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8
1.
교보문고 광화문 본점의 라노벨 코너.
두 명의 남자는 신간 라이트 노벨을 사기 위해 서점으로 향했다.
책 한 권 정도야 집에서 스마트폰만 두드려도 구매할 수 있는 요즘 세상.
남의 취향에 대한 오지랖과 서브컬처 문화를 향해 쏟아지는 멸시와 혐오는 오프라인 서점을 서성이는 오타쿠를 천연기념물쯤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는 서울 코믹스쯤 되는 행사가 아니라면 ‘동료’를 볼 수 없는 삭막한 세상인 것이다.
긴 앞머리가 눈을 가린 약관의 남자 A는 중얼거렸다.
“확실히, 유녀가 헐벗은 표지의 책을 들고 계산대 점원을 상대하는 건 적잖은 용기를 요구하지. 할인 쿠폰 사용과 포인트 적립까지 하려면 더욱더 말이야.”
“아아, 둘이니까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B는 A의 혼잣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에는 두 사람의 최애작인 라노벨이 들려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브로마이드를 주는데다가 한정판 피규어까지 구매할 수 있는 오프 판촉 행사인데 이 정도밖에 사람이 없다니.”
“사랑보다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는 쓰레기들이 늘어났다는 거 아니겠어? 정말이지 한심한 놈들뿐이야. 내게 신적인 능력을 준다면 이런 세계 따위, 모조리 구축해버릴 텐데.”
여느때처럼 중얼거리던 A는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 B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라면 이런 쓸모없는 혼잣말에도 언제나 적절한 추임새를 넣어주었으니 말이다.
“B군?”
“…….”
그러나 B는 아무런 대답 없이 우뚝 굳은 채로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라노벨이 힘없이 떨어진다.
“뭐야, 불현듯 전생이라도 떠올린 거야?”
또 시시한 장난을 하는 군이라고 생각하며 A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B는 장난이라고는 믿기 힘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청, 엄청, 예쁜 여자야.”
“뭐?”
B의 대답에 A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이봐 B, 이제 와서 현실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우리의 각오와 다짐은 어디로 간 거지?”
“…너도 봐봐.”
“난 보지 않겠다. 이제와서 3차원의 여자에 눈독을 들인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
“야야, 컨셉질 그만하고 진짜 딱 한 번만 봐보라니까?”
“뭔데? 그렇게 예뻐?”
B의 채근에 A는 귀찮은 듯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친구가 말하는 예쁜 여자를 찾을 수가 없다.
“안 보이는데? 어딨어?”
“저기 쌍둥이 안 보여?”
B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으로 자세히 초점을 맞추고서야 B가 그토록 경악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경제 서적 코너를 기웃거리는 묘령의 여인 둘.
그 둘은 문자 그대로 인외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고풍스럽게 컬이 진 흑색의 머리칼, 자수정처럼 요요하게 빛나는 안광.
더군다나 이목구비로 둘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쏙 빼닮은 탓에 신비로운 느낌이 한층 가중된다.
복장 자체는 평범하다.
감색 스커트에 흰색 셔츠, 그리고 검은 가디건.
그러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나오는 우아함은 어쩐지 모르게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춰야 할 것 같은 귀족스러움을 풍긴다.
“미쳤다. 뭐랄까 고귀하게 귀엽다.”
“그렇지? 쌍둥이로 태어나줘서 다행이다. 저런 아름다움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아.”
“아무리 봐도 일반인은 아니지?”
“귀족이나 왕족 그런 거 아닌가? 몇몇 나라에는 아직 있잖아.”
A와 B는 홀린 듯이 둘의 모습을 관찰한다.
둘은 책장을 들추며 무언가 활발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거리가 제법 있기에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제스쳐를 적당히 섞으며 대화를 나누는 쌍둥이에게선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뭔가 토론하고 있어.”
“이미 읽은 책이겠지. 분명 서로 다른 관점에서 고차원적인 논평을 나누는 중일 거야.”
“말 걸어보고 싶다.”
“악수 한 번 할 수 있으면 죽어도 좋아.”
하지만 저토록 귀여운 생김새임에도 섣불리 다가설 수 없었다.
상대는 눈만 마주쳐도 위축이 될 것 같은 미인.
숄처럼 두르고 있는 고귀한 아우라는 ‘사는 세상이 다른 인간’임을 숨 쉬듯 주장하고 있다.
이번 생 3D 여자와의 인연을 포기한 슈퍼겁쟁이들이 다가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 쌍둥이의 사이로 누군가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놀라운 건 그 여자 역시 쌍둥이에 감히 비견될 만큼이나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저 깊은 심해 아래 빛나는 보석처럼 아리따운 군청색 눈동자.
허리까지 드리운 장발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잔잔한 파도처럼 너울거린다.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감상을 품었다.
“여제다…. 여제가 있다.”
“뭔가 무섭다….”
큐트 쁘띠한 느낌이 물씬 나던 쌍둥이 쪽과는 달리 서늘한 눈가와 위엄있게 다물린 입매.
몸매가 슬쩍 드러나는 니트 원피스는 여왕의 드레스로.
머리칼과 대비되는 하얀 머리띠는 왕관으로 착각하게 되는 카리스마.
이는 두 사람이 쥐어짜 낸 ‘말 걸어보자’라는 선택지를 격침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저 여왕님 앞에 선다면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 꽁꽁 얼어붙게 될 것이다.
그녀가 끼어들자 대화의 양상이 뒤바뀌었다.
쌍둥이는 편을 먹어 여왕에게 맞서고, 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한층 더 격렬해지는 토론.
“저건 뭔 상황이지?”
“일단 일행인 것 같고, 입 모양을 통해 추측하자면…. 대충 행태경제학의 한계에 대해 설파하고 있는 것 같아.”
