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6
1.
대작전 끝에 헥센나흐트에서 탈출에 성공한 시우.
엘로아의 입장에서 결과를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가장 중요한 것.
엘로아의 부주의 탓에 또 한 번 그를 잃을 뻔했으나, 그녀의 제자이자 사랑하는 연인이 신시우가 무사히 다치지 않고 돌아왔다.
그 다음.
엘로아는 작위를 잃지 않았다.
엄포를 늘어놓았던 에렐림 공작의 말과는 달리 엘로아에게서 공작 작위를 몰수하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엘로아가 많은 마녀의 존경을 받는 것도 사실.
적어도 게헨나에 티페레트가 공작이라는 사실에 불만이나 의혹을 품는 이는 없었다.
헥센나흐트의 성장은 별 위협이 되지 않으며 게헨나는 여전히 굳건하다는 선전을 위해서라도 티페레트의 이름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다음.
제자를 납치했던 공범이자 악명 높은 공적이 연인이랍시고 그를 따라왔다.
물론 엘로아는 공적을 무조건 혐오하며 배척해야 한다고 여기는 인물이 아니다.
그녀가 이유를 불문하고 죽음을 선고하는 공적은 ‘견습마녀 살해’라는 죄목을 저지른 공적뿐이다.
이 복잡한 세계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로는 완벽히 재어낼 수 없는 까닭이다.
따라서 엘로아가 도로시에게 보인 태도는 대체로 온건했다.
꼭 시우의 구출에 그녀의 조력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었고, 도로시는 쓸 곳 없는 살생을 전혀 저지르지 않은 마녀였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번 상대는 일찍이 엘로아와도 몇 차례 충돌한 적이 있는 검의 마녀.
무를 숭상하고 더 높은 경지를 밟는다는 핑계로 현세를 돌아다니며 강자에게 생사결을 걸어온 검귀를 엘로아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 가증스런 공적이 누구보다 사랑하는 시우를 낭군으로 섬기다니.
사랑스러운 제자가 그런 공적을 연인으로 인정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떤 얼굴로 제자를 보아야 할지 알 수 없었음에, 혹여 린네가 수상한 꿍꿍이를 펼치면 즉각 베어버릴 생각에.
엘로아는 오랜만에 재회한 제자를 홀로 남겨둔 채 이 칙칙한 지하 감옥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었다.
린네는 지하감옥에 갇힌 이래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명상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고, 엘로아도 굳이 그녀와 말을 섞지 않았다.
기나긴 침묵을 뚫는 부름이 들려온다.
“스승님.”
시우는 간만에 뵙는 스승님을 향해 타박타박 걸어갔다.
“저 왔습니다.”
이번 사건의 발단엔 스승님의 작은 실수가 있었다.
또 시우가 사라지고 그녀가 했을 마음고생을 생각한다면, 당장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빨갛게 하고 달려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매서운 표정으로 앉아있던 그녀의 낯빛은 시우를 발견하고서도 딱딱하기 짝이 없었다.
예상했던 바다.
남은 평생을 악한 공적을 토벌하는데 바치겠다 맹세한 스승님에게 사정 불문하고 연인으로 자리 잡은 린네의 존재가 용인될 리 없다.
하지만 스승님의 가까이 즉, 명상하던 자세 그대로 눈만 뜬 린네가 보이는 곳까지 도달했을 때.
시우는 촉촉하게 젖은 엘로아의 핑크빛 눈을 보았다.
‘당장 안아줘’ ‘당장 키스해줘’라고 아주 강하게 호소하는 듯한 눈빛과는 달리 스승님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일어났는가?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네.”
“네, 스승님 덕분이죠.”
“그게 어찌 내 덕인가? 큰소리친 주제에 그대가 잡혀가는 걸 막지도 못했거늘…. 면목이 없네.”
고개를 푹 떨구는 엘로아.
