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6
1.
도로시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도락가이다.
재밌어 보이는 일이 생기면 기꺼이 머리를 들이밀고, 설령 조금 위험을 감수해야 할지라도 그 한가운데서 대담히 웃는다.
티페레트 공작은 눈이 까다로운 도로시가 보기에도 굉장히 귀여운 미인.
무시무시한 소문에 비해 직접 보면 요령 없어 보이는 사람이다.
이 약점을 이용하면 이런저런 재미난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키스 정도는 괜찮잖아?’
‘안된다네….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에이~ 재미없게 굴 거야? 지금 그런 태도를 보일 처지가 아닌 건 공작님 본인이 가장 잘 알 텐데?’
‘…키, 키스만이라면….’
이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 키스 정도는 해줄지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도로시는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혼란을 틈타 시우의 연인을 탐하고 사리사욕을 챙길 생각은 접어뒀다.
그냥 장난만 좀 친 거지, 독대를 요청한 것도 그저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예전이었으면 눈에 보이기만 해도 줄행랑을 쳐야 했던 유명인사와 진솔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아닌가?
분명히 그랬는데….
-벌컥 벌컥
-탁!
“크흐….”
자리를 옮긴 엘로아는 몇 잔째인지 모를 독한 브랜디를 비워냈다.
어지간한 상황에선 나긋나긋 웃음 짓는 도로시도 잔뜩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런 건지 모르겠네….”
“어, 음….”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아네, 참으로 천박하고 옳지 못한 일이야. 순간의 욕정이 뭐라고, 사랑하는 제자의….”
“공작님, 일단 진정하지 않을래…? 일단 술 그만 먹자, 응?”
“한 잔만 더 마시겠네….”
“그래.... 근데 그 말 10번째인 건 알지?”
도로시가 마주한 상황을 친근한 비유로 표현하자면 대략 이렇다.
절친한 불알친구의 야동 폴더를 보고 ‘야? 넌 뭐 보냐?’하고 열었는데 하드게이야동이 나왔을 때의 당혹감.
그냥 실없는 장난이었는데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리고만 상황.
게다가 멋대로 열어버린 시점에서 강제로 상담 대상이 되고 있다.
“꼴깍 꼴깍!”
“하아….”
돌아가고 싶다.
장난 같은 거 치지 말걸.
사실 은근히 방탕한 보빔 생활을 즐겨온데다가 조카나 다름없는 르뤼에와 한 침대에서 밤을 보낸 적도 있는 도로시가 보기엔 딱히 별일도 아니었다.
좀 엿보면 뭐 닳기라도 하겠는가?
물론 당사자의 동의 없이 엿본 건 잘못이긴 하다만….
그렇게 치면 연인을 줄줄이 데리고 다닌 시우도 딱히 잘한 건 없다.
설령 시우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해도 이런 일에 화를 낼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이 크나큰 죄를 어떻게 씻으면 좋을지, 내가 어찌 이런 실수를…. 아니, 실수라는 말조차 변명에 불과하네. 나는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몇 번이나 되는 죄과를 반복했네….”
“…….”
하지만 엘로아 공작 본인은 정말로 커다란 죄책감을 느끼는 모양.
참다참다 넘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공작님 앞에서 ‘뭐~ 신경 쓰지 않아도 좋지 않아?’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조~금 말해주면 도움이 될지도 몰라.”
“그건….”
“절대로 공작님을 탓하지 않을 테니까 속 시원하게 고해성사하도록 해. 보아하니~ 본인 스스로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잖아?”
스스로의 치부를 뿌리부터 밝혀야 하는 상황.
아무리 거나하게 취해있는 엘로아라고 해도 선뜻 입에 담을 수 없는 주제였다.
하물며 인연이 없다시피 한 도로시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대는….”
“알아알아~ 공적이고, 공작님이랑도 안 친하지.”
“…이제 와서 그대가 공적인 건 문제가 되지 않네.”
