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5
1.
여러 가지 사건으로 다소 뒤로 미뤄진 감이 있다만 교통정리의 시간이 왔다.
오찬을 끝낸 장모님이 먼저 자리를 비운 오피스텔.
시우와 연인들은 거실에 옹기종기 모였다.
다름 아닌 린네와 도로시의 처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생명을 구해준 조수님으로, 애증의 관계로, 동거하던 연인으로, 사제의 관계를 초월한 제자로, 누켈라비 왕국의 국서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아가며 모이게 된 소중한 인연들.
누구 하나 콕 짚을 수 없이 귀중한 시우의 보물이다.
지금까지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용인했고, 순조로운 합의하에 일부다처의 관계를 꾸리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이해해 준 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배려라고 여겼지만.
이번에는 조금 경우가 다르다.
도로시와 린네는 공적인 것이다.
이미 충분히 기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상태에서 둘의 편입을 받아들일지는 순전히 시우의 설득에 달렸다.
또한 경위를 불문하고 마음고생을 안겼던 시우가 뻔뻔한 부탁을 하는 것이기에 시우 혼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채였다.
“조수님이 공적까지 꼬셔온 건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어마무시하네.”
“샤론 언니랑 잘 어울리는 이유가 있었어요…. 색욕의 마왕!”
“나랑 오데트처럼 귀여운 견습마녀를 여친으로 두고 있으면서. 여기서 더 늘린다고?”
“결사반대! 경쟁자가 더 느는 건 싫어요!”
쌍둥이는 나란히 쌍심지를 치켜세우며 반발했다.
마녀 사회의 기득권 중 기득권에 있는 제머나이 백작가의 견습마녀인 만큼 예상대로 공적에 대한 반발심은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다.
“꼬맹이들은 얌전히 있거라. 시우의 구출에 가장 힘쓴 자가 누구인 줄 아느냐? 짐과 짐의 친우인 도로시니라. 도로시는 비록 공적이지만 신의를 아는 마녀이니라.”
르뤼에는 도로시를 변호하며 나섰다.
“이 멍청아! 네 경쟁자도 느는 거라고!”
“짐이 두려워할 성 싶으냐? 병아리만 한 간담을 지니고 있으면서 잘도 짐과 대적할 생각을 했구나.”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짐 역시 친우와 사랑싸움을 벌이는 일이 마음 편할 리 없다. 그러나 도로시가 없었더라면 신시우도 여기 없었을 것이니라. 당사자가 권리를 요구한다면 무슨 낯으로 그걸 내치겠느냐? 원한은 다섯 배로 갚고 은혜는 열 배로 갚는다. 그것이 르뤼에 누켈라비의 신조니라.”
의외로 대인배적인 풍모를 보이는 르뤼에.
물론 시우가 보기엔 팔이 안으로 굽은 것처럼 보이지만….
“갑자기 어른인척하네….”
“중2병 말투 쓰면서….”
쌍둥이는 르뤼에의 말이 그럴싸하다고 느낀 모양인지 인신공격에 들어갈 뿐 곧장 반박하지 못했다.
“검의 마녀는? 그 마녀는 진짜 나쁜 마녀잖아!”
“맞아! 심지어 이번 사태의 원흉이라고!”
“그건 짐이 알 바 아니니라. 알아서 잘 처신 하겠지.”
예상대로 모르는 사람 이야기가 나오자 칼같이 선을 긋는 르뤼에.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오딜이 입을 연다.
“조수님, 혹시 스톡홀롬 신드롬이라고 들어봤어?”
“조수님은 분명 가스라이팅 당하신 거에요. 그게 아니고서야 납치한 공적을 여자친구로 만들겠다는 말을 할 리가 없어!”
“그런 건 아닙니다. 그래도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이렇게 모인 건데….”
그때 엘로아가 슬쩍 시우의 손목을 잡았다.
“시우, 이번에는 나도 할 말이 있네.”
“경청하겠습니다.”
“여기 모인 여인은 나를 포함해 모두 갖은 사건으로 그대와 얽혔던 사람들이네.”
“그렇습니다.”
“그대가 받은 것도 있고, 그대에게 받은 것도 있겠지. 서로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는 관계라는 점에서는 다들 이견이 없을걸세. 그대가 린네와 도로시를 품으려는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닌가?”
