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754화 (754/917)

#754

1.

그렇게 피곤하고 심적으로 고된 하루였지만 샤론에게 숙면은 허락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잠깐 꾸벅 졸기만 해도 꿈속에 시우가 나온다.

행복했던 추억이 가득 깃들었던 신촌 거리와는 정반대로 그에게 모진 말을 쏘아붙이던 자신의 모습이.

그가 손목을 붙잡고 한 번만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던 모습이 눈에 밟힌다.

“흐엉…. 흐어엉….”

그러면 일어나 한참을 울고, 더 울 힘이 남지 않아 쓰러지듯 잠이 들면 다시 시우의 꿈이 거짓말처럼 나타난다.

이걸 다섯 번 정도 반복하고 나서야 샤론은 잠자기를 포기했다.

대신 냉장고에 채워진 맥주로 시간을 달래기로 했다.

왜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실연한 등장인물들은 술을 마시지 않던가?

이 괴로운 밤도 알코올의 힘을 빌린다면, 어쩌면 조금 덜 괴로울지도 모른다.

-치익!

“꼴깍, 꼴깍, 꼴깍….”

그렇게 부엌 아일랜드에 서서 안주도 없이 깡맥주를 들이키는 샤론.

청량한 목 넘김과 코를 콕 찌르는 보리 냄새.

“좀 괜찮...나?”

확실히 답답했던 가슴이 쓸어내려 가는 감각이 뭔가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침대에서 질질 짜며 잠을 설치던 때보단 훨씬 나았다.

그렇게 순식간에 한 캔을 동내고 다음 맥주 캔을 개봉한 샤론.

“훌쩍….”

사실 이 오피스텔에서 마시는 맥주도 사연이 있다.

시우와 영화를 보던 때 가장 애용하던 음료였으니 말이다.

바로 아래 편의점에서 4캔에 만 원짜리 수입 맥주를 사와 팝콘이나 오징어 따위와 함께 즐기는 게 샤론과 시우가 영화를 즐기던 법이었다.

“내가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나….”

차가운 맥주 캔을 서로의 목덜미에 대며 장난을 치거나, 영화에서 건배하는 장면이 나오면 괜히 따라 했던 기억이 순식간에 지나쳐간다.

하염없이 훌쩍이며 어느덧 꺼내두었던 네 캔을 비웠다.

“하나도 도움 안 되잖아….”

하지만 알딸딸한 취기가 올라도 하나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오히려 더욱 생생해진 실연의 통증만이 찌릿찌릿 심장을 찌를 뿐.

“왜 마시는 건데 그럼….”

결국 영화나 드라마 속 ‘이별하면 술을 마신다’는 PPL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린 샤론.

더 이상의 음주는 효용이 없다는 것이다.

울적함에 울적함이 더해져 울트라 울적한 기분이 된 샤론은 벌겋게 부은 눈을 비비며 무용지물로 판명 난 캔맥주를 냉장고에 집어넣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삑삑삑삑삑

-삐비빅!

도어락에 번호를 입력하는 소리가 울린다.

이내 잘못된 번호를 입력했다는 경고음이 들린다.

냉장고를 향해 가려던 샤론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술기운으로 회전이 느려진 사고를 뚫고 오만가지 생각이 맥주 거품처럼 솟는다.

뭐지?

다른 집인데 잘못 눌렀나?

아니면 행정상의 착오가 있어서 원래 이곳에 머물 제머나이 가문과 관련된 사람이 온 건가?

그게 아니라면 시우가 왔을까?

“설마….”

샤론은 애써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슬프고 힘들었지만, 기껏 체념과 포기로 무장한 마음이다.

이 헛된 기대가 물거품처럼 무너져 내렸을 때 절망을 감당할 자신은 아직 없었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다.

이별을 선언하며 마음을 독하게 먹고 그에게 모진 말을 쏟아내었다.

언제나 샤론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던 시우다.

아무리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샤론의 뜻을 존중해 줄 것이라 믿고 그를 밀어냈다.

그러니 적어도 하루 만에 그가 찾아올 리는 없다.

어쩌면 너무 빠른 페이스로 마셨는지도 모른다.

이건 너무 취해서 환청이 들리거나 아직 꿈을 꾸는 중인 거다.