“그래그래~ 하지만 원래 이런 문제는 가까운 사람보다는 나 같은 전문가에게 털어놓는 게 좋아. 혼자 속으로 끙끙 앓고 있다간 곪아버릴걸? 이래 봬도 수녀원 출신이거든.”
어떤 비밀이 도사리고 있어도 지탄하지 않겠다는 성직자의 따스함이 엘로아의 약해진 마음을 뒤흔든다.
사실 이제껏 엘로아는 상담할 사람이 없었다.
수아 선생은 말할 것도 없고 가까이 지내는 샤론 양도 아직 어린마녀다.
이런 한심한 고민 따위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한 채 양심과 충동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우연이었네.”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듯 읊조리기 시작한 엘로아의 고해.
도로시는 나름 귀 기울여 모든 것을 들어주었다.
아직 성적인 것에 무지하던 시절 신시우와 행운의 마녀의 관계를 엿보았던 일.
샤론 양과 시우의 관계를 엿보며 자위행위를 했던 일.
또 바로 얼마 전 샤론 양과 시우의 관계를 관음했던 일 마크 투.
찬찬히 듣던 도로시가 꽤 경악할 정도의 에피소드가 술술 흘러나온다.
“이렇게, 된 것이라네….”
“아…아하…. 대충 어떻게 된 건지는 알겠네.”
도로시는 식은땀을 훔치며 상황을 정리했다.
무시무시한 세간의 소문과는 달리, 불과 얼마전까지 엘로아 공작은 성적인 쪽으론 새하얀 백지였다.
남자의 ‘ㄴ’자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소녀였던 것이다.
아무튼.
인간의 페티쉬는 성적 개념이 확립되어 갈 때(주로 사춘기)와 시기를 같이 한다.
그 시기 인간은 눈을 뜨고 처음 본 존재를 어미로 인식하는 새끼오리처럼 처음 인지한 성적 자극에서 페티쉬를 학습한다.
처음으로 느낀 성적인 자극, 흥분, 관심, 충격 혹은 쾌락이 어떤 경험에서 왔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러한 시각에서 미루어 볼 때 공작님의 성에 눈을 뜬 시기는 시우를 향한 마음을 자각하지도 못했을 무렵, 페리윙클과의 섹스를 엿보며 베개로 압박 자위를 했던 것.
그 순간 공작님에게도 성적 기호의 씨앗이 심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공교로운 사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고,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길고 반복적인 충격에 노출되었다.
그 결과 관음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나 하나의 확정적인 성벽이 되었다.
하지만 올곧은 성정 탓에 여태 그것을 꾹꾹 눌러두었고.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억압되었던 욕망이 강한 반동을 형성한 것이다.
라고 도로시는 진단을 끝냈다.
“훌쩍.”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는 엘로아를 보자 차~암 요령 없고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람에게 ‘좋은 게 좋은 거 아냐? 내가 시우랑 하는 거 옆에서 볼래?’ 라고 해봤자 먹혀 들 리가 없지.
“공작님. 내가 진단 좀 해줄까?”
“…진단?”
“음, 성욕을 확인할 수 있는 간단한 마법이야.”
“날 놀리려는 겐가?”
“그럴 리가, 솔직히 내가 보기엔 별거 아닌 것 같은데 공작님은 신경 쓰이는 거잖아? 그럴 바엔 현재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확인하고 앞으로 일을 계획하는 편이 좋지.”
이름하야 ‘성욕 색상 진단법’.
사실 파트너를 꼬시기 위해 도로시가 고안한 술자리 마술 같은 시시한 마법이다.
“내 성욕을 알게 된다면…. 방법이 있는겐가?”
“뭐어~ 전혀 모르는 상태보다야 낫지 않겠어?”
도로시는 눈 밑을 쓰다듬어 술잔에 제 눈물 한 방울을 톡 떨어뜨렸다.
“자, 이 술을 입에 머금었다가 도로 잔에 뱉으면 돼. 침이랑 충분히 섞어서.”