“그렇… 습니다.”
“그대는 마녀이고, 따라서 몸담을 사회 역시 마녀 사회이지. 헌데 마녀는 그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성이지 않은가?”
어지간하면 시우를 타박하지 않는 자애로운 스승님이다.
이렇게까지 길게 이야기가 나온다면 뭔가 단단히 잘못했을 때뿐.
“그렇다면 인연이 생길 때마다, 감사함을 느낄 때마다 연인이 늘어나게 되는 게 아닐지 우려되네.”
스승님이 하시는 말씀이 뭔지 짐작이 갔다.
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될 수 있지 않냐는 의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에 대해선 시우는 답을 정해두었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시우의 발언에 충격을 받은 오딜과 오데트 그리고 샤론.
심지어 스승님마저 살짝 눈이 커졌다.
“정말?”
“정말요?”
“진짜?”
르뤼에야 ‘올 테면 와봐라!’라는 스타일이고, 아멜리아는 원체 시우의 결정에 반대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쌍둥이는 정말 큰 감격을 느낀 모양이다.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으니 말이다.
“나, 나는 조수님이 20명쯤 더 받아들이고서야 어장 그물을 거둘 줄 알았어.”
“저, 저는 영원히 그만두지 않을 줄 알았어요.”
“지금까지 마음고생 시켜 드려서 죄송해요. 이번 일을 기점으로 앞으로는 정말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냐! 그 정도로 마음고생은 안 했어!”
“조수님이 무사하기만 하면…. 저흰 크게 상관없긴 했어요.”
쌍둥이가 시우의 개과천선 선언을 듣고 입에 발린 말만 하는 건 아니었다.
물론 연적이 늘어나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조수님을 독점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니 말이다.
처음 샤론 언니가 들어왔을 땐 극렬히 반발했던 쌍둥이지만….
지금은 마음가짐이 조금 달랐다.
투닥투닥하던 샤론 언니와도 우정을 쌓게 되었고, 얼마 전 합류한 르뤼에와도 쿵짝이 잘 맞는다.
언제나 둘이서만 놀던 쌍둥이에게도 나름 친구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남자를 사랑한다는 경쟁자가 늘어나는 건 싫지만.
같은 남자를 사랑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친구가 늘어나는 건 좋다.
이런 복잡오묘한 기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서인지 생각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쌍둥이.
“뭐, 조수님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는 알겠어.”
“저도요. 르뤼에 말도 틀린 건 아니니까요.”
“잘 생각했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린네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또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소상히 털어놓을 차례였다.
아주 긴 이야기가 될 터였다.
2.
4시부터 시작해 해가 어물어물 저물 무렵에야 끝난 대화.
린네와 도로시를 데려오기 위해 스승님과 함께 게헨나에 들리기로 한 시우는 길거리를 거닐며 조금 늦어진 이야기를 꺼냈다.
무거운 얘기이기도 하고 단둘이 되었을 때 조심스레 말을 꺼내게 된 것이다.
“스승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언가?”
“헥센나흐트에서 에아 사달멜리크를 만났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살짝 조마조마한 심정이 있었다.
스승님에게 있어 에아는 같은 하늘을 지고 살아갈 수 없는 원수.
100년의 원한으로 추적하던 원흉이다.
날이 너무 날카롭게 선 나머지 무엇이든 찢어발길 만큼 예리하나, 작은 충격에도 깨져버릴 한 자루의 검.
그 스승님의 첫인상을 저렇게 변모시킬 정도로 원한이 깊었다.
시우는 무표정하게 변한 스승님의 옆얼굴을 보며 나머지 말을 이었다.
“또 정확한 위계는 알 수 없었지만…. 전성기 이상의 힘을 되찾게 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조차 일말의 걱정이 있었다.
다정다감한 스승님이 매섭게 돌변하는 유일한 순간이 물병자리의 마녀와 연관된 일이었으니 말이다.
“역시 그렇군.”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알고 계셨나요?”
“남미 쪽 위치포인트 지부에서 여러 차례 목격담이 들려 왔었다네. 생존은 기정사실이었다네.”
예전처럼 중구난방으로 발산되는 분노가 아니다.
차곡차곡 무겁게 쌓여가는 정련된 증오.
