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8
1.
“하아….”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렇게 좋은 달밤인데도 담배가 유독 쓰다.
아멜리아로부터 대강의 경위는 들었다.
표현을 ‘싸웠다’로 한 거지 샤론이 일방적으로 화를 낸 쪽에 가까웠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시우를 구하기 위해 출동한 게헨나 측 인원은 아멜리아, 엘로아, 르뤼에로 총 셋이다.
이중 르뤼에는 본래 구출조에서 제외될 예정이었으나 도로시가 한발 먼저 정보를 가져오는 바람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그 명단에서 샤론이 쏙 빠졌다는 것이다.
아멜리아와 엘로아의 독단으로 행해진 일이나 시우도 필요했던 조치라고 생각한다.
계승 거의 직후부터 빚을 갚기 위해 현세에서 들꽃처럼 당차게 살아가던 샤론.
때문에 철이 부쩍 일찍 들었다고는 하나 시우와 나이 차가 크게 나지 않을 만큼 ‘어린 마녀’이다.
또한 20 위계의 대마녀임을 고려해도 작전의 난이도를 생각하면 그녀가 끼어들긴 너무 위험한 큰 판이었다.
샤론이 시우를 생각하는 마음이야 아멜리아도 엘로아도 알 수 있었으니 무모한 행동을 막기 위해서라도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이다.
그때는 시우를 무사히 구하는 것만이 지상과제였기에 비정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겠지.
만약 시우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같은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시우가 실종된 이후 마음고생을 하던 샤론인 만큼 그 사건은 대단히 큰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던 두 사람이 자신만 쏙 빼놓은 셈이니,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이 납득하지 못하는 거겠지.
하지만 또 한 번의 위험을 겪으며 조금 더 성장한 시우다.
이런 사태를 수습하는 것 또한 앞으로 걸어갈 길이리라.
마땅히 책임지고, 위로하고, 원망도 듣고 다시 예전처럼 화목한 관계를 이뤄내야지.
예전에도 페리윙클 누님이 충고했었다.
여러 연인을 들이는 게 미안하다면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만큼 모조리 사랑해버리라고.
“좋아, 할 수 있다.”
조심스레 샤론의 공방이 위치한 별채로 들어섰다.
불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발을 옮길 무렵.
-또각 또각
융단에 의해 조금 둔탁해진 구두굽 소리가 바닥을 울린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있는 샤론이 보인다.
“샤론.”
앞으로 해결할 문제는 둘째치고, 반가운 마음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연인을 만나게 됐으니 파병에서 돌아온 군인의 심정이 이럴까 싶다.
하지만 눈물 콧물을 쏟으며 시우를 향해 달려오는 샤론은 없었다.
계단에서 훌쩍 뛰어내려 나비처럼 안기는 샤론도 없었다.
“어, 일어났구나?”
그저 냉담한 목소리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차가운 민트빛 눈동자가 무심히도 시우를 훑는다.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독이 묻은 깃털처럼 등을 간질인다.
샤론은 의미 모를 한숨을 쉬고는 계단을 내려왔다.
그때마다 무거운 캐리어가 덜컹인다.
어두운 층계를 벗어나 달빛의 조명을 받은 샤론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샤론의 인상이 쿨뷰티 고양이상이라는 걸 오랜만에 깨닫는다.
시우와 함께 있을 땐 언제나 헤실헤실 웃는 골든 리트리버였기에 망각하고 있던 사실이다.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 듯 시우와 엇갈리듯 지나치려는 샤론.
상상 이상으로 심각한 분위기에 어정쩡하게 굳어 있던 시우.
“어디 가?”
“응.”
“어디 가는데?”
“그걸 너한테 얘기해야 해?”
샤론은 구질구질하게 구는 전 남친을 대하듯 기어이 시우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고보니 어딜 가길래 저런 큰 캐리어를 들고 가는지.
왜 샤론은 이 야심한 밤에 완전히 외출복 차림인 건지.
