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9
1.
천방지축 사위와 늦바람이 난 데네브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알비레오는 두통약으로 꼬냑을 선택했다.
액자에 꽂힌 채 비스듬히 기울어진 제머나이 일가 가족사진이 새삼 눈에 밟힌다.
꼬물이나 다름없는 오딜과 오데트를 각기 끌어안은 알비레오와 데네브.
데네브와 똑 닮은 알비레오가 말하긴 뭐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데네브는 마녀의 귀감 자체였다.
이랬던 데네브가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알비레오의 속을 썩일 줄이야.
그것도 계승도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이 비통한 심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선 알코올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던 것이다.
-똑똑
한숨만 푹푹 나오는데 대뜸 손님이라니 내키진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이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려면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들어와요. 어라? 샤론 양?”
“늦은 시각에 갑자기 찾아봬서 실례했어요. 시간 괜찮으실까요?”
“네, 물론이죠.”
알비레오는 눈을 끔뻑였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시각에 불쑥 찾아온 손님의 정체는 샤론.
뭐, 이것까지는 이상할 거 없다.
워커홀릭 알비레오가 잠을 자지 않는 건 1년가량 식객으로 머물던 샤론도 알 테고.
이번 구출 작전에 빠진 샤론으로선 이것저것 궁금한 점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아마도 또 사위와 관련된 문제겠거니 싶었다만….
샤론이 현세풍 외출복 차림에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온 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샤론 양, 어디 가시나요?”
“네, 그 점에 대해 말씀드리러 왔어요.”
“일단 서 있지 말고 편히 앉아요.”
“네, 사양 않고….”
묻고 싶은 점도 많고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도 있었지만 소파에 앉은 샤론에게 잠자코 꼬냑을 따라주었다.
정확히 콕 짚어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주신(酒神)의 위로가 필요한 분위기와 표정이었다.
샤론은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했지만 술잔을 들어 올리지 않은 채 잠깐 머뭇거렸다.
“저, 앞으로 가정교사 업무는 힘들 것 같아요.”
“……?”
상황을 쫓아가지 못하는 알비레오.
그러나 크게 놀란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조곤조곤 물었다.
“샤론 양이 주어진 책임을 함부로 내팽개치지 않는 사람인 건 알아요.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실례가 아니라면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알비레오가 알아온 샤론은 굉장히 성실한 마녀였다.
천문학적인 빚을 졌으면서도 엇나가지 않고 착실하게 돈을 모으려 했고, 가정교사 업무도 전혀 소홀히 하지 않았다.
쌍둥이가 유독 약하던 과목이 원소 계통의 마법이었는데 샤론이 그 직책을 도맡아 준 이후로는 제법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비단 이런 사례가 아니라도 알비레오쯤 관록이 쌓이면 사람 됨됨이 정도는 첫인상에 파악이 가능한 법이다.
그 샤론이 갑자기 사직서를 던지고 떠나려 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
하지만 알비레오의 질문에도 샤론을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 망설이며 바짝 붙여 모은 무릎 끝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더니 캐리어를 뒤적여 하얀 문서 한 장을 꺼내 드는 샤론.
마법을 제외하면 서류와 가장 친한 알비레오는 단박에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전마지 위에 위조 불가능한 간인이 새겨진 두 장의 계약서.
샤론이 계승까지 원소계통 수업을 전담해주는 대가로 알비레오가 돌려준 차용증이었다.
아직도 조금 구닥다리인 감이 있는 게헨나 시청법에 따르면 오직 차용증만을 채무관계 입증자료로 인정한다.
즉, 샤론이 만약 차용증을 불태웠다면 채무이행에 대한 의무가 영구적으로 소멸하는 것이다.
그 위에 적힌 액수가 액수이고, 그녀가 그 빚 때문에 한 고생이 고생인 만큼 받는 즉시 태워버렸으리라 예상했던 차용증을 다시 마주하게 되다니….
알비레오는 자신의 예감이 들어맞았음을 깨달았다.
뭔가 심상치 않다.
“제가 멋대로 중도에 그만두는 거니까…. 이건 다시 돌려 드릴게요. 조금 더 시간을 주신다면 이자까지 확실하게 갚도록 하겠습니다.”
“샤론 양, 그렇게 섭섭하게 말하지 마요. 비록 샤론 양과 제가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이긴 하지만 여태 얼마나 많은 만찬을 함께했게요.”
“…….”
“오딜도 오데트도 샤론 양을 잘 따르고, 저는 기왕이면 이 관계가 오래갔으면 좋겠어요. 피치 못한 사정이 있다면 참작해 줄 테니 말해주지 않을래요?”
어르고 달래는 알비레오의 말에 또다시 한참을 망설이던 샤론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단어 하나하나가 무겁게 뚝뚝 떨어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헤어졌어요.”
“어머….”
알비레오는 탄식을 감추지 못했다.
직감이 가리키고 있음에도 절대 아니리라 여겼던 일이 당사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까닭이다.
“헤어진 처지에 여전히 그 사람 도움을 받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무거운 주제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던 알비레오는 조용히 샤론이 책상 위에 올려놓은 차용증을 가지고 갔다.
“그런 이유라면 알았어요. 더 자세한 건 묻지 않을게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염치 없지만…. 혹시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이번에는 샤론이 조그마한 보석함을 꺼내 들었다.
꽤 묵직한 것이나 안에서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적잖은 보석이 들어있는 듯했다.
샤론이 새삼 사치를 부리는 성격도 아니고, 그녀의 마법 특성을 고려했을 때 아마 연구용으로 사들인 것이겠지.
