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0
1.
가벼운 소란 이후 별 탈 없이 게헨나로 돌아온 시우와 엘로아.
입국 절차를 기다리는 와중 시우는 선물 받은 브랜디를 꼭 껴안은 스승님에게 물었다.
“스승님.”
“음?”
“제가 헥센나흐트에 잡혀갔을 때 기묘한 꿈을 꿨습니다.”
“꿈?”
정확히는 로지를 죽이고, 리디아에게 납치되어 그녀의 침대 위에 홀로 남겨졌을 때 꾼 꿈이었다.
호수, 그리고 탑, 달빛 아래 춤추던 소녀까지.
그간 워낙 큰일이 많아서 인상이 흐릿해져 있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문득 궁금해진 것이다.
설명은 들은 엘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언의 꿈이 맞는 것 같군. 드물지는 않지만, 종종 있는 일일세.”
“예언의 꿈이요?”
엘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예언기관에 대해서는 저번에 설명했었나?”
“네, 들었습니다. 호수에 몸을 담그면 미래를 볼 수 있는데 전부 볼 수 있는 건 아니고 허락된 예언만 이해할 수 있다고요.”
“그렇네. 정확한 기준은 나도 모르네만 예언의 꿈은 묵시의 마녀가 ‘이 정보는 반드시 전달되어야 한다’라고 판단했을 때 예언기관을 찾아오라는 암시를 주는 것이네.”
“…그런 게 가능한 건가요?”
예언기관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꿈을 꿨을 당시는 리디아가 시우를 꼭꼭 숨겨두었던 때이다.
그런데 무슨 재주로 헥센나흐트의 공방에 있는 시우의 꿈을 조작할 수 있단 말인가?
“원래부터 그런 존재이네.”
“뭐, 잘 이해는 안 가지만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요.”
대충 택배 도착하기 전에 문자 알림을 보내는 것과 비슷하겠거니 이해한 시우.
그러나 불안하기 짝이 없다.
숨만 쉬어도 트러블에 휘말리는 체질인 시우인 만큼 그 예언이라는 게 마냥 낭보가 아니라는 직감 탓이다.
“반드시 전달되어야 하는 예언은 어떤 종류인가요?”
“너무 염려 말게나.”
표정으로 티가 났는지 스승님은 인자한 미소로 시우를 안심시켜주었다.
“묵시의 마녀의 중요도란, 뭐랄까. 일반적인 기준과는 정말 다르네. 대부분이 이걸 왜 알려주는지 이해할 수 없는 미래를 꿈으로 전하려 들지.”
“예를 들면요?”
“듣기로는 일주일 후 타로타운에서 가장 싸게 살 수 있는 사과 같은 것을 보여준다더군. 항상 그런 것은 아니네만…. 백이면 아흔아홉은 그렇다 보아야지.”
스승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맥이 탁 풀려야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시우에게는 여전히 모종의 찜찜함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이면 좋겠는데요….”
“너무 염려말게나.”
“사실 그게 전부가 아니라, 어쩐지 심상치 않은 말을 했습니다. 저를 보며 ‘거꾸로 매달린 왕에게 저의 경배를’이라고 말했는데….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뭐?”
스승님의 반응은 이전과 달리 격렬했다.
옆을 보자 휘둥그렇게 뜬 눈이 더듬더듬 떨리고 있다.
“묵시의 마녀가 말을 걸었다고?”
시우가 미심쩍어했던 부분은 메시지의 내용 자체.
그러나 스승님은 묵시의 마녀가 말을 했다는 사실에 경악을 표했다.
“그러면 안 되나요?”
“말했다시피 묵시의 마녀는 우리와는 다른 존재일세. 다른 차원의 시각을 지닌 채 살고 있다네.”
“다른 차원이라면…?”
“우리처럼 일반적인 존재는 연속적인 시간 선에 살아가지 않나? 확정된 과거, 진행되는 현재를 거쳐 불확실한 미래로 나아가며 말일세. 허나 묵시의 마녀는 다르다네.
그녀는 수만의 바꿀 수 있던 과거, 수억의 갈림길이 늘어선 현재, 그리고 수조의 결과로 나누어진 미래를 동시에 관측하네.”
그제야 시우는 엘로아가 언급한 ‘다르다’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과거는 떠올리는 것이고, 미래는 상상하는 것이지만 결국 그 둘을 수행하는 것은 현재이다.
즉,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건 현재뿐이며 이것이 시간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이다.
그런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관측 가능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전지한 신의 관측대에 올라선 것과 같다.
묵시의 마녀에겐 자신과 다른 관점을 지닌 인물은 어느 누구건 무의미한 존재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방관자일세. 그 어느 것에도 간섭하지 않고 묵시(默視)하는 철저한 방관자.”
“그런데 저에게는 왜 말을 걸었을까요?”
“…나도 잘 모르겠군. 함께 가보지 않겠나? 월식까지는 일자가 조금 남았으니 우선 수아 선생에게 물어보겠네.”
“네, 일단 저도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대화가 끝나가던 무렵 출입국장이 나타나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티페레트 공작님, 이번엔 게헨나에 얼마나 머물 예정이신가요?”
“하루 정도일 걸세.”
“저런…. 오늘 자정부터 이틀간 문의 점검이 있을 예정인데 괜찮으신가요?”
“이틀씩이나? 드문 일이군.”