삐쭉 튀어나온 머리카락 한 올까지 시무룩하게 주저앉아있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시우가 조심스레 감싸 안으려 했을 때….
“…시우.”
엘로아는 아무 말 없이 시우의 손을 치워냈다.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엄청난 충격이었다.
토끼보다 외로움을 잘 타는 스승님이 스킨십을 거부한다?
심지어 이렇게 오랜만에 우여곡절 끝에 재회하는데?
그건 비단 린네가 옆에 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이 문제를 순순히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지금은 아닐세….”
시우의 놀란 반응에 괴로운 표정으로 팔꿈치를 부여잡는 스승님.
태도는 쌀쌀 맞으면서 톡 건드리면 방울방울 눈물을 쏟아낼 듯한, 그야말로 혼란이 극에 달한 느낌이었다.
“낭군.”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린네는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나 철창을 붙들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시우에게 가까이 오기 위해서인지 한껏 몸을 붙인 채 말을 건네는 린네.
“다친 곳은 없나?”
그녀는 헥센나흐트를 나선 시점부터 정신을 잃고 있었다.
따라서 시우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걱정이 들어 물었을 뿐이다.
-부웅!
그때 검이 휘둘러지며 린네의 눈동자 바로 앞에 검날이 멈춰 선다.
검 끝에 스친 머리카락 몇 올이 팔랑팔랑 잘려나갔다.
“철창에 다가오지 말라 경고했거늘.”
“…….”
검을 휘두른 장본인은 엘로아.
방금 나약했던 분위기는 어디 갔는지 등골이 섬뜩한 살기가 줄기줄기 뻗는다.
린네는 조금만 움직여도 눈동자가 찔릴 위협에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엘로아를 보았다.
“스승님!”
설마 이렇게 강압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던 시우는 엘로아의 손목을 붙잡으려 들었다.
당연히 스승님의 심정도 이해한다.
린네와 시간을 보낸 건 시우뿐이다.
스승님은 린네의 처지도 입장도, 그리고 그녀가 몇 번이나 시우를 위해 목숨을 걸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손목을 붙들린 상태에서도 꿈쩍 않는 스승님의 팔.
“그대가 몇 명의 연인을 들이건 질책하지 않았네.”
대신 아주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내겐 그대를 독점할 자격도, 그대가 행복할 자격을 제한할 자격도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세.”
“스승님, 제 말 좀 들어주세요.”
“하지만 이 여자는 아닐세. 명명백백한 공적을 연인으로 삼는다니 말이 된다고 보는가? 내 지금껏 그대를 대함에 있어 너무 무르게만 행동했나 보군.”
스승님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누구보다 알고 있는 만큼, 또 그녀가 시우를 질책하며 속으로 얼마나 눈물을 삼키는지 아는 만큼 한 마디도 항변할 수 없었다.
“그대가 내게 뭘 부탁하려는지는 알고 있네.”
시우가 금화의 마녀로부터 어떤 제안을 받았는지, 에렐림 공작이 뒤에서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는 다른 일행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에렐림 공작은 발칙하게도 시우의 신변을 남몰래 확보하려 들었다.
그녀가 이번 도발 사건을 대놓고 문제 삼지 못하는 것도 헥센나흐트와의 뒷거래 정황이 포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작 작위의 박탈을 운운한 주제에 뒷구멍으로는 음흉한 수작을 부린 에렐림에겐 명분이 없다.
거기에 엘로아가 분노를 느끼고 있는 건 둘째치고, ‘공작’으로서 정식으로 항의한다면 린네와 도로시의 무사 귀환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평생 공적을 적대시한 걸로 유명한 엘로아가 두 사람의 보증을 서준다면 다른 마녀들도 크게 반발하지 않을 터.
데네브가 말한 ‘열쇠는 티페레트 공작이 쥐고 있다’는 이를 뜻하는 말이다.
