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747화 (747/917)

#747

1.

-짤그락

시우는 의자에 놓인 열쇠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스승님은 마녀이기 이전에 무예의 달인이다.

전신의 기감이 극도록 발달해 있어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 콩 한쪽을 두어도 평소와 뭔가 다르다는 걸 감지해내는, 실로 판타지스러운 능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런 스승님이 실수로 열쇠를 두고 갔다?

심지어 방금까지 그토록 날이 선 채 린네를 감시하고 있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녀가 남기고 간 열쇠의 의미에서 여러 가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츤데레군.”

그 전에 린네가 끼어들었다.

“우리 문화권에서는 저런 행동을 츤데레라는 신조어로 칭한다.”

“그렇군요.”

생각해보니 린네는 일본 출신이었지.

고택에만 박혀 있다고 해도 현세 야쿠자 조직의 뒷배인 만큼 저런 지식을 알고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렇다해도 인접한 이웃국가에서 넘어와 20년 넘게 유행 중인 단어를 시우가 모를 리 없다.

일본인 친구 타카쇼도 있고, 애초에 아직 인간의 시간을 사는 중인 시우가 보기엔 딱히 신조어도 아니다.

“겉과 속이 다른 인물. 겉으로는 차갑게 대하지만 속으로는 부끄럼을 타는 따뜻한 인물을 그렇게 부른다.”

사실 스승님은 츤데레와는 거리가 멀고, 린네야말로 츤데레의 정의에 부합하긴하다.

하지만 린네는 그런 부분은 자각하지 못한 듯 열심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 신조어는 요즘 유행하는 합성어로 츤츤과 데레데레가 섞인 것이라느니 말이다.

모르는 사실을 가르쳐주게 되어 뿌듯해하는 듯한 모습에 시우도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우셨나요?”

“조직의 쿠미쵸에게 들었다.”

“쿠미쵸?”

“회장직이다.”

“…….”

야쿠자 오야붕이 린네에게 츤데레의 정의에 대해 가르쳐주는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 촌극 한 편 뚝딱이었으나, 지금은 그렇게 한가로이 상상 촌극을 관람할 시간이 없었다.

“스승님은 그런 타입은 아니십니다.”

“알고 있다. 농담이다.”

“그런 심각한 표정으로 하는 농담이 어디 있습니까.”

“너무 걱정이 많아 보이기에 해보았다.”

쓴웃음을 짓는 시우와 여전히 무표정한 린네.

아무튼 그녀가 남기고간 열쇠의 의미는 어렵지 않다.

엘로아는 아마 린네를 절대로 용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시우를 납치한 장본인인데다가 그녀가 닦아온 평생의 신념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인물이었으므로.

따라서 스승님이 린네에게 보인 적의엔 거짓이 없다.

그러나 반대로 스승님은 린네에게 빚을 졌다.

과정이야 어찌 됐건 린네는 시우를 위해 목숨을 여러 번 도박판 위에 올렸고, 결국 무사히 시우를 구출해 내었다.

그런 점에서는 또 일말의 부채의식을 느끼는 것이겠지.

린네를 시우의 연인으로서 인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재판에 넘겨져 죽음을 맞이하는 건 원하지 않는다.

그런 결말을 시우가 원하지 않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린네가 최악의 상황에 빠지지 않게끔 실수인 척 열쇠를 두고 간 것이다.

만약 시우가 린네를 몰래 탈출시킨다면 그에 대한 정치적 후폭풍을 책임져 주겠다는 무언의 약속으로, 원리원칙주의자인 스승님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철컹!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철창이 사라졌다.

린네는 손목과 발목에 사슬이 감겨 멀리 나올 수 없는 상태이기에 시우가 안에 들어섰다.

“어후, 진짜 룸컨디션이 별로네요. 여기에서 종일 명상하셨던 건가요?”

도로시가 지내던 곳은 양반이었다.

가장 밑층인 감옥은 침대도 없고 바닥에선 스산한 한기가 올라온다.

그렇게나 분전해주었던 린네를 이곳에 곧장 가둬두어야 했다니 이해는 가지만 입맛이 참 씁쓸했다.

“지낼 만하다. 하지만….”

-찰그락 찰그락

쇠사슬을 열심히 당겨와 시우에게 안기는 린네.

아예 고개를 푹 파묻고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낭군이 보고 싶었다.”

고작 하루 만에 만난 것인데 몇 개월간 떨어져 있던 것처럼 꼬옥 안기는 린네.

그렇게 한참을 안겨있던 린네에게 시우는 열쇠를 들이밀었다.

“불편하시죠? 풀어 드릴게요.”

손목과 발목이 있는 족쇄를 풀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린네는 선뜻 팔을 내밀지 않았다.

오히려 시우가 만질 수 없게끔 등 뒤로 두 팔목을 감춘다.

“싫다.”

“예?”

“지금 탈출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상황을 보시면 알겠지만, 스승님께서도 허락하신 일일 겁니다. 괜히 더 오래 있다 상황이 복잡해 질 수도 있으니 손수 마무리 지으시려는 거겠죠.”

이렇게까지 협조해주신 걸 보면 당연히 출입국 관리소 측에도 손을 써두실 게 분명하다.

스승님은 꽤 오래전부터 출입국장과 긴밀한 친분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린네가 말한 ‘다음’은 시우 생각과는 다른 모양이다.

“다시 낭군의 옆에 연인으로 있을 수 있는 건가?”

“스승님이라면…. 아마도 모른 척 해주실 겁니다.”

말은 험악하게 늘어놓았던 스승님이지만, 이렇게 열쇠를 남기고간 시점에선 확신할 수 있다.

