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0
1.
술에 떡이 되었다가 일어난 시우는 타카쇼에게 자신의 죄악을 고해성사했다.
무려 5시간가량이나, 심지어 술병을 입에 문 채 말이다.
“이렇게 됐다….”
“너 진짜 제대로 저질렀구나.”
어찌보면 본의는 아니었더라도 타카쇼도 원죄가 깊다.
그렇기에 아침부터 가게 골목에 난장판을 쳐놓고 주사에 가까운 상담을 늘어놓는 시우의 상담에도 성실히 응해주었다.
뭐, 그런 거 없어도 친구니까 당연히 해주어야 할 일이지만 말이다.
진상을 알게 되었을 때 타카쇼도 꽤 놀랐다.
지금까지 샤론과 시우와 셋이서 다섯 차례 정도 술자리를 가졌고, 그때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닭살커플의 모습을 보였던 두 사람이다.
처음엔 커플 사이에 흔히들 오가는 헤어지네 마네 수준의 다툼인 줄 알고 조금 놀리기도 했다.
근데 이건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였다.
“하긴 너 옛날부터 무지성 반자이 돌격할 때도 그렇고, 홀라당 납치당했을 때도 그렇고. 나만 해도 엄청 걱정했는데 샤론 씨는 오죽 마음 고생하셨겠냐.”
“…그래서 네가 보기엔 어때?”
“내가 보기엔 어떠냐고?”
“그래, 조언 부탁한다.”
상한 시금치처럼 소파에 눌어붙는 시우를 보며 타카쇼는 후읍 숨을 들이마셨다.
“갈!!!!!”
그리고 어마어마한 성량으로 시우를 엄하게 훈계한다.
그것도 모자라 시우를 발로 찼다.
“이 머저리 한나무 새끼! 내 말을 똑똑히 새겨듣도록 하여라!”
“이런 시발! 갑자기 미쳤나!”
“묻겠다! 신시우 하렘을 꾸리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
예전이었더라도 쉽사리 답하지 못했을 문제.
허나 샤론에게 이별을 당하게 된 이후엔 더더욱 쉽사리 답할 수 없는 질문이 타카쇼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시우가 무언가 대답하기 전 타카쇼의 자문자답이 시작되었다.
“정답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다.”
웅장한 배경음과 함께 생전 본 적 없는 안광을 뿜는 타카쇼의 눈빛.
“더욱 많은 여자를 품고, 더욱 많은 사랑을 갈구하는 건 수컷의 본능이다. 우리의 DNA는 더욱 많은 씨를 밭에 뿌리라고 종용한다, 아니 요구한다, 아니 강제한다! 본능을 거스르고 사회적 합의 따위에 안주해 일부일처에 만족하는 남자는 반쯤 거세된 돼지다.”
머리까지 걷어차인 시우지만 타카쇼가 내보이는 압력 앞에서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자의 입장에서 이는 가시밭길과도 같은 일.
자신만을 바라보는 게 아닌 한 남자를 믿고 인생 전부를 투신하는 게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나? 보이지 않는 암투 속에서 자신의 매력을 더욱 뽐내려 노력하는 나날이, 수컷이 암컷을 쟁취하는 노력에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
“그렇다면 하렘에 들어온 연인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라도 뽑아낸 놈이 있다면 그건 뭘까?”
“…….”
“그놈은 돼지보다 더한 쓰레기. 즉, 지금의 신시우 네놈이다.”
정곡을 쿡쿡 찔러대는 타카쇼의 연설에 할 말을 잃은 시우.
타카쇼는 한결 부드러운 중저음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신시우, 나도 너를 이해한다. 4살쯤까진 나도 너와 같았으니까. 사실상 첫 사랑싸움 아니냐? 서툴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감에 진실을 꿰뚫어보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랑싸움이라고?”
시우는 이미 차였다.
이제와서 사랑 싸움 운운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시우는 이해하지 못했다.
“헤어지자는 말, 다툼 중에 하기엔 확실히 최악의 말이야. 만약 샤론 씨가 정말 그럴 마음이 없었다면, 그건 잘못한 일이긴해. 나중에 엉덩이라도 때려줘.”
“너 여태 한 말 들었냐? 나 차였다니까?”
