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9
1.
시우와 엘로아가 린네를 데려오기까지 짧으면 하루, 길면 이틀의 시간이 비게 되었다.
그 짬을 이용해 서울 가이드 샤론 양의 뒤를 따라 광화문으로 향했던 연인들.
쌍둥이나 르뤼에나 아멜리아나 현세는 별세계나 다름없기에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면세 백화점도 들르고, 엄청엄청 큰 서점에서 책도 바리바리 싸들고 올 수 있었고 말이다.
많고 많은 관광지를 두고 굳이 서점으로 향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현세와 유리된 채 의도적으로 그들만의 문화를 영위하는 게헨나.
그 안에서 가장 유익한 오락거리를 논하자면 단연코 독서라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법 연구에서도 유용한 레퍼런스로 활용되니 마녀에게 책이란 현대인의 스마트폰, 유튜브, 컴퓨터, 테블릿 기타 등등 같은 것.
여행지에 갔다면 그 지역의 책을 구매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특히나 책을 좋아하는 아멜리아는 아예 여행용 캐리어를 하나 더 구매해 그 안에 잔뜩 책을 사왔다.
바리바리 싸들고 온 책을 풀어놓으며 쌍둥이와 르뤼에는 투닥거렸다.
“아 참, 답답하게. 아까부터 이상한 말 하네.”
“맞아, 너가 뭐가 예뻐? 그 남자는 우리가 마음에 들어서 전화번호를 물어본 거라니까?”
“헛소리말거라. 짐의 매력에 빠져서 말을 걸어온 것이고, 너희는 커다란 시리얼 박스에 딸려있는 작은 시리얼이었느니라.”
“에효….”
샤론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그토록 튼튼한 영체가 뼈마디가 쑤셔온다.
오늘 투어 코스는 광화문 광장, 서점, 백화점, 장보기.
어느 정도 고생할 건 짐작하고 감안하고 있었다.
설명해 줄 것도 많을 테고, 잠깐 눈을 돌리면 새로운 관심거리를 향해 달려가는 쌍둥이를 돌보려면 양치기견 급 행동력을 요구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르뤼에가 더해지면 난이도가 두 배로 올라간다는 사실은 정녕 몰랐다.
“뭐? 르뤼에 너 말 다했어?”
“우리가 작은 시리얼이면 너는 컵라면 사면 주는 나무젓가락이야.”
“흐음, 그다지 찰지지 못한 묘사이니라. 젓가락의 존재는 소중하다. 그게 아니라면 뜨거운 라면을 손으로 먹을 셈이느냐?”
“염동으로 먹으면 되는데?”
오늘 내내 저랬다.
시답지도 않은 일로 옆에서 계속 티격태격 티격태격 티격태격.
둘이 있을 땐 저들끼리 싸우는 쌍둥이지만 외부의 적이 나타나면 저렇듯 똘똘 뭉치는 대신 공격성이 증가한다.
도발에 몹시 잘 걸리는 주제에 쉴 새 없이 싸우려 드는 르뤼에 토핑이 들어가자 대환장 파티 완성이었다.
“샤론 언니 어떻게 생각해요?”
“샤론 언니가 봐도 젓가락 쪽이 더 쓸모없죠?”
“녹색 머리, 잘 처신해서 대답하도록 하여라.”
심지어 종국엔 묘하게 논쟁 주제로부터 논점이 벗어나 싸움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또 샤론이 거기에 심판 역할을 해 주어야만 했다.
“으으…. 애들아, 그만 좀 하면 안 될까?”
“샤론 언니 피곤한가보다. 그냥 다수결로 결정할래? 과반수 득표하는 쪽이 맞는 걸로.”
“와, 오데트 너 천재야? 민주적이고 좋네.”
“감히! 누켈라비 왕조의 군주인 짐의 앞에서 감히 민주주의를 논하는가?”
발끈하는 르뤼에.
“요즘 대세는 민주주의래.”
“군주정 고집하던 나라는 다 망했다더라.”
이죽대는 쌍둥이.
그리고 쌍둥이가 살짝 불씨를 놓으면 르뤼에는 메탄하이드레이트 수준으로 활활 타올랐다.
