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1
1.
“하여간 조수님 완전 나빴어.”
“맞아,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말도 없이 홀라당 사라져버리시고.”
“그보다 오데트, 이젠 정말 슬슬 결단의 때가 왔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지! 나갈 때마다 문제에 휘말리시잖아! 아예 탑을 세워서 가둬둬야 한다니까?”
강의실에 앉은 오딜과 오데트는 씩씩대며 분을 삼켰다.
헥센나흐트에서 극적인 탈출을 감행한 조수님.
그런 조수님이 깨어나길 기다리며 오매불망 침대 옆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일어났더니 이게 웬걸?
조수님이 없다!
백번 양보해 새로운 연인을 끌고 온 건 이해한다 치고, 적어도 오딜과 오데트의 모닝 키스까지는 책임져야 하지 않는가?
“하여간, 아무런 공로도 없던 것들이 궁시렁궁시렁 대는 구나.”
그리고 자연스럽게 두 사람 뒤에 앉아있던 르뤼에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쌍둥이의 기를 죽였다.
“…윽.”
“또 시작한다….”
견습마녀에 불과하지만, 말싸움으로는 절대 안 지는 오딜과 오데트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잠잠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탈출극의 일등 공신은 다름 아닌 르뤼에 누켈라비인 것이다.
조수님의 정보를 가져온 것도 그녀이고, 현지에 조력자를 침투할 수 있던 것도 그녀 덕택이다.
게다가 추격대를 상대로 일전을 벌여 탈출의 대미까지 장식했으니, 그 공로는 제아무리 쌍둥이라도 트집 잡기가 불가능했다.
그 결과 조수님의 허벅지 사이라는 명당도 빼앗기지 않았던가?
르뤼에는 마치 연극배우 같은 어조로 제 자랑을 이어나갔다.
참고로 벌써 30번 정도 각기 다른 바리에이션으로 들은 내용이다.
“그날의 그 멋진 모습을 너희도 봤어야 하느니라. 짐이 대노하여 파도를 일으키자 마흔 남짓한 악독한 대도적무리가 겁먹은 개떼마냥 오줌을 질질 흘리며 패주하던, 실로 신화적인 장면이었도다. 더 자세히 말해주랴? 짐의 사역마들의 승전나팔을 불듯 일제히 포효를 터뜨리….”
“뭐래 너도 버려졌잖아.”
“맞아, 조수님은 너랑도 이야기 안 하고 그냥 가셨거든?”
참다 못한 쌍둥이가 꿈틀해보았으나….
르뤼에는 ‘흥!’하고 코웃음을 칠 따름이다.
“연적의 공을 깎아내리기 위해 갖은 트집을 잡는군. 보기 안타깝도다. 하해와 같은 짐의 아량은 간장 종지만 한 견습마녀의 이해력을 아득히 뛰어넘느니라. 어차피 그가 짐의 공로를 알게 된다면 알아서 짐의 치마폭 아래 무릎을 꿇을 것이니 말이다.”
“아, 열 받아.”
“언니, 참아 참아.”
본래대로라면 동서남북으로 도발 커멘드를 난타하는 쌍둥이에 수작에 르뤼에가 휘말리는 게 정석.
그러나 콧대가 올라갈 대로 올라간 르뤼에는 모든 데미지에 면역 상태였으니 무의미한 반항에 불과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초록머리 마녀가 늦도다. 기분이 좋길래 모처럼 강의 첨삭을 해주려 하였거늘.”
“그러게.”
“샤론 언니는 강의에 늦은 적이 없는데.”
조수님이 무사히 돌아왔으니 쌍둥이의 수업 사이클도 정상화되었다.
그런데 수업 예정 30분이 지났음에도 샤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드르륵!
““안녕하세…. 스승님?””
“큰주인장, 오랜만이도다.”
그러나 강의실에 들어선 사람은 샤론 언니가 아니라 큰 스승님.
어찌 된 상황인지 영문을 모를 상황에 스승님이 전해주고 간 말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샤론 언니랑 조수님이랑 헤어졌다고?””
쌍둥이는 입을 쩍 벌린 채 서로의 얼굴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샤론 언니가 조수님과 헤어져?
몇 번을 되새겨도 머리에 쉽게 입력되지 않는 충격적인 소식이다.
솔직히 두 사람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쭉 붙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길 3분.
아무 말도 없이 굳어있는 쌍둥이가 재미없던 건지 르뤼에가 먼저 입을 연다.