“알지, 알지. 그런데 말이야 신시우. 여자는 거짓말을 정말 잘하는 생물이야.”
타카쇼는 두툼한 손을 싸커킥을 맞고 쓰러진 시우에게 건넸다.
“네가 봐온 샤론 씨는 정말 자신이 ‘몇 번째’인지 걱정하는 사람이었어?”
“…그건….”
“샤론 씨도 첫 연애잖아. 너 못지않게 서투를 수 있다는 생각은 안하냐?”
어딘가 연상 느낌이고, 언제나 믿음직스럽고, 의지 되던 여자친구.
타카쇼가 짚어낸 건 그런 이미지에 가려 시우가 완전히 간과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다녀와 새끼야. 또 차이고 오면 내가 술 살게.”
시우는 타카쇼가 건넨 손을 잡고 일어났다.
취기로 둔하던 머리가 깔끔히 개이는 기분이다.
“고맙다. 이제 좀 정신이 드네. 이 은혜 꼭 갚을 게. 나 좀 가볼 곳이 생겼다.”
“야! 야!”
당장 현세로 나서려는 시우를 붙잡는 타카쇼.
“이번엔 든든한 애인분들이랑 같이 가라. 또 잡혀가지 말고.”
반짝이는 타카쇼의 건치가 오늘따라 믿음직했다.
2.
세상에 온갖 일은 반복되면 익숙해진다지만, 사랑하는 연인의 목숨이 위태로워진 상황에 내성이 생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게헨나에 있던 시우의 연인 중 누가 그러지 않았을까?
퍽하면 잡혀가고, 무모한 짓을 벌이는 시우지만 그가 헥센나흐트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모두가 슬픔에 잠겼다.
심해의 마녀에게 납치되었던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그때는 모두가 일말의 희망을 품고 수색 작업에 참여했다.
심해의 마녀가 위험한 성향의 옛마녀라곤 해도 그녀는 개인이었다.
이 마녀 사회에서 남자 마녀의 존재는 희귀한 것이니 섣불리 손을 대지 않으라는 막연한 낙관이 있었다.
샤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해보자는 심정이었다.
르뤼에로부터 영상편지가 오기 전까진 심신이 피폐해져 가면서도 그 넓은 바다를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경우가 달랐다.
그가 납치당한 곳은 헥센나흐트.
알 수 없는 성향의 개인이 아닌, 악성향의 마녀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그 배후이다.
그가 있는 장소를 알고 있음에도 기도 밖엔 할 게 없는 무력감은 이루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눈물을 쏟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나날을 보내던 때.
샤론은 자신의 마녀복과 완드를 챙겼다.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다.
그건 핑계에 불과하다.
자신도 어엿한 대마녀이다.
시우가 샤론을 위해 목숨을 걸었듯, 샤론도 시우를 위해 목숨을 걸겠노라고 다짐하며 다른 연인을 찾았다.
그들은 연적이기 이전에 친구였으니까.
누구라도 샤론과 같은 마음일 거라고 믿었으니까.
설령 계란으로 바위 치기인 계획일지라도 기꺼이 함께하고 싶었다.
그리고 샤론이 아멜리아와 엘로아의 저택을 찾았을 때.
둘의 저택은 텅텅 비어있었다.
사정을 물어물어 그 두 사람이 샤론에게는 말하지 않은 채 시우를 구하기 위해 현세로 뛰쳐나간 걸 알게 되었다.
샤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방 안에 홀로 틀어박혔다.
‘그럴 수 있지. 우울해하지 말자. 샤론.’
공적의 도시에서 시우를 구출해 오는 게 얼마나 큰 위험을 내포한 건지.
거기에 어떤 결단이 새겨져 있는지.
또 왜 그녀들이 샤론에겐 이 사실을 비밀로 했는지도 이해한다.
‘나 같은 건 가봐야 방해밖에 안 될 텐데.’
아멜리아도, 엘로아 공작님도 모두 23 위계.
그에 비하면 샤론은 대마녀라 해도 20 위계, 자성마법의 특성을 살려 최상급 제물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잠깐 21 위계 정도의 화력을 내는 정도에 불과하다.
이만한 위험도를 지닌 대작전에 끼어들었다간 자칫 도움은커녕 발목이나 잡을 게 분명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서 도움되는 여자친구가 되면 되는 거야.’
