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3
1.
큰 장모님이 제공해주었던 신축 오피스텔은 꽤 넓은 편이다.
소파와 테이블이 놓인 거실 역시 일반 아파트에 비견될 정도로 상당히 넓었다.
그런데 이렇게 가득 다들 옹기종기 모여있으니 추석날 한집에 모인 양 상당히 북적북적하다.
제머나이 일가, 아멜리아, 엘로아, 르뤼에, 시우에 샤론까지 합류해 총 9명이나 되니 말이다.
알비레오는 손뼉을 짝짝 쳐 주의를 집중시키고는 입을 열었다.
“시우 군이 무사히 돌아왔으니 환영회라도 해야죠. 다들 식사는 하셨나요?”
“아직 이라네.”
“잘 됐네요. 언니와 저는 현세에서 처리할 용무가 조금 남아있으니, 다 같이 오찬이라도 어떨까요 시우 군?”
“오찬인가요? 좋죠.”
“그러면, 근처 레스토랑을 예약할게요.”
제법 능숙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드는 데네브를 시우가 만류했다.
레스토랑도 좋지만 이 오피스텔에는 유구한 전통을 지닌 식사법이 있다.
“저, 작은 장모님.”
“네, 시우 군.”
“레스토랑도 좋지만…. 혹시 현세 음식을 잔뜩 시키는 건 어떨까요?”
젊음의 메카답게 온갖 음식점이 산재해있는 신촌.
파인 다이닝도 좋지만 그거야 매일 저녁 제머나이 저택에서도 즐기지 않는가?
어렵게 현세로 나온 만큼 고향 음식도 맛보고, 또 연인들에게도 맛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다.
“배달음식이라…. 그걸로 괜찮겠어요?”
“네네, 대신 이것저것 시킬 예정입니다. 킹크랩도 좀 싸오고요.”
“언니 생각은 어때?”
“시우 군의 환영회니까. 본인이 원한다면 들어줘야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큰 장모님.
“호오, 현세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건가? 실로 기대되는도다.”
“와! 좋아요! 저는 삼겹살 먹고 싶어요! 생굴도 추가해서요.”
“조수님! 나는 전에 먹었던 김치찜이 맛있었어. 생굴도 꼭 추가해줘.”
군침을 싹 다시는 세쌍둥이.
“기, 김치찜…?”
김치찜이라는 말을 듣고 눈빛이 흔들릴 정도로 좋아하는 아멜리아.
“네네, 그럼 지금 시키겠습니다.”
시우는 새삼 자신의 탁월한 선택에 흐뭇해하며 오랜만에 배달 어플을 켜기 위해 스마트 폰을 열었고….
-탁!
재빨리 닫았다.
“…….”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위험했다.
생각해보니 아까 샤론에게 장난을 친답시고 어젯밤 동영상을 켜둔 채 화면을 잠갔던 것.
패턴을 풀자마자 살색의 향연이 펼쳐진 것이다.
“꿀꺽….”
침을 살피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시우 군?”
같지 않다.
게다가 하필이면 가장 걸리면 안 되는 사람에게 걸려버렸다.
“잠깐 나와볼래요?”
알비레오는 흉흉한 살기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시우를 불러냈다.
2.
이제 슬슬 찬 바람이 부는 옥상.
현세에 머물 적 담배를 피우거나 스승님과 함께 수련을 위해 뻔질나게 드나든 장소이다.
한겨울에도 드나든 적이 많은 만큼 새삼 추위를 느낄 정도로 춥지는 않았으나, 시우는 골수가 얼어붙는 것 같은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후우….”
앞장 서 먼저 도착한 알비레오는 입에 담배 한 대를 물었다.
한숨에 쌉싸름한 연기가 섞여 길게 뻗어나온다.
“시우 군, 저도 힘들어요. 더는 이런 문제로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아요. 입에 담기도 남사스럽다고요….”
언제나 화를 내던 장모님이지만 이제는 화를 내기도 지친 수준이 되었나 보다.
맥없이 흘러내리는 타박엔 울음 기마저 섞여 있다.