-삑삑삑삑삑

그럼에도 재차 울리는 다이얼 소리에 점점 빠르게 뛰는 심장.

샤론은 숨조차 멈춘 채 현관을 바라보았다.

-덜컥!

“…….”

“아….”

그토록 보고 싶었던, 행복했던 모든 추억의 한자리를 차지했던 사랑하는 연인.

신시우다.

샤론이 기다리는 동안 옥상으로 나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올 때처럼 현관을 열고 그가 들어왔다.

응, 그래.

역시 꿈이야.

계승을 받자 불완전 계승인가 하면, 실험에 실패해 곧장 빚더미에 앉았다.

10년 동안 호문쿨루스를 잡으며 변변한 수익을 올린 적도 없고, 기껏 투자했던 건 모조리 망했다.

언제나 묘하게 운이 나쁘던 샤론이다.

이렇게 형편 좋은 이야기가 다름 아닌 샤론을 위해 펼쳐질 리 없다.

그러나 손에 쥐어진 맥주캔의 차가운 물방울이.

환상이나 꿈이라기에는 너무도 생생한 시우의 모습이.

맹렬히 이것이 현실이라 말한다.

이런 건 너무하다.

엄청 울어서 눈도 퉁퉁 부었을 텐데, 화장도 전혀 안 했고 머리도 엉망진창일 텐데.

옷도 나시에 반바지가 전부인데.

시우에게는 예쁜 모습만 보이고 싶은데.

현실도피처럼 마구마구 떠오르는 잡념 중.

“아, 저기, 샤론…. 이게 내가 열고 들어오려던 게 아니라.”

“왜 온 거야? 우리 끝이라고 했잖아.”

샤론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어차피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시우에게 자신은 짐 덩이일 뿐이고, 옛 추억에 그리워하던 샤론에게 그가 기적처럼 찾아와주었다 한들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샤론은 마지막 용기를 쥐어짜 냈다.

시우와 헤어질 용기를.

이번만 매몰차게 떨쳐낼 수 있다면 정말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려던 시우의 얼굴도 샤론의 차가운 말투에 바싹 굳었다.

“왜 그런 표정 짓는 거야. 내가 나쁜 년인 것 같잖아.”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충격받은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앞뒤 살피지 않고 안기고 싶다.

샤론은 혀를 피가 날 정도로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미안해. 매일 걱정시키고, 그때마다 다른 사람 데려오고.”

“그만! 듣기 싫어. 나도 힘들단 말이야!”

샤론의 손에서 맥없이 미끄러진 맥주 캔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돌아가 줘…. 나 너랑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아.”

마음과는 정반대되는 말을 늘어놔야 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샤론은 참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진 뒤를 돌아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때.

억센 힘과 함께 샤론의 손목이 붙잡힌다.

고작 살이 아주 조금 맞닿았을 뿐인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토록 그립던 그의 온기가 맞닿았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머리끝까지 채워버린 행복에 잠식되어 허우적거릴까 봐 샤론을 일부러 거칠게 손을 잡아 빼었다.

“이거…놔!”

그러나 시우는 놓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단단히 샤론의 손목을 붙잡더니 아예 품으로 끌어당긴다.

“싫어. 못 놔.”

“놓으라고!”

“당장 놔!”

“못 놓는다고!”

k-드라마식 실랑이를 벌이는 두 사람.

그러나 시우가 단단히 붙잡은 손목을 샤론이 풀어낼 수 있을 리 없다.

사실 시우는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가는 타입이 아니다.

샤론이 처음 뾰족하게 응대할 때까지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러나 이제야 확신이 생겼다.

“내가 너랑 1년을 넘게 살았는데 모를 것 같아?”

“...뭐?”

“거짓말하고 있잖아.”

단순히 희망 사항이 아니다.

확신할 수 있다.

샤론은 거짓말을 할 때면 엄지손톱으로 검지를 아플 때까지 꾹꾹 누르는 습관이 있다.

‘돌아가 줘…. 나 너랑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아’라고 샤론이 말하는 순간 보였던 바디 사인을 시우는 포착했다.

즉, 돌아가라는 말도, 너랑 여기에 있고 싶지 않다는 말도 모두 거짓말.