알고 있다.
아멜리아 양도 엘로아 공작님도 샤론을 걱정해서 그러한 선택을 한 게 분명하다.
‘…….’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키려 해봐도.
당차게 말해보아도 가슴 속에는 서러움이, 배신감이, 무력함 소용돌이친다.
왜 이야기해주지 않았을까?
말해주는 것 정도라면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위험한 곳으로 가는 거라면 두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친구로서, 사정을 더 설명해주더라도 다녀오겠다는 말 한마디가 어려웠을까?
샤론이 억지로 끼어들려고 할 만큼 무모하다고 생각한 걸까?
무사히 다녀오라는 말 한마디도 듣지 않고 떠나도 될 정도로 두 사람에게 샤론의 존재는 가벼웠던 걸까?
생트집이라는 건 안다.
아멜리아도 엘로아도 샤론을 배려한 것이리라.
앞서 말했듯 자살 특공이나 다름없는 위험한 구조작전이 될 테고, 두 사람이라면 몰라도 샤론은 확실히 위험에 처할 테니까.
그럼에도 밉다.
시우를 돕고 싶은 마음은 똑같은데.
쌍둥이와 달리 어엿한 마녀이면서 도움이 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홀로 남겨졌다.
심지어 논의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원망스럽다.
그리고 샤론을 위해 대신 목숨을 걸어준 그녀들에게 배신감이나 느끼고 있는 자신의 유약함이 가장 한심하다.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구나….’
언젠가 그에게 받기만 하는 연인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에 서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그 어느 때보다 도움이 필요한 시우를 두고 샤론이 하는 건 다른 연인을 원망하는 일밖에 없다.
샤론이 불완전위계를 극복할 수 있던 것도.
현세 떠돌이 생활을 벗어나 게헨나에 올 수 있던 것도.
빚을 변제받고 이렇게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이렇게 잔뜩 친구를 만들 수 있던 것도.
그저 염치없이 시우에게 받기만 한 덕분이다.
그에 비해 아멜리아 양은?
샤론보다도 큰 빚을 진 그녀는 얼마든 자력으로 빚을 변제할 능력이 있었다.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푼돈에 쩔쩔매던 누구와는 다르게 입자 마법에 한해서는 가장 높은 위계를 자랑하는 최고위 마녀다.
그에 비해 엘로아 공작님은?
일신의 강함을 둘째치고 만인의 존경을 받는 공작.
시우가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게 해준 가장 큰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님이다.
또 샤론과는 달리 무진장 귀엽기까지 하다.
그에 비하면 오딜과 오데트는?
지금은 비록 견습마녀일지라도 언젠가 제머나이 백작가를 물려받게 될 두 사람이다.
현재 백작이 지닌 마법을 계승하게 된다면 22 위계에 안착.
당장 샤론이 숨 막혀 죽으려고 하던 빚도 둘의 재력 앞에는 먼지 수준에 불과했다.
그밖에 여러 인물을 떠올리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념과 자기혐오.
결론은 단순했다.
샤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을 볼모로 잡고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왔을 뿐이다.
필요할 때에는 아무것도 못 하면서 여태껏 분에 넘치는 사랑만을 받아왔던 것이다.
눈물이 흘렀다.
숨이 막힐 만큼 괴롭다.
어쩌면 자신은 언제나 말로만 대등한 관계에 서고 싶다고 말해왔던 게 아닐까?
시우가 샤론에게 도움을 받았던 건 아주 잠깐이다.
이미 시우는 재력으로도 무력으로도 샤론을 월등히 앞질렀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연인 중 누구도 샤론보다 모자란 사람이 없다.
혹시 자신은 이미 알고 있던 건 아닐까?
이대로라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대등’ 따위는 불가능할 거라고, 내심 알고 있으면서도 그와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하니까 모른 척 해왔던 건 아닐까?
‘그렇네. 이런 거였구나.’
샤론은 드라마 속 진부한 대사를 떠올렸다.
나만 없으면 더 행복할 수 있어.
단 한 번도 공감한 적도 없고 되레, 신파극이라고 떨떠름해하던 그 여주인공들이 뻔뻔하기만 한 샤론보단 훨씬 진솔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