“어리석도다! 그것은 대를 이어가는 도중 어리석은 군주가 옥좌에 앉았기 때문이니라! 허나 짐은 불멸 불사의 존재! 철인의 통치를 영원불멸히 받는 전제정치란 가장 완벽하고도 이상적인 체제이니라!”
르뤼에도 마녀는 마녀다.
팔짱을 끼고 선언하는 그녀의 카리스마는 일반인이라면 압도당할 박력으로 넘실대고 있었다.
이대로 일장 연설을 시작하려는 차 샤론이 적당한 타이밍에 끼어들었다.
그래도 나름 요령이 생겼다고 할까?
“싸우지 말고 밥 먹을 준비하자. 삼겹살도 사왔잖아.”
입에 뭐라도 물려주면 잠깐은 조용해지는 세 쌍둥이다.
“오! 삼겹살! 그건 맛있었도다!”
“츄릅! 좋아요!”
그렇게 샤론이 세쌍둥이의 목줄을 잡는 사이.
아멜리아는 눈치를 살피다가 방 한구석에 책이 한가득 든 캐리어를 잽싸게 옮겨 놓았다.
“…휴우.”
르뤼에가 전쟁사 서적을 고르는 동안.
쌍둥이가 온갖 잡다한 교양서적을 고르는 동안.
그리고 샤론이 잠깐만 한눈을 팔면 사라지는 세 사람을 통제하는 동안.
아멜리아는 한발 떨어져 비장의 무기들을 발견하고 비축했다.
-부우욱!
필로폰을 잔뜩 밀수한 마약 밀매상처럼 캐리어 지퍼를 조심스레 연 아멜리아.
어둑한 틈새로 비닐포장도 뜯지 않은 온갖 서적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구석에 처박혀 있던 책들은 마치 운명처럼 아멜리아에게 얼굴을 비추었다.
처음에 이것들을 발견했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과연 현세라고 해야 할까?
게헨나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는 책을 찾아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자유로운 연애와 대등한 연애가 활성화된 현세에서나 찾을 수 있는 귀하디귀한 책인 것이다.
알로달록한 북커버에 적힌 제목은 다음과 같다.
‘사랑받는 연인이 되는 법’, ‘대화의 기술’, ‘꽃도 가꿔야 예쁘다’, ‘연애 초보를 위한 지침서’ 외 13권.
“이것만 있으면 저도….”
아멜리아는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었다.
마녀가 된 이래 아주 긴 세월 동안 혼자서 지내왔다.
다른 모든 것을 가장자리로 밀어내며 오직 마법만을 추구해왔다.
아멜리아가 밀어낸 삶의 조각 중엔 대인관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결과 타인의 접근을 거부하듯 날이 선 말투, 풍부하지 못한 표정, 인간관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등등.
이런 마이너스한 요소를 잔뜩 지니게 된 것이다.
그건 흡사 체취와 같은 것이라 내려놓고 싶다고 해서 쉽게 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타인에게 벽을 세우고 마는 것이다.
당장 샤론과 르뤼에만봐도 저렇게 쌍둥이와 잘 지내지 않는가?
그에 비하면 아멜리아는 그다지 잘 섞이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시우에게마저 여전히 배려를 받고 있었고 말이다.
이건 그러한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한 비장의 무기이다.
본디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 이룩해야 했을 정보를 이미 겪어 본 작가가 정제하여 개념화한 것.
시우와 조금 더 친밀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라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더하여 아멜리아의 비장의 무기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부우욱!
캐리어 지퍼를 조금 더 열자 가장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다른 책들도 모습을 드러낸다.
‘섹스, 그리고 카마수트라’, ‘쉽게 따라 하는 SM 가이드’, ‘악마는 프라다를 벗는다’, ‘어젯밤 시트를 버려야 했던 이유’ 외 15권.
전자와 달리 꽤 노골적인 요소들로 가득 찬 책이다.
심지어 몇몇 권은 굉장히 외설적인 북커버로 눈을 현혹하기도 했다.
이걸 매대로 가져가 몰래 계산할 때 얼굴에 얼마나 불이 났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아멜리아가 부끄러움을 무릅쓴 이유.
샤론과 다른 연인처럼 시우와 진심으로 눈높이를 맞추기 위함이다.
경험이 부족하다면, 요령이 부족하다면 차곡차곡 쌓은 책을 발판 삼아 그와 눈을 마주치면 될 일!