턱을 꼿꼿이 치켜든 시그니쳐 자세를 취한 르뤼에.
“뭘 그리들 낭패한 기색으로 있는 것이냐?”
“응?”
“경쟁자가 제 발로 나가 떨어진 것뿐이다.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 아니냐?”
그렇긴하다.
비록 선의의 경쟁을 약속하긴 했으나 쌍둥이와 샤론은 어디까지나 경쟁 관계.
라이벌이 쓸쓸히 퇴장한다면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내심 기뻐야 정상이다.
“…….”
“…….”
근데 이 찝찝한 마음은 뭘까?
“하긴 유독 나약해 보이는 녀석이었도다. 애초에 쟁취할 용기가 없었다면 도전조차 말았어야 하느니라. 아니다. 짐의 위엄을 깨닫고 뒤늦게라도 꼬리를 말았으니 그 현명함은 칭찬해 주어야겠도다.”
하지만 샤론과의 인연이 비교적 짧은 르뤼에에겐 그런 거 없다.
그게 아니라도 상당히 자기중심적인 면이 강한 르뤼에다.
충격에 빠져있던 쌍둥이는 자화자찬을 늘어놓는 르뤼에의 태도에 울컥하는 심정을 느꼈다.
“너가 샤론 언니에 대해 뭘 알아!”
“맞아! 샤론 언니는 그렇게 쉽게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야!”
“호오? 허나 실제로 도망가지 않았느냐? 이미 결과가 증명하고 있도다. 연적의 탈락에 일희일비하다니 사랑 전쟁의 무정함을 모르는 꼬맹이들답구나.”
“…….”
“…….”
실컷 뻐기듯 말하던 르뤼에는 기이한 정적에 눈을 떴다.
그리고 잔뜩 화가 난 쌍둥이의 표정과 마주한다.
“도전적인 시선이도다. 짐과 해볼 셈이냐?”
비록 친해지긴 했다 한들 쌍둥이에겐 갚아야 주어야 할 빚이 있다.
만약 여기서도 간지럼 태우기 같은 같잖은 공격을 시도한다면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쌍둥이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건 고함 따위가 아니었다.
대신 흐느낌에 가까운 떨리는 목소리였다.
“샤론 언니는 도망친 거 아니란 말이야….”
“연적도 맞지만 우리 친구란 말이야….”
“무, 무어냐! 울지마라.”
설마하니 그 당찬 쌍둥이들이 펑펑 우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방울방울 눈물을 쏟는 쌍둥이를 보고 쩔쩔매는 르뤼에.
“다시 돌아올 거야! 샤론 언니가 얼마나 굳센데!”
“넌 아무것도 몰라! 이 힘만 쎈 바보 멍청이야!”
“어, 어, 어…. 지, 짐이 실언을 했다. 사과하겠느니라. 녹색머리 마녀는 겁쟁이 따위가 아닌 것 같도다. 아마 이보전진을 위한 전략적 선택…! 그, 그, 그 뭐냐…. 밀땅 그렇다! 밀땅이다! 딱 봐도 그렇지 않느냐?”
흐아아앙 소리로 합창을 하는 쌍둥이를 두고 발을 동동 구르는 르뤼에였다.
2.
“샤론 양이 이별 선언을요?”
시우가 너무 오래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찾아 나선 아멜리아는 복도에서 마주한 알비레오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들었다.
이별, 이별이라.
사실 일반적인 커플 사이에선 흔하디흔한 이슈이며, 설령 이별했다 한들 헤어짐과 재결합을 반복하는 커플도 존재한다.
그러나 상당히 고전적인 남녀관을 지닌 아멜리아에게 이건 이혼 소식이나 다름없는 큰 충격을 주었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샤론이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건 들으면서도 제대로 믿을 수 없던 것이다.
아멜리아는 곧장 엘로아에게 달려갔다.
린네 그리고 시우와 삼자대면한 이후 엘로아는 우울한 낯빛으로 술병을 끌어안고 있었다.
시우가 어떤 선택을 하건 존중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치긴 했으나, 그게 용인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선을 확실히 가르겠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사랑하는 제자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연인, 이 사이에서 밤새 갈등하고 있었던 것이다.
“엘로아 공작님, 저에요.”
“아멜리아 양, 지금은 혼자 있고 싶다네.”
“중요한 이야기에요.”
“…….”