인터넷에 떠도는 수상한 심리테스트를 보는 듯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는 엘로아.
“…알겠네.”
그러나 속병을 앓던 문제를 털어놓는 것으로 어느 정도 마음이 편해진 엘로아다.
더불어 뭔가 비전을 제시해 줄 것 같은 도로시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고 진단에 순순히 응했다.
엘로아가 입에 술을 머금었다가 뱉은 뒤 도로시는 느긋이 진단 결과가 나오길 기다렸다.
“어디보자….”
성욕 색상 진단법은 아주아주 직관적으로 두 가지를 측정해준다.
먼저 색의 농담(濃淡)은 현재의 욕구를 나타낸다.
색의 종류와 관계 없이 농도가 짙을수록 욕구불만인 것이며, 색이 옅을수록 건강하게 해소하고 있다는 것.
한편 색상의 종류는 타고난 성욕의 크기를 나타낸다.
빨주노초파남보를 순으로 빨강에 가까운 만큼 왕성한 성욕의 보유자, 보라색일수록 무성욕자이다.
즉, 빨강에 가까울수록 잦은 관계를 필요로 하고, 또 많이 해줘야 하는 타입이라는 의미다.
“에?”
판독 결과.
예상도 못 한 결과에 도로시는 입을 벌리고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연한 주홍빛을 띠던 술이 새빨갛게 변한다.
“뭔가 잘못됐는가?”
“…….”
잘못됐고 말고.
이 검사에서 빨간색과 보라색은 측정의 한계치, 어디까지나 이론상의 색상이었다.
여태껏 수많은 마녀에게 시험해 봤지만 단 한 번도 빨간색이나 보라색을 본 적은 없다.
욕망에 솔직한 도로시조차도 연두에 가까운 연한 녹색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 농도는 뭐란 말인가?
정열적인 장미를 연상케 하는 붉은빛은 잔의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었다.
설령 도로시가 미약을 마시고 사흘 내내 방치 플레이를 했더라도 이렇게 짙은 농도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음,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결과가 잘못된 것 같아.”
“알겠네. 다시 해보지.”
그러나 두 번째 트라이가 무색하게 결과는 완전히 전과 같았다.
할 말을 잃은 도로시.
“…….”
빨간색으로 보아할 때어딘가 귀엽고 무서운 분홍공작님은 겉보기와 달리 발정기 토끼처럼 성욕이 왕성한 체질이라는의미.
피처럼 새빨간 농도가 되었다는 건 지금 엄청엄청 욕구불만이라는 의미.
“공작님 혹시 시우랑은 얼마나 관계해?”
“보통 달에 한두 번 하네…. 이것도 필요한 질문인가?”
“그럼 마지막으로 한 건?”
“…약 두 달 전일세.”
그밖에도 이것저것을 캐물은 도로시는 놀라운 정보를 여럿 수집해 종합 진단 결과를 내놓았다.
티페레트 공작은 타고난 성욕의 소유자였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사랑하는 연인과 침대에 누워 땀을 흘리며 ‘좋아좋아’, ‘사랑해사랑해’, ‘갈것같아 갈것같아’를 해야 하는 어리광쟁이 타입.
어지간히 정력적인 운동선수조차 감당이 힘들 만큼 몸이 뜨거운 색녀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대나무 같은 성정, 색(色)을 음란한 것으로 여기며 부끄러워하는 마음, 툭하면 실종돼버리는 시우 탓에 공작의 욕구는 전혀 충족되지 못했다.
평소에는 놀라운 정신력으로 그것을 버텨내고 있지만, 이렇듯 어떤 연유로 수개월씩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면 성욕이 그대로 대폭발.
폭발하는 성욕의 분류를 타고 꽉꽉 억누르던 관음 페티쉬도 분출하게 되는 것이다.
“공작님, 들어봐.”
도로시는 자신의 검진 결과를 엘로아에게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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