린네가 현세로 돌아가고 시우가 종종 만나러 간다 해도 아마 스승님은 눈 감고 모른 척해줄 것이다.

다른 연인들과 지내는 것처럼 두루두루 어울려 지내는 것이 아니라 아마 ‘없는 사람’쯤으로 취급하겠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우울해지던 시우는 자신의 낙관을 발견했다.

어쩌다보니 많은 연인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별다른 트러블 없이 서로서로 잘 지내왔다.

함께 여행을 가기도 하고, 친구 사이처럼 지냈으며, 아예 세쌍둥이가 되어 극강의 케미를 자랑하게 된 예도 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며 화합을 이룬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가 분에 넘치는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난 여기에 남겠다.”

린네가 선언한다.

“처첩의 화목 또한 아내로서 응당 보여야 할 덕목이다.”

“혹시 이것도 농담인가요?”

린네가 나름의 재치를 발휘해 분위기를 띄우려 했던 건 이해하지만 상황이 꽤 심각하다.

혹시 린네가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싶어 물은 시우.

“가화만사성이다.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할 정도로 잘 어울린다면 풀리지 않을 일이 없다. 가족의 화목은 가장 우선시되는 덕목이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더라면 실소하고 말았을 린네의 논리.

그러나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아는 시우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대신 솔직하게 의견을 전했다.

“그런 이유라면 우선 안전을 도모하시고 후일을 생각하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린네는 고개를 저었다.

“허나 나는 여태 티페레트를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그렇다고 들었다.

린네가 굳이 시우를 제자로 들인 것도 같은 이유였고 말이다.

근데 그게 이 대화랑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미지수다.

“아까 나와 그녀의 대화를 들었겠지. 티페레트는 당연하다는 양 자신이 처, 나를 첩이라 칭했다.”

무심했던 린네의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투쟁심이 서린다.

“그런 상대에게 온정을 구걸 받아 묵인하에 내연녀가 되는 건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한다.”

“아이고….”

린네가 조용하고 말수가 없어서 그렇지 그 내면의 투쟁심이 얼마나 강한지는 시우도 인지하는 바이다.

둘 사이의 악연까지 생각한다면 고분고분 넘어갈 수 없다.

“염치없지만, 낭군에게 부탁해도 되겠나? 정정당당한 승부의 장이 설 수 있게 해다오.”

“만약 제가 그래도 떠나달라고 말씀드린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

어지간하면 ‘당연히 따라야 한다’라고 말할 린네가 고개를 훽 돌리며 답변을 피한다.

“린네 님?”

“…….”

“린네 님?”

“…….”

그 모습이 꽤 귀여워 피하는 고개를 따라가며 연신 말을 걸자 도리 짓을 하며 시선과 대답을 피하는 린네.

울컥했는지 입술이 점점 삐져나오려고 한다.

“하지 마라.”

“네네, 장난 그만 칠게요.”

아무튼 행복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사방팔방으로 문어발을 뻗쳐놓고 너무 무책임하게 방임해왔는지도 모른다.

일부다처제의 주인공이 되려면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럼, 뭐….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어떻게든 스승님을 설득하는 일.

추방은 면치 못하겠지만, 린네가 정식 연인으로 자리 잡게 하는 일.

“낭군.”

“네.”

“이번 일이 끝나면 함께 여행을 갈 수 있겠나?”

“확답은 못 드리겠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

“알겠다.”

린네와 가벼운 입맞춤을 한 시우는 다시 침실로 향했다.

곧장 스승님을 만나기 전 이 문제를 다른 연인들과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2.

쌍둥이는 견습마녀라 취침 중.

르뤼에 역시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푹 자고 있었기에 대화는 자연스레 아멜리아와 이어가게 되었다.

침실을 나서 소파에 바짝 붙어 앉은 두 사람.

“시우, 저는 괜찮아요.”

가장 먼저 린네의 사정을 고하며 양해를 구하는 시우를 아멜리아는 너그로이 받아주었다.

“아까도 말했잖아요. 저 또한 시우의 다정함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라고.”

“그래도….”

“또 두 사람이 늘었다고 제가 지기라도 할까 봐요?”

주먹을 불끈 쥐며 아멜리아답지 않게 투지를 내보인다.

“그나저나 샤론은 어디 있나요? 아직 안돌아온 건가요?”

잠깐 자리를 비웠거니 했는데 아직도 없다니 명백히 이상한 일이었다.

또한 앞으로의 청사진을 위해선 샤론의 도움은 필요하다.

스승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샤론이기도 하고, 또 싹싹한 성격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이제껏 연인 사이의 중화제 역할을 수행해 주었지 않는가?

그 노하우를 듣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얼굴에 새겨져 있던 투지는 샤론의 이름이 나온 순간 옅은 염려의 기색으로 돌변했다.

“확실히 샤론 양의 조력이 있다면 훨씬 수월하겠지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잠시 머뭇거리던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싸웠어요.”

“네?”

“시우가 잠들어 있는 동안 엄청 크게 화냈어요. 지금은 공방에 틀어박혀 있을 거에요.”

샤론이 누군가와 싸운다?

듣고도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대강 투닥투닥 다툰 것이 아니다.

게다가 모처럼 돌아온 시우의 얼굴도 보지 않고 공방에 틀어박혀 있을 정도이니….

드디어 분에 넘치던 행복의 대가가 찾아오는가? 싶을 정도다.

“다 제 잘못이에요. 시우가 만나서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그래… 야죠.”

어쩐지 복잡하게만 꼬여가는 일을 느끼며 시우는 곧장 샤론의 공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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