패닉으로 얼어붙었던 사고가 머리를 부풀리는 복잡한 열감에 녹아내리며 의혹이 흐른다.
녹아내린 의혹은 다시 차게 얼어붙으며 지금 샤론을 놓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합리적인 직감으로 변한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 샤론의 손목을 붙잡았다.
“미안한데 놔 줄래?”
날카로운 눈꽃에 손이 베여나가는 듯한 반응.
“샤론.”
“놔달라고 부탁했어.”
“샤론, 잠깐 무슨 일인지 이야기라도 하자.”
영문을 모르겠는 게 아니다.
찔리는 게 너무 많아서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여태 마음고생을 시킨 것 하며, 기어이 연인을 추가로 들여온 것 하며.
제삼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혀를 내두를 만큼 못된 짓만 골라 했다.
하물며 여자친구인 샤론의 눈에는 그게 어찌 보였겠는가?
어쩌면 지금껏 ‘이해해 주니까’ 혹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라는 핑계를 대며, 샤론의 상냥함에 무의식적으로 편승하고 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스미자 절로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말로 그녀를 설득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세로 갈 거야.”
“현세 어디로? 이렇게 갑자기? 지금 밖은 너무 위험해.”
“시우야.”
샤론만의 호칭 ‘시우야’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꾹 조였다.
어두컴컴한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를 내던 불안감이 점점 뚜렷한 형체를 띄었으니까.
“너 정말 눈치가 없는 거야? 아니면 눈치 없는 척 하는 거야? 남자친구 행세하면 뭐라도 변할까 봐?”
무표정하던 샤론의 얼굴에 짜증이 서리처럼 서린다.
시우는 실로 한심하게, 변명하듯 샤론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남자 친구 행세가 아니라…. 샤론 네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도 알겠어. 그런데 일단 좀 진정하고 차분하게 대화를 해보자.”
“대화? 좋네. 오래는 안 걸려.”
벌어진 샤론의 입술 사이로 뚝 떨어진 말은….
“우리 헤어지자.”
그 어떤 흉악한 자성마법보다 무서운 이별 선고였다.
2.
뭐라고 열심히 말한 것 같은데.
무슨 말을 꺼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팔랑팔랑 훑어본 전화번호부 두께의 마법식도 곧잘 기억하는 주제에 말이다.
다만 샤론의 말은 하나도 빠짐없이 뇌리에 새겨져 있다.
‘힘들게 돌아왔는데 이런 말 해서 미안해. 나도 내가 너무한 거 알고 있어.’
‘아니야, 지금까지 여러 번 생각해왔어. 고민도 많이 했고. 근데 역시 이게 맞는 것 같아.’
‘너랑 함께 있는 시간은 너무 즐거웠어. 하지만 네가 이렇게 사고 칠 때마다, 매일 가슴 졸일 때마다 그 행복이 다 닳아 없어지는 것 같아. 그래서 그런가? 이젠 너랑 같이 있어도 별로 즐겁지가 않아.’
‘아니, 아니 그만 좀 해. 마지막이라는 말도 하지 마. 이제 진짜 지쳤단 말이야.’
‘이 말은 정말 하기 싫었는데…. 그래서 난 너한테 몇 번짼데?’
‘어차피 넌 내가 없어도 딱히 상관없는 거 아니야?’
‘욕심이지만, 잘 지냈으면 좋겠다. 그동안 고마웠어. 정말로.’
멍하다.
망치 같은 걸로 머리를 여러 대 두들겨 맞고 통증을 제거한다면 대충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
그 욱신거림은 모조리 가슴으로 향했다.
사람이 정말 슬프면 물리적으로 심장이 아플 수 있다는 걸 배웠다.
“…….”
문을 닫고 떠나는 샤론을 붙잡을 수 없었다.
불태울 감정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하얀 재를 남기고 떠나는 샤론을 억지로 막아 세우거나 뒤쫓는다면, 그녀의 마지막 진심조차 진지하게 듣지 않는 걸로 보일까 봐.
그게 남아있는 일말의 기회마저 앗아가게 될까 봐.