“우리 다시 제대로 이야기해보자. 백번이고 천 번이고 사과할게. 고칠 점이 있다면 고칠게.”

“싫어, 싫단 말이야…. 어차피 내가 아무리 말해봐야….”

“나한테는 샤론, 네가 필요해.”

한점의 흐트러짐도 없는 곧은 시선이 샤론을 찔러온다.

그리고 꼭 듣고 싶던 그의 말이 마음을 파고든다.

네가 필요하다는 말.

무엇보다 듣고 싶던 그 말이.

“욱…. 우욱….”

눈물이 뚝뚝 흘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홀라당 삼킨 것처럼 뜨거워지는 목이 뜨겁다.

그간의 설움과 그리움, 보고픔, 사랑하는 마음, 날마다 샤론을 괴롭히던 열등감과 자괴감.

억지로 꾹꾹 눌러 담아 삼키던 질척한 감정이 단숨에 역류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너는…. 내가 백날천날 말해봐야 또 위험한 짓을 할거고…. 다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데, 나만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어…. 모질이야…!”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엉망진창의 말들이, 울음으로 헝클어진 호흡에 얹혀 중구난방으로 튀어 올랐다.

“툭하면 빚만 만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너한테 기대기만 하고, 위험에 빠진 걸 알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러면서 아멜리아 양이랑 엘로아 공작님을 원망하고 질투나 하고 있어…. 그런 내가 너무 한심하단 말이야….”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고작 이 정도로는 샤론이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전부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우는 샤론이 왜 헤어짐을 입에 담았는지 이해했다.

논리정연하게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다.

마음과 마음을 잇는 빨간 실이 생긴 것처럼 서로를 이해하는 것.

그런 게 연인 아니던가?

“상관없어.”

시우는 샤론의 어깨를 붙잡아 다시는 벗어나지 못하게 속박하듯 끌어안았다.

“너는 이대로 충분해.”

샤론의 얄팍한 허세가 바닥을 보이기까지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눈물의 젖은 눈으로 시우를 바라보며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나…. 다른 사람들처럼 강하지 않아…. 너한테 짐만 될 거야.”

“마녀잖아, 앞으로 나랑 평생 살 텐데. 천천히 하면 돼.”

“돈도 없어. 매일매일 연구비 엄청 들어가고…. 투자도 못 해.”

“내가 벌게. 빚내서 연구하는 것도 아닌데 뭘.”

“별로 예쁘지도 않고, 귀엽지도 않잖아….”

“엄청 예뻐, 귀여워, 머리카락도 요정 같아. 눈도 반짝반짝거리잖아.”

약해진 마음을 붙잡아주는 시우에게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는 샤론.

그리고 평상시라면 절대하지 않을 오글거리는 다짐과 칭찬을 늘어놓는 시우.

그렇다.

이것이 화해의 힘이다.

지금 두 사람은 더없이 진지하게 둘만의 세상에 몰입하고 있었다.

부끄러움을 타는 다람쥐처럼 몸을 바짝 웅크린 채 제 머리칼을 빙빙 꼬는 샤론.

“정말…?”

“당연하지 편의점 알바하던 때도 첫눈에 반했다니까. 요즘도 매번 볼 때마다 반하고 있어.”

“으우우…. 거짓말. 시우는 거짓말쟁이야.”

“아냐, 정말로 귀엽다니까?”

샤론을 긍정해주는 시우의 말 하나하나가 가슴에 환희의 폭죽을 터뜨린다.

엄청 쑥스럽지만 자꾸만 듣고 싶다.

“…샤로니가 그로케 기여워?”

따라서 애교 섞인 콧소리로 몸을 베베 꼬며 시우에게 확인을 받는 샤론은, 그제야 시우의 널따란 어깨 뒤편의 광경을 목격했다.

“…….”

“…….”

“…….”

“…….”

시우가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피사계심도가 얕아지고 모든 포커스가 그를 향했다.

따라서 초점에서 벗어나 흐릿한 배경쯤으로 처리되었던 오딜, 오데트, 아멜리아, 엘로아의 모습을 이제야 발견한 것이었다.

각기 아연한 표정을 짓던 그들은 샤론과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문을 닫고 화해한 두 연인을 위해 자리를 비워주었다고 한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