“최근 들어 점점 자잘한 오류가 나타나는 터라 대대적인 보수작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공작께서 급한 용무가 있으시다면 시작일을 미뤄 보겠습니다.”
“고맙네, 허나 그렇게까지 배려해 줄 필요는 없다네.”
“큰 은혜를 입은 입장인 걸요.”
출입국장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으나 엘로아는 예상치 못한 이벤트에 내심 들떠 있었다.
밖에서 기다리는 연인에겐 미안하지만, 합법적으로 시우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애처럼 들뜨기나 하다니….”
“네?”
“아무것도 아닐세.”
그러나 들떴던 마음은 곧장 가라앉는다.
이상하게 그와 관련된 일이면 마치 어린아이 같이 변해버린다.
백전노장의 티페레트 공작은 사라지고 철없고 속없던 견습마녀 시절의 엘로아가 나타나 버리는 것이다.
아직 해결해야 할 일도 한가득 이고, 미처 매듭짓지 못한 일도 있는데 그를 독점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자마자 일단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게 그 증거다.
이곳에 발걸음을 향한 건 린네와 도로시를 빼내기 위함이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무슨 꿍꿍이인 줄 알 수 없는 에렐림 공작과 대면해야 한다.
헥센나흐트 측과 은밀히 거래해 시우를 빼돌리려 한 사유에 대해서도 충분한 추궁을 해야 하고 말이다.
물론 물증이 없기에 강하게 책임을 물을 순 없다.
그녀가 정말 시우를 몰래 소유하기 위해 그러한 책략을 짰는지도 미지수다.
애초에 에렐림은 헥센나흐트와 상호불가침 조약을 진행 중이라 털어놓지 않았던가?
어쩌면 헥센나흐트와 게헨나의 정면충돌을 유보하기 위해 나름의 수를 썼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작금의 시기에 티페레트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을 터.
그런 의미에서 린네와 도로시의 해방은 등가의 교섭 재료다.
“곧장 에렐림을 만나고 오겠네. 그대는 내 제머나이 저택에서 대기하고 있게나.”
“제가 같이 가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괜히 그녀의 앞에 그대를 보이고 싶지 않군. 무슨 속셈이었는지는 몰라도 말일세.”
“알겠습니다.”
그렇게 시우는 저택으로, 엘로아는 에렐림 공작에게로 향했다.
2.
“블랑쉬, 그렇게 쉽게 양보해도 괜찮나요?”
티페레트 공작이 돌아간 직후.
에렐림과 한 침대에 누운 코하브 백작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연인의 결정이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쉽게 실책을 인정하고 양보를 결정하다니.
“무슨 의미인가요?”
“티페레트 공작의 무단 행동 탓에 계획이 어그러졌잖아요. 헥센나흐트도 대대적인 반 게헨나 노선을 타기 시작했고, 오히려 그녀에게 정식으로 항의할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렇죠.”
게헨나 대다수의 마녀는 헥센나흐트와의 전면전을 원하지 않는다.
마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마법의 발전이며 공적과 악성향 추방자들이 인간에게 피해를 끼치건 말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까닭이다.
공적은 싫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무릅쓸 정도로 증오하진 않는다.
허나 만약 게헨나에 피해를 끼치려는 낌새가 보이면 응징하리라, 정도라고 할까?
그런 시각에서 미루어 볼 때 신시우의 구출 작전은 악수 중의 악수였다.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 지리멸렬하던 헥센나흐트를 선제타격함으로써 하나로 뭉칠 계기를 제공한 것이니 말이다.
아무리 티페레트 공작이 힘의 균형추 구실을 한다 해도 이러한 부분에서 항의한다면 조금 더 나은 협상안을 받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렐림은 너무나도 쉽게 고개 숙여 사과했으며, 티페레트 공작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티페레트의 요구는 사로잡은 두 공적, 헥센나흐트의 배신자를 해방하는 것뿐이에요.”
“그렇긴 하지만….”
“티페레트는 둘로부터 헥센나흐트의 정보를 얻을 수 있겠죠. 또 그 정보는 머지 않아 저희 측에도 공유될 거에요. 손해만 보는 교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
“무엇보다도 저는 티페레트 공작을 신뢰합니다. 그녀는 정의롭고, 올곧은 인물. 겉치레뿐인 협력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훨씬 큰 도움이 될 거에요. 싼값에 대가를 치른 편이죠.”
그렇게 말하는 에렐림의 시선은 코하브가 볼 수 없는 먼 저편에 닿아있는 것 같았다.
“케테르의 견습마녀…. 그러니까 신시우도 이대로 포기하실 건가요?”
에렐림은 대답 대신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는 이번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은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표현임을 알기에 코하브도 순순히 응했다.
“네? 어, 뭐 별생각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이죠. 구태여 덧붙이자면 약간의 연민 정도가 있을까요?”
아마 대부분 마녀가 코하브 백작과 의견을 같이할 것이다.
인간은 마녀와 별개의 종으로 지성이 뛰어나나 열등하며 한계가 명확한 생물이다.
열등이란 단어 자체에 부정적인 주관을 포함한 게 아니라 객관적 사실이 그렇다는 이야기.
“저는 인간이 두렵습니다.”
그렇기에 코하브는 에렐림의 말에 제 귀를 의심했다.
케테르 공작이 없는 지금 게헨나의 정점에 서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그녀가 인간을 두려워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상한 말이네요.”
“그런가요?”
따라서 그것이 실없는 농담 내지는 은유라고 받아들이며 쿡쿡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