“시우 군은 인간 남성도 아니고, 여러 철저한 검증으로 훗날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게 확인되었으니 쌍둥이가 몰래 일탈하는 것도 눈 감아왔어요.”
“장모님.”
“연인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려 했죠. 저는 잘 모르지만 사랑하는 사이잖아요. 하지만, 하지만…. 영상을 꼭 찍어야 했나요?”
알비레오에게 쌍둥이는 소중한 견습마녀이다.
핏덩이일 때부터 길러온 딸내미인 것이다.
백번 양보해 관계를 나누는 것까진 이해한다 쳐도, 그것을 영상화해 소장한다는 건 알비레오로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설령 시우가 그걸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을 됨됨이를 지니고 있으며, 억지로 요구하지 않았으리라 걸 믿으면서도 말이다.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인 것이다.
못난 사위로서는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행여나 사소한 실수로나마 유출될 수도 있고, 제삼자에게 보일 수도 있으니.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는가?’라는 타박은 합당한 것이겠지.
“백작님, 정말 오해하실 상황인 것 알지만…. 어제가 처음이었습니다. 쌍둥이의 영상이나 사진은 당연히 없습니다. 앞으로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어요.”
“정말요?”
“사진첩을 보여 드리면 될까요?”
시우의 진솔한 해명에 장모님은 눈을 끔뻑이다 답했다.
“…아니에요, 시우 군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러면 제가 괜히 시우 군을 몰아갔네요. 미안해요.”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하는 장모님.
쌍둥이처럼 요요한 자색 눈동자 끝에는 안도와 더불어 미안함이 묻어나왔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러지 마세요. 충분히 오해하실만한 상황이었는걸요.”
“맞아요, 이런 오해는 시우 군의 평소 행실 문제도 있다고요.”
내심 걱정하던 일이 사라진 것인지 조금 더 쌩쌩해진 장모님.
유약함은 사라지고 자연스레 악역 영애 같은 말투를 되찾은 그녀가 시우의 가슴을 톡톡 두드리며 말한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상당히 마음고생을 시켜 드린 것 같아 죄송스러웠다.
“하아, 첫 만남 때 정도만 성실한 모습이었다면 안심하고 눈을 감았을 텐데….”
씁쓸하게 웃던 알비레오는 시우에게 담배 하나를 건네주었다.
장모와 사위의 정다운 맞담배.
그러고보니 최근 이성을 붙잡은 채 단둘이 나누는 대화는 굉장히 오랜만이지 싶었다.
보통 그녀와 독대할 때는 정강이 보호대는 준비해 갈 극한의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알비레오 님은 이대로 계승하실 예정이신가요?”
“예정대로 3년 안에는 끝내야죠. 이번 현세 행도 마냥 소풍을 나온 건 아니에요. 저희가 계승해도 쌍둥이가 제대로 사업을 이끌어 나갈 수 있게끔 가신들에게 그들이 누구의 종복인지 재확인시키는 절차니까요.”
“…….”
전에도 느꼈지만 알비레오의 계승관은 꽤 확실했다.
극성 딸 바보인 예소드 백작님과는 달리 깔끔하게 낙인을 남겨주겠다는 의지를 줄곧 보여왔다.
시우의 마력 증폭을 이용한 낙인 계승 연구 결과에 대해 단 한 번도 묻지 않은 것이 그 증거다.
그리고 그건 곱씹어보자면 굉장히 씁쓸한 결정이다.
알비레오와 데네브라는 인물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지금 이렇게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고작 3년 뒤에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고, 평범하게 혼날 수도 없다.
그녀는 안락사가 결정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마녀의 본질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딘가 울적해진다.
“후후.”
포근한 웃음소리에 앞을 보자 얌전히 입가를 가린 채 웃고 있는 알비레오가 보인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마세요. 시우 군에게도 좋은 일이잖아요? 이렇게 사사건건 잔소리하는 장모님이 사라지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시우 군은 미워할 수가 없네요. 그러니까 똑 부러진 쌍둥이도 목을 매는 거겠죠.”
“슬픈 게 당연한 일 아닌가요?”
“당연하지 않아요. 세계는 잔혹하고, 그 세계 위에 살아가는 주민은 생각보다도 비정하답니다.”