“그 의견에 나도 동의하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다시 등장한 초특급미녀.
좀처럼 어울리기 힘든 밝은 녹발에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민트색 눈동자.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그녀는 대립 중이던 쌍둥이와 여왕님 사이에 끼어든다.
“엘프…?”
“요정이다.”
“어이어이, 저런 복장은 반칙 아니냐고.”
“침착해 B, 저건 아주 평범한 코디다. 비범한 건 몸매 쪽이야.”
그녀의 코디는 둥근 엉덩이와 골반, 그리고 각선미가 드러나는 레깅스.
아슬아슬하게 Y 존을 가리는 오버핏 후드집업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것도 모자라 헐렁한 후드를 한껏 들어 올리며 자기주장을 하는 미드는 저렇게 가냘픈 몸매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이즈였다.
역시나 탁월한 미모지만 지금까지의 미녀들과는 조금 분위기가 다르다.
물론 살짝 드세 보이는 성격임에도 어쩐지 친근하다고 해야 할까?
뭐든 물어보면 나름 성실히 대답해 줄 것 같다 해야 하나?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렇지.”
적어도 경멸의 시선을 보내며 내쫓지는 않을 것 같은 포용력에 다시 용기를 얻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가보자고 친구.”
저런 미녀들과 대화를 해보는 것.
거기엔 목숨을 걸어도 좋을 가치가 있다.
마지막으로 쥐어짜낸 용기.
두 사람은 늘 해오던 대로 피스트 범프를 나누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나아갔다.
“저, 저, 저 저기….”
“네?”
“아, 아, 아, 안녕하세요?”
“네, 어쩐 일로?”
“언니, 우리가 보이나 봐.”
“오르골도 만능은 아니니까.”
확실히 여자끼리 있어서 그런 건가?
말을 걸자마자 경계심 어린 눈동자가 4쌍이 A를 향한다.
알바생과 어머니를 제외한 여성과 대화한 지 어언 10년이 넘어가는 A에겐 숨이 턱 막히는 광경.
체온이 상승하고 심장이 뛴다, 그리고 손에는 땀이 찬다.
곤경에 빠진 친우를 위해 B가 나선다.
사실 선호하는 장르의 특성상 B는 A보다 이런 상황이 익숙했다.
러브코미디라면 지금껏 수천 편을 보지 않았던가?
이런 상황에서는 독특한 사람이라고 인식되는 편이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귀여운 아기고양이를 마주쳤을 때처럼 당신을 따라왔어요.”
그러나 회심의 멘트 이후 싸늘한 정적.
입이 살짝 벌어진 요정 누나와 심드렁한 여왕님 그리고 나란히 고개를 갸웃하는 쌍둥이.
이 과감함에 응원을 보내리라 생각했던 친우마저도 ‘이 새끼 미쳤나?’라는 표정을 짓고 있음을 봤을 때, B는 현실과 가상의 괴리를 체감했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B는 짓눌릴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럼에도 무릎 꿇지 않고 나머지 말을 내뱉었다.
말을 걸어본다는 알기 쉬운 핑계가 아니라 이들을 봤을 때부터 느꼈던 충동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지른 것이다.
“번호…! 받아갈 수 있다면 정말 영광이겠습니다.”
어쩌면 비웃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경멸 어린 시선을 받을지도 모른다.
뒤늦게 어디서 주워들은 말이 떠올랐다.
현실의 여자들은 급이 안 맞는 남자에게 번호를 따이면 ‘내가 그 정도 급으로 보이나?’라며 좌절감에 젖는다고.
“호오, 이것은 픽업이도다.”
“와…. 샤론 언니 말대로다. 현세에서는 정말 이렇게 물어보는구나.”
하지만 뜻밖에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여왕님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제법 낭만적인 멘트였지만, 부탁에는 응해줄 수 없느니라.”
실로 여왕의 카리스마에 걸맞은 말투였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엘프 누나도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었다.
“저희가 다들 남자친구가 있어서요.”
“아… 넵! 당연히 있으시겠죠!”
“죄송해요. 다음에 좋은 인연으로 만났으면 좋겠네요.”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안녕!”
“다음에 또 보자!”
묘한 환대를 받으며 B는 A의 손목을 붙잡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후퇴했다.
사실 저만한 미인들이 남자친구가 없는 게 이상한 일이다.
또 설령 남자친구가 없더래도 자신과 잘 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급이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거절당했음에도 속이 후련한 이 기분은 뭘까?
“너 미쳤냐? 와, 근데 진짜 그걸 물어보네. 보는 내가 다 간 떨렸다.”
실패임에도 불구하고 큰 성공을 거둔 기분.
B는 아직도 두근거림이 남은 심장을 꾹 억누르며 골랐던 라노벨을 다시 책장에 꽂아두었다.
“A, 나 오타쿠 그만둘 것 같다.”
“뭐…. 어떤 느낌인지 나도 알 것 같네.”
“아아, 그래 이 기분은….”
스스로 단정 지었던 한계를 넘어선 기분.
피해오던 문제와 처음으로 직면한 기분.
추악하다고 외면해 왔던 세상에 아무리 정교한 데포르메로도 담아낼 수 없는 아름다운 존재가 있었다.
이걸 깨달은 순간 소년에서 남자로 거듭날 때가 온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따라와 줄 건가, A?”
“물론이지 B.”
“일단 운동이라도 할 생각인데. 같이 할래?”
“아아, 그렇지 않아도 형이 운동 같이하자고 극성이었어.”
두 남자는 소년 시절의 보물을 서점에 놓아둔 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아간다.
이렇듯 마녀의 미모란 인생관마저 바꿔버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