차마 움직이지 못했다.
3.
이른 새벽.
굳이 수면을 취할 필요가 없는 마녀일지라도 길거리가 한산해지는 시간이다.
게헨나 유일의 호스트바 로즈 글래스가 1부 영업을 준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흐아아암….”
타카쇼는 기지개를 쭈욱 켜다가 담배 팩의 밑면을 톡톡 쳐올려 필터를 물었다.
타카쇼가 제공한 정보가 의도치 않게 시우를 함정에 휘말리게 하였다.
본의는 아니었다 해도 추천한 주식에 친구가 재산을 몰빵했다 바닥까지 꼴아박은 형국에 마음이 편했을 리가.
그 바람에 아도나이 백작과의 결혼도 미루고 밤잠을 설치던 타카쇼지만 바로 어제 시우가 돌아왔다는 뉴스를 접하고 간만에 단잠을 청한 것이다.
어제 나간 술의 재고를 체크하기 위해 뒷골목으로 나온 타카쇼는 뜻밖의 손님을 마주했다.
“으악! 뭐야 이거!”
“으어어어….”
차곡차곡 쌓아둔 쓰레기봉투를 침대 삼아 뻗어있는 남자가 있다.
지금쯤 연인들과 뜨거운 재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줄 알았던 신시우가 호스트바 뒷골목에서 쓰레기더미와 랑데뷰를 하고 있던 것이다.
“너 여기서 뭐하냐? 쓰레긴 줄 알았네. 으악! 술 냄새 뭐야! 봉투는 왜 다 터뜨려놨어!”
“오, 타카쇼. 반갑다.”
입을 열자마자 더욱 자욱하게 풍기는 술 냄새.
옆을 보니 바닥까지 비워진 술병이 몇 개나 나뒹굴고 있다.
오랜 호스트 세월로 단련된 타카쇼조차 전부 마셨다간 뒷일을 감당하기 힘들어 보이는 도수요 양이다.
마녀가 된 이후 신시우가 저렇게 취한 걸 보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
“여기 편하다. 좋은 냄새가 나.”
제 정신이 아닌지 검은 봉투에 뺨을 비비며 흐릿한 발음으로 말하는 시우.
타카쇼는 밤새 도둑고양이가 날 뛴 것처럼 난장판이 된 쓰레기 터를 보며 떨떠름하게 말했다.
“너가 베개로 쓰고 있는 그거 마녀님들이 사용한 냅킨 모아둔 봉투거든.”
“오, 역시 마녀. 어쩐지 푹신하더라. 지배인을 불러 줘 팁을 줘야겠어.”
“…….”
타카쇼는 머리를 긁적였다.
제정신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지에서 귀환한 친우를, 게다가 여러 차례 빚진 친우를 이대로 두고 갈 수도 없다.
“댓바람부터 뭔 지랄이래.”
시우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짐짝 옮기듯 질질 끌고 가는 타카쇼.
그러면서 대강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타카쇼… 따흐흑, 나 차였어.”
“뭐? 드디어 그렇게 기쁜 소식이?”
“샤론이 나랑 헤어지재.”
“샤론 씨가?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시네.”
“난 쓰레기야! 쓰레기 옆에 놔줘! 이제부터 거기가 내 집이야!”
“미관을 해치니까 그럴 수 없어. 그리고 쓰레기한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존나 모르겠어. 살려줘! 도와줘!”
“…도와주기야 할 텐데, 일단 술 좀 깨라. 아…!”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한심하게도 우는 신시우를 보며 적당히 이죽거리다가 무언가 깨달은 타카쇼.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시우는 분명 그 어떤 위대한 황제도 이룩하지 못했을 하렘의 주인공이 되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모솔 아다였다.
여태 평화로운 연애만을 거듭한 나머지 여자친구와 싸웠을 때, 다퉜을 때, 이별의 위기와 직면했을 때 대응할 메뉴얼이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건 좀 도와줘야겠군.”
타카쇼는 투덜거리면서도 시우를 사장실 소파에 눕혀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