“빚은 어떻게 해서든 꼭 갚을 테니 이건 시우에게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 정도라면…. 어떻게 전해주면 될까요?”
“제가 줬다는 사실만 모르게 부탁드려요.”
연애 경험은 딱히 없는 알비레오지만 이 이별이 샤론에게 있어 더 없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샤론은 이별 하기 앞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털어내려는 것이다.
“…좋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늦은 시각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떠나려는 샤론을 알비레오가 불러세운다.
“샤론 양.”
“네?”
알비레오는 차용증을 팔락이며 말했다.
“이건 일단 받아두겠어요. 하지만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 다시 돌아오세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에요.”
“그리고 예전에 시우 군에게 내주었던 오피스텔, 갈 곳이 정해질 때까지는 사용해도 좋아요.”
“네?”
“서울로 갈 예정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어차피 놀려두는 방이고 원래 집이라는 건 사람이 살지 않으면 분위기가 칙칙해지거든요. 조금 머물면서 앞으로 계획도 차분히 생각해봐요. 제 연락처는 있을 테니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고요.”
“…네.”
샤론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제 정말 집무실을 떠났다.
무겁고 칙칙하게 가라앉은 공기에 알비레오는 샤론이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 꼬냑을 입에 털어 넣었다.
“어휴, 나도 나이가 들었네….”
실로 바보 같은 짓을 했다.
알비레오는 시우를 둘러싼 연애전쟁 속 오딜과 오데트의 작전참모이자 코치다.
데네브의 급작스러운 배신에도 알비레오의 포지션은 굳건했다.
샤론과 시우의 관계는 돈독하다.
게헨나에 들어서도 연인이 늘어가면서도 변함없었다.
가장 시우 옆에 오래 있던 연인이자, 같은 문화권에서 오랜 생활을 하며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강적.
마녀인 만큼 외모는 단연 보장.
싹싹하고 생활력과 친화력이 좋으며, 누굴 닮았는지 고집불통의 면모가 있는 쌍둥이에 비해 모든 걸 끌어안는 자애로운 성격의 소유자.
그렇기 때문에 알비레오조차 위기감을 느끼고 과거 샤론에게 ‘거리를 둬 달라느니’ 견제를 하거나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샤론의 자진 사퇴는 알비레오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가뜩이나 많은 경쟁자 속에서 쌍둥이가 조금이라도 유리해질 테니 말이다.
알비레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았던 셈이다.
적어도 돌아오면 가정교사로 채용하겠다는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굳이 샤론과 시우가 함께 묵었던 숙소까지 임시로 내주면서 되돌아볼 기회를 줄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러겠어.”
하지만 일견 완고하지만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 같은 샤론의 표정을 보며 차마 냉혹하게 계산기를 두드릴 수 없었다.
“아무튼 신시우가 문제야 신시우가.”
이렇게 다시금 사위를 향한 적의를 재확인한 알비레오였다.
2.
샤론의 출국은 재빨랐다.
인사를 나눌 인원이라 해 봐야 엘로아, 쌍둥이, 아멜리아 정도려나.
오딜 오데트와는 티격태격 다투면서도 곧잘 어울려 지냈다.
처음에는 분통 터지는 일이 많았지만 자세히 보면 귀엽기도 하고,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 자매처럼 친근하게 지내게 되었다.
함께 여행을 간 적도 있고, 아무튼 요상야릇한 사건엔 죄다 쌍둥이가 얽혀있더랬지.
엘로아 공작님과는 좋은 술친구였다.
첫 만남은 오해 탓에 그렇게 좋지 않았지만 엘로아가 샤론에게 눈물을 흘리며 제자를 사랑해버린 스승의 고충을 토로하던 이후.
샤론도 나름 그녀를 돕기 위해 애썼다.
이후로도 격의 없이 지내며 언니 동생 관계를 구축했고 말이다.
아멜리아 역시 서먹서먹하던 관계에서 휴일에 종종 함께 대욕장을 가거나 근처 카페를 가는 등 우정을 쌓아나갔다.
간혹 ‘누가 더 시우에게 화끈한 이벤트를 해주었는가?’ 등의 문제로 다툴 때가 있었어도, 예전 심해의 마녀에게 시우가 잡혀갔을 땐 흉중을 말을 터놓으며 서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친구….”
불완전 계승이라는 멍에와 산더미 같은 빚을 지고 현세로 내쫓겼던 과거에 비하면 과분하리만치 행복한 나날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소연할 곳 하나 없던 생활, 기댈 곳도 의지할 곳도 없던 생활을 벗어나 처음으로 잔뜩 친구를 만들었다.
같은 남자를 사랑하고 선의의 경쟁을 하는 한편, 그러면서도 서로 아껴주는 친구들을.
그런 관계가 싫다고, 밉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시우에게 이별을 선언한 지금에 이르러선 인사를 나누기도 서먹한 관계가 되었다.
아마 앞으로도 쭉 그렇겠지.
-빠아아앙!
주변 공간이 일렁이는 감각과 함께 게헨나의 정경은 씻은 듯 사라지고 경적의 소음이 귓가를 파고든다.
추적추적 비가 내린 나머지 아스팔트 위로 불타오르듯 일렁이는 야경.
그 차가운 열기에 덩달아 형형색색으로 녹아내리는 유리창.
“이젠 다시 혼자네….”
오도카니 서 있던 샤론은 그제야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산도 없이 웅크린 샤론의 등을 차가운 비가 적셨다.
작은 흐느낌 따위는 차 소리에 묻혀버리는 무심하고 외로운 도시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