“그대는 다정한 사람이니 한 번쯤 정에 휩쓸려 그릇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보네. 도움을 받은 사람을 함부로 내치는 일 따윈 할 수 없겠지.”
“그렇습니다. 꼭 돕고 싶습니다.”
“조건을 걸겠네. 도로시 양은 신경 쓸 것 없네. 만약 그대가 검의 마녀가 연인임을 부정한다면,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약조한다면 나 역시 명예를 걸고 두 사람의 귀환을 위해 힘쓰겠네.”
“스승님….”
“이자는 죄인이오 악인일세. 이번만큼은 어리광 따위 접어두게나.”
이는 엘로아가 양보할 수 있는 최대의 선이었다.
“티페레트 공작.”
그때 린네가 엘로아를 불렀다.
서늘하게 돌아가는 엘로아의 시선.
일말의 따뜻함도 없는 눈빛은 또 한 번의 배척 의지를 조용히 읊조린다.
“나의 과거가 문제라면 속죄하겠다.”
“속죄? 쉽게도 입에 담는군.”
으르렁 목울대를 울리는 엘로아의 앞에서 린네는 태연하게도 살벌한 말을 내뱉었다.
“영원히 치유되지 않도록 내 두 엄지를 잘라라. 발목을 끊고, 눈을 파내라. 그대의 장기로 낙인을 봉인해도 좋다.”
담담히 내뱉는 내용은 끔찍하기 짝이 없다.
엘로아가 일생을 복수를 위해 바쳤다면, 린네는 검을 위해 바쳤다.
그런 그녀에게 검을 쥘 수 있는 엄지와 땅을 박찰 수 있게 해주는 아킬레스건, 또 시력을 앗아간다는 건 검사로서 죽음을 의미한다.
낙인을 봉인한다는 건 마녀로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낭군의 옆에 있을 수 없다면 차라리 죽여라. 목숨에 미련 따윈 없다.”
린네는 그 모든 걸 속죄의 이름으로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엘로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를 낭군이라 부르지 말게.”
“낭군은 낭군이다. 나는 남은 인생을 낭군에게 온전히 바치기로 다짐했다.”
“분명 하지 말라 했네.”
“처첩 다툼을 벌일 마음은 없다.”
“나는 그의 부인이 아니고, 네년 역시 첩이 되는 일을 없을 것이야.”
대사 로그만 따낸다면 뭔가 귀여운 스승님 간의 싸움이지만 분위기가 진짜 너무 살벌하다.
시우가 재빨리 끼어들어 말했다.
“스승님, 그렇다면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사실 아무 생각 없이 스승님께 부탁하려던 건 아니다.
충분한 사정을 설명하고 린네의 ‘속죄’ 역시 다른 방향으로 고려해왔다.
앨리스와 마찬가지로 가뜩이나 일손이 부족한 위치포인트에 무상봉사의 명목으로 린네를 투입하게끔 부탁하려 한 것이다.
22 위계 전투 마녀가 합류한다면 혼란한 시국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건 엘로아의 마음이 이 정도로 불신에 치달아 있을 줄 모르기에 꺼냈던 안일한 계획이었다.
일단 열심히 설명을 해보았지만, 스승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린네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단코 허락하지 않을 걸세. 현세가 혼란하다면 내가 더욱 힘을 쓰면 될 일. 적의 적이 반드시 아군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네.”
“스승님….”
“…조금 쉬어야겠군. 그대도 쉬게나.”
더는 들어 줄 수 없다는 듯 엘로아는 피하듯이 자리를 떴다.
시우의 부탁을 거절해야 하는 것만으로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
차마 그녀를 붙잡지 못하고 멀거니 바라보는 시우.
그렇게 지하감옥에는 덩그러니 린네와 시우만 남게 되었다.
시우는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스승님이 앉아 있던 의자에는 감옥의 철창과 족쇄에 사용되는 열쇠꾸러미가 실수라기엔 너무도 다소곳이 놓여있었다.