그녀는 바람에 휘날리던 옆머리를 슬쩍 귀 뒤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시우 군이 오딜과 오데트의 동반자가 되어주세요. 흔들리려거든 붙잡아주고, 힘들어하거든 위로해주는 든든한 동반자요.”
“명심하겠습니다.”
“믿을게요 시우 군.”
-덜컥
그때 뒤따라온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운동성이 좋은 츄리닝 바지에 바람막이 차림의 스승님.
“말씀들 나누고 들어와요.”
알비레오는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자 엘로아가 쭈뼛쭈뼛 시우에게 다가왔다.
“그립군.”
“그러게요. 스승님께 처음 전투를 배우던 곳이 여기였는데요.”
제 딴에는 자연스럽게 난간에 팔을 기대며 스몰톡을 시작한 엘로아지만, 시우가 보기엔 할 말이 엄청 많아 보인다.
“그 햇병아리가 잘도 컸네. 이젠 어엿한 마녀가 되었으니 말일세.”
“훌륭한 스승님을 둔 덕택이 아니겠습니까?”
훌륭한 스승이라….
그렇지 않다.
엘로아는 적잖은 자책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연인간의 사랑을 엿보는 게 얼마나 망측한 일인지 안다.
심지어 그 장면을 보면서 혼자 외로움을 달랬다면, 이미 취향으로 존중받을 수 없는 범죄의 영역이다.
아무리 엘로아라도 쉽사리 시우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진상을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시우의 뒤를 따라온 것은 별개의 문제 때문이었다.
“검의 마녀와 구도의 마녀의 처우에 대해 그대와 논의하고 싶네.”
“아, 스승님이 남겨두신 열쇠는 봤습니다. 허나….”
“근시일 내에 에렐림 공작을 찾아갈 예정일세. 시민권은 무리여도 두 사람이 공적의 신분은 면하도록 협상해 보겠네.”
“정말요?”
“이쪽도 약점을 쥐고 있고, 에렐림 공작은 여전히 내 이름값이 필요하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걸세.”
뛸듯이 기뻐하는 시우의 모습에 엘로아는 담담히 답했다.
물론 시우에게 못된 짓을 했다는 이유로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니다.
엘로아는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다’라는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제가 부탁하고 말씀드리기 뭐하지만…. 괜찮으시겠어요?”
“구도의 마녀라면 몰라도 검의 마녀와 가까이 지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진 않네. 신용하지도, 신뢰하지도 않으니 말일세.”
하지만 간만에 서울로 돌아와 과거의 기억과 마주할 수 있었다.
복수귀가 되어 현세를 배회하던.
자신이 정의라 한 치도 의심치 않던.
복수할 대상이 사라졌다는 소문을 듣고 무너져가던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고 그런 엘로아를 붙잡아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제자의 기억까지도.
“하지만 난 그대를 믿네. 그대의 인품을, 됨됨이를, 선한 본질을 바라보려 노력하는 선량함을 믿네.”
“스승님….”
“대화를 해보겠네. 나는 정작 검의 마녀가 어떤 인물인지 모르니 말일세.”
서울의 재난을 일으켰던 ‘비겁의 마녀, 파올라 소치틀’의 장례식을 끝내고 오는 길.
어쩐지 개운하지만은 않다고 말하는 시우에게 엘로아는 말했다.
세상의 일들은 칼로 잘라낸 듯이 딱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사악하기만 인간도 없고 선하기만 한 인간도 없다고.
그렇게 잘난 듯이 말한 주제에 도리어 엘로아 본인이 실천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무튼 그건 시우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처첩의 화목이 가정의 평화를 이룩한다는 린네의 말에 온전히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기왕이면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스승님 그렇다면 오늘 바로 갈 수 있을까요?”
“오늘 바로? 어려울 건 없네만. 식사는 들고 가도록 하지.”
린네는 시우에게 함께 여행할 것을 부탁해왔다.
다만 린네의 입장 상 현세밖에는 선택지가 없는 형국이다.
이렇게 안전한 호위를 받는 현세 외출이 언제 가능할지 모르는 노릇이니 때마침 잘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