하지만 아멜리아가 들고 온 소식은 그런 엘로아조차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정도로 어안이 벙벙한 소식이었다.
“샤론 양이.... 어째서….’
차갑게 이별을 고한 것도 모자라 신변정리까지 완료한 듯하다.
감도 잡지 못했던 시우와 달리 두 사람은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의 직감도 직감이지만, 바로 전날 엘로아와 아멜리아 앞에 찾아온 샤론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화내지 않았던가?
‘알려주실 수라도 있었잖아요.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어요…. 저도 돕고 싶었단 말이에요….’
이전까지 가장 우선시되던 목표는 시우를 구하는 일이었다.
동시에 두 사람 모두 샤론의 위계가 그리 높지 않음과 어린 마녀임을 염려했다.
선의에 의한 배려였다 한들 샤론이 그걸 어떻게 느낄지는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이 부족했던 셈이다.
“아마, 그 일 때문이겠죠….”
“영영 가버린 겐가?”
“알비레오 백작의 말로는 가정교사 책무도 관두었다고 들었어요.”
두 사람 사이에 침울한 분위기가 감돈다.
특히 엘로아가 느끼는 수심의 깊이는 그 누구보다 깊었다.
애초에 엘로아가 시우의 연인에 합류한 시점에서 샤론은 이미 그의 애인이었다.
허나 사제의 일선을 넘어 그를 마음에 품게 되었고 샤론을 찾아가 고해성사했다.
그때 화를 내거나 모진 말을 던지기는커녕 엘로아를 끌어안아 주며 함께 울어주었던 샤론.
그뿐이 아니다.
남녀 관계에 대해 잘 모르는 엘로아에게 이것저것을 알려주고, 수확제의 이벤트를 함께 준비해주기도 했다.
술친구를 자처하며 재잘재잘 남에게는 털어놓지 못할 내용의 수다를 떨기도 했다.
언제나 자신의 욕심을 챙기기보다 연인 전체의 관계를 중시했던 샤론이다.
접점이 없던 엘로아와 아멜리아가 가까워질 수 있던 것도, 협의회가 생겨 이런저런 안건을 논의하게 된 것도 샤론이 없었더라면 이뤄지지 못했을 일이다.
그녀는 마치 중화제처럼 주변의 사람을 품어 하나로 모아주는 힘이 있었으니까.
모두가 잘 지낼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실로 면목이 없어…. 샤론 양을 만나야겠군.”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사과하고, 이야기해봐야죠.”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시우가 걸어들어왔다.
누구에게 응원을 받았는지 차인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이글이글한 열정이 빛나는 눈빛이다.
“스승님, 아멜리아 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샤론을 만나러 갈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얘기가 나오던 참이었네.”
“당연히 가야죠. 저희도 사과할 일이 있고요.”
“하지만 저 혼자 가면 또 이상한 일에 휘말릴 게 뻔하니 두 분이 동행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시우가 열고 들어온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뒤따르는 사람은 알비레오.
“오랜만에 현명한 생각이네요. 시우 군은 잠시만 눈을 떼면 어디서 죽거나 죽기 직전까지 가니까요. 저도 동행하겠어요.”
“네? 백작님께서요?”
본의는 아니라는 듯 마땅찮은 기색을 내비치던 알비레오지만, 이대로 샤론을 보내기도 뭔가 찝찝하던 차다.
“쌍둥이들이 꼭 가야 한다고 떼를 써서요. 오랜만에 쌍둥이들 현세도 구경도 시켜줄 겸 다 같이 가죠. 지금 르뤼에 양과 함께 짐 싸고 있어요.”
그렇게 결성된 샤론 구출 파티 인원은 다음과 같았다.
신시우.
다수의 마법을 구사하는 추정 21 위계, 근접전 특화마녀.
아멜리아 메리골드.
입자 계열 23 위계 광역 마법 전문마녀.
엘로아 티페레트.
마찬가지로 무신이라 추앙받는 대마녀전의 결전병기.
르뤼에 누켈라비.
풍압만으로 어지간한 도시를 일소할 거대한 해일과 바다괴수를 다루는 옛 마녀.
알비레오 제머나이, 데네브 제머나이.
흑과 백의 쌍조라 불리며 다채로운 진혼곡을 구사하는 게헨나의 백작.
그리고 귀여움 담당 마스코트 오딜 오데트까지.
어지간한 사고에는 휘말리지 않겠거니 싶은 호화롭고 든든한 멤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