선인의 지혜가 담겨 있는 이 책들은 아멜리아를 브랜드 뉴 아멜리아로 만들어 줄 것이 분명했다.
아멜리아는 다시 가방을 꾹 닫고 꼼꼼하게 캐리어락의 번호까지 바꿔두었다.
“…이번엔 조금 욕심을 내겠어요.”
이건 어디까지나 사랑의 전쟁.
모처럼의 게임체인저를 발견했는데 공유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당장 샤론도 아멜리아에게 밤에 그렇고 그런 행위를 한다는 걸 숨기지 않았던가?
양심의 가책을 애써 무시하며 책을 숨긴 아멜리아.
“아멜리아 님! 식사 준비 좀 도와주세요!”
“네, 갈게요.”
저녁준비를 하는 샤론을 돕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2.
신시우의 탈출 이후, 헥센나흐트는 연일 열기로 들끓었다.
전쟁시 든든한 전력이 될 22 위계의 대마녀 검의 마녀와 구도의 마녀의 배신.
헥센나흐트를 침공해 온 것도 모자라 외부에 함정을 파놓은 게헨나의 마녀들.
말하자면 냉전 중 선제공격을 당한 셈이다.
게헨나 측에서는 이번 사태가 도시 전체의 의사와 무관하다는 성명문을 내놓았으나 그 밖에 이렇다 할 조처를 하진 않았다.
이러한 대응은 강경파의 목소리에 힘과 명분을 실어주었고, 이해관계로 뭉쳤던 온건파 세력에도 균열을 이끌어내었다.
헥센나흐트는 둥지를 공격받은 성난 말벌 떼처럼 들끓었고 피의 복수에 관한 이야기가 슬금슬금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번 사태의 책임을 물어 솔리두스 상단 이사회는 금화의 마녀 리디아 마그누스의 대표직을 박탈. 그 자리를 ‘양자리의 마녀, 프시케 티가든’에게 위임한다.”
일련의 과정에 솔리두스 상단의 수장 리디아 마그누스가 연관되어있다는 게 밝혀진 이상, 문책을 피할 수 없었다.
물증은 없지만 각종 정황상 리디아가 사리사욕을 위해 게헨나와 접선했다는 의혹에 더해 린네의 배신을 눈치채고 있었음에도 은폐했다는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
리디아는 굴욕에 차 입술을 짓씹었다.
여타 마녀라면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리디아에겐 그간 쌓아놓은 힘과 권력이 있다.
그게 아니었다면 전관예우 운운할 새도 없이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겠지.
그렇다고 분한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냠냠.”
맹렬한 증오의 눈길이 태연하게 초콜릿을 까먹고 있는 프시케에게로 향한다.
애초에 믿어서는 안 되는 상대였다.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연하게 협력 관계를 번복할 줄은 몰랐더라도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적당한 타이밍에 가장 적당한 정보를 지닌 채 급소를 찔러버려 버렸다.
결국 리디아가 열심히 일궈놓은 가장 달콤한 과실을 프시케가 거두어가는 그림이 되었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많은 전투를 치른 것으로 손꼽히는 옛마녀가 온건파라는 울타리에 순순히 머물 것이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작금의 선제공격 탓에 헥센나흐트의 ‘온건파’는 유명무실해졌으니 말이다.
기존 온건파 세력의 공적들 역시 지금 이 순간만큼은 힘 있고 호전적인 리더를 원하게 되었다.
“한 마디 하면 되는 건가?”
이사회 진행자에게 자리를 넘겨받은 프시케는 입가에 초콜릿을 핥으며 강단 위에 섰다.
“먼저, 나 프시케 티가든을 대표로 선출한 높은 안목에 대해 칭찬해줄게. 나는 너희가 원하는 걸 잘 알고 있거든.”
“…….”
“지금까지 너무 지겨웠지?”
아무런 호응도 호의도 없이 쏟아지는 평가의 시선 속에서 프시케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이제 다 같이 세상을 놀라게 해보자. 마녀가 마땅히 누렸어야 했을 영광을 되찾는 거야. 마녀를 다시 위대하게.”
기껏 텐션을 올려보았으나 케케묵은 슬로건에 다소 썰렁한 반응.
프시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자, 모두 일어나. 이 세계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주자. 전쟁놀이 시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