그렇고 도로시는 뭔가 능숙해 보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엘로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겠나?”
“좋아, 팁도 많이 받은 것 같으니까. 가장 중요한 건 솔직하게 욕망을 바라보는 거야.”
그렇게 도로시의 첫 강의 ‘욕망에 솔직해지는 법’이 길어져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
린네는 즐라타와 함께 저택의 주방에서 요리 연구에 몰두 중이었다.
린네는 도로시와 마찬가지로 공적 신세.
아무리 두 공작이 합의를 봤다 해도 문의 보수 점검이 끝나는 이상 게헨나에서 쫓겨나야 하는 신세다.
따라서 즐라타는 새벽녘부터 보더 타운으로 향해 린네 대신 필요한 식재료를 사왔다.
모처럼의 맘 편한 휴가 중 불려나온 게 못마땅하긴 했지만 상관없다.
그만큼 넉넉한 자금 지원을 약속받았고 좋아하는 요리에 누군가와 함께 몰두하는 건 제법 즐거운 경험이었으니 말이다.
“좋아, 시식해보자.”
“…….”
린네와 즐라타는 젓가락을 들어 방금 막 조리를 끝낸 요리를 시식했다.
이걸로 벌써 10번 째 재시도이다.
일전의 경험으로부터 얼추 알고는 있었지만, 린네는 요리사의 자질이 탁월했다.
그때는 그저 ‘아, 잘 따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모방’을 완벽하게 하는 사람은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어떤 것 같아?”
“지나치게 익은 감이 있다. 그리고 이 밥은 감칠맛이 조금 전보다 부족하다.”
“그것도 그러네. 불 세기를 조절해볼까?”
“그보다는 조미 방식을 바꿔보겠다.”
그러나 린네와 함께 요리 연구를 거듭하는 와중에 깨달았다.
린네는 즐라타가 감탄할 만한 정도로 섬세한 미각을 지니고 있었다.
아주 미세한 차이도 감지할뿐더러 머릿속에서 맛을 섞는 능력과 발상이 탁월하다.
처음엔 시행착오를 반복하더니 고작 몇 시간 만에 나쁘지 않은 각색을 제안해 오기에 이른 것이다.
그야말로 천부적인 재능.
아직은 절대적인 지식의 양과 경험이 부족한 까닭에 미흡한 모습을 보이지만 조금만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어마 무시한 괴물이 될지도….”
즐라타는 신성의 출현을 감지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3.
약속된 시간이 왔다.
장소는 제머나이 저택의 연회용 주방.
저택을 개방해 파티하거나 큰 만찬을 준비할 때나 사용하는 공간이다.
나란히 마주 선 조리대에 앞치마와 머리 두건을 두른 두 스승님의 시선이 팽팽하게 불을 놓는다.
도로시와 시우는 조리대를 볼 수 있는 장소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다.
시우의 역할은 당연히 심판 도로시는….
“자아~ 재료 손질부터 조리까지의 제한 시간은 3시간. 각기 준비해 온 재료로 최선을 다해 임해주시길 바랍니다.”
국자를 거꾸로 쥐어 마이크 대용으로 든 채 해설자 역할을 수행 중이다.
“도로시 님, 그거 꼭 해야 해요?”
“당연하지. 이렇~게 재밌어 보이는 일에 빠지긴 아쉽잖아.”
시우로선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반쯤 입을 벌리고 도로시의 촌극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두 스승님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소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양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이쪽과 저쪽의 온도 차가 장난 아니다.
“누가누가 현모양처이냐 조리대회, 지금 이곳에서 시작합니다!”
멋대로 이름을 붙여버린 도로시의 호령과 함께 익숙한 듯 유럽형 식도를 꺼내 드는 엘로아와 일식도를 꺼내드는 린네.
두 사람이 각기 준비한 재료 상자를 열며 식극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