시우는 엘로아의 분홍빛 눈동자에서 그걸 읽었다.
“내 손으로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지.”
짧은 다짐을 읊조리는 스승님을 시우는 등에서 가볍게 안아주었다.
세간에서의 이미지는 고결한 숙청자이자 무신이지만 스승님은 겉보기처럼 강한 사람이 아니다.
감정 표현이 솔직하지 못한 탓에 슬픈 일이 생기면 웅크려 울고, 마음이 아픈 일이 생기더라도 홀로 끙끙대는 서툰 사람.
“그땐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엘로아는 뒤를 쓱 올려보았다.
새파랗게 불타던 눈빛이 조금은 유하게 누그러진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그대와는 언제나 함께이거늘.”
그리고는 시우의 손을 제 뺨에 가져다 대며 쓰다듬어달라는 양 비볐다.
우리 스승님, 역시 귀엽다!
다 같이 있을 때는 엄숙한 스승님의 모습을 보이지만 이렇게 단둘이 되면 한없이 귀여워지는 게 스승님의 매력이다.
특히 이렇게 손에 뺨을 비비며 위를 바라보는 건 키스를 조르는 것.
길거리 한복판이지만 뭐 어떠하랴?
시우가 허리를 살짝 숙이고, 엘로아가 발끝을 살짝 들어 가벼운 키스를 끝냈을 무렵.
“거, 시발 길거리 전세 냈나. 모텔을 가라 모텔을.”
걸쭉한 비아냥이 섞인 남자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시우와 엘로아 두 사람 모두 기감이 극도로 발달한 편이다.
대놓고 들으라는 듯 외치는 목소리를 놓칠 만큼 허술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황당한 시비에 뒤를 돌아보자, 이 날씨에 형광 반팔티를 입은 문신돼지국밥충 하나가 클러치 백을 들고 건들건들 서 있다.
기본적으로 마녀는 경국지색의 미모탓에 이목을 집중시킨다.
따라서 기척을 줄여주는 박영의 부적을 지니고 있지만, 길거리 키스는 아무리 그래도 너무 이목을 끌었던 모양이다.
“하지마~ 오빠~ 왜 그래~ 듣겠어~”
“뭐, 어때 시발. 들으라고 해.”
그 옆에는 말리는 시늉을 하며 웃음기를 띤 여자와 아마도 친구로 보이는 양아치 무리가 네다섯 정도 있다.
유유상종이라니 하나같이 그림으로 그린 듯한 양아치들이다.
가장 먼저 시비를 건 남자가 시우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가래침을 퉤 뱉으며 지껄였다.
“뭘 꼬라봐?”
당장 화가 난다기보다는 ‘정말 이런 식으로 시비가 걸리는구나’ 싶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 와서 길거리 양아치가 무서울 리 없다.
“나?”
확인 차원에서 손가락으로 턱밑을 가리키며 묻는 시우.
엘로아가 슬쩍 시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시우, 그냥 넘어가세.”
“대놓고 시비 거는데요?”
“힘을 지닌 자는 그에 걸맞은 수양을 쌓아야 하는 법이네. 한낱 무뢰배이지 않나?”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마음 같아서는 버릇을 고쳐주고 싶지만, 스승님 의사가 우선이다.
똥 밟은 셈 치고 넘어가려고 뒤를 돌자 한층 더 큰 비웃음이 쏟아졌다.
또한 저들끼리 나누는 저급한 수준의 대화가 귓가를 파고든다.
“쫄아서 튀는 거 봐라.”
“오, 형칠이. 역시 예쁜 여자만 보면 풀발하네.”
“기분 좋은데 꼴 받게 하잖아.”
“여자 머리 색 꼬라지 봐라. 딱 봐도 핑챙이네 핑챙.”
“보지털도 염색했나?”
부러움과 질투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려치기와 성희롱.
그 대상은 당연히 여자 쪽인 스승님을 향해 집중적으로 쏟아진다.
더 참을 이유가 있나?
“스승님, 3분 안에 정리하고 올게요.”
“쎈 척하다가 바로 튀는 건 웃음벨이네. 병신 찌질이 새끼.”
제 욕은 딱히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제자의 욕을 들은 스승님은 흔쾌히 윤허해주셨다.
“너무 